23.03.13 10:27최종 업데이트 23.03.1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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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묻지 않는 ‘제3자 변제’를 핵심으로 하는 윤석열 정부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배상 해법 발표를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6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주최로 열렸다. 참가자들이 윤석열 대통령, 박진 외교부장관, 김성한 국가안보실장,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 서민정 외교부 아태국장을 을사오적과 비교해 ‘강제동원 계묘5적’으로 표현한 피켓을 만들어 규탄하고 있다. ⓒ 권우성


물어 볼 수 있는 위치라면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국민 59%가 반대하는 강제징용(강제동원) 해법으로 추진되는 제3자 변제안. 대통령은 무슨 생각으로 강행 의지를 굽히지 않는지 말이다.

대통령이 말하는 명분이라는 것도, 국익을 위해서라는 주장도 전혀 설득되지 않는다. "지지율 0%, 1%가 나와도 바로잡아야 할 건 바로잡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지만,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정책의 실행은 결단이 아니라 독단이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이 전혀 지지하지 않는 것을 정권의 의지만으로 밀어붙이는 걸 독재라 한다.


2018년 대법원이 내린 판결은 강제동원 피해자 원고 5명에 대한 배상을 미쓰비시중공업이 해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피고는 미쓰비시중공업이고 원고의 배상 청구 내용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라 적시하고 있다.

강제 노동을 시키고 지급하지 않는 돈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소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강제노동을 시킨 미쓰비시중공업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우리 기업의 출연금을 모아 대신 배상하고 일본 기업에 구상권 청구나 일본 정부에 사과 요구도 하지 않겠다는 정책을 강제동원 해법이라고 발표했다. 대법원 결정을 무시한 반헌법적 발상이다.

"내가 구걸하는 거지냐? 그런 돈은 받기 싫다"며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화를 내는 건 일본의 사과도 없고 피고 기업인 미쓰비시의 배상금도 아닌 돈을 동냥처럼 받을 수 없다는 표명이다. 그런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피해자 입장을 존중한 결정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가해다. 

윤석열 정부의 또 다른 설명은 한일 양국의 공동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지난 6일 박진 외교부 장관은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면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미래지향적 관계를 만들자고 일본에 주문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설명이나 박진 장관의 바람과 같은 일본의 화답은 찾기 어렵다.

우리 정부가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발전적 계승을 이야기할 때 일본 외무상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마지못한 억지 화답이다.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역대 내각 (대부분이 아베 정권과 비슷한 역사 인식을 가진 자민당 정권)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는 건, 북진통일론과 6.15공동 선언을 함께 이어받겠다는 궤변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이참에 강제징용이나 강제노동은 없었다는 왜곡을 사실화하려는 일본이다. 지난 9일 일본 외무상은 일본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에서 '어떤 것도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상의 강제노동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들을 강제노동이라고 표현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물의 절반 이상은 (우리 정부가) 채웠고, 앞으로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서 물컵은 더 채워질 것'이라는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일본의 이런 태도를 보고도 물컵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공동이익을 위해 축배를 들 수 있을 거라고 보는지 궁금하다. 현실감 없는 안일한 인식에 보는 국민들이 창피하고 모멸감마저 든다.

대통령의 잘못된 역사 인식
 

윤석열 대통령이 7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일본의 완승이다. 어떤 것도 양보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 제3자 변제안에 일본 집권여당 내에서 나온 반응이다. '완승'은 '완패'하는 상대방이 있어야 성립될 수 있는 표현이다. 윤석열 정부는 공동이익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본 완승, 한국 완패' 주장이 난무한다.

초계기 문제,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한국 정부와 풀어야 한다며 일본 정부를 부추기는 일본 언론도 많아졌다. 수출 규제에는 한국의 자세를 보겠다며 또다시 저자세를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가해자 언급 없는 3.1절 축사, 강제징용의 제3자 변제안, 세계무역기구(WTO) 분쟁절차 중단까지... 이러니 독도마저 넘길 수 있겠다는 웃지 못할 농담마저 오갈 수 있는 현실이 된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은 일본의 요구뿐만 아니라 미국의 요구와 맞닿은 부분이다. 한일 관계를 개선시켜 한미일 안보라인을 구축하겠다는 건 미국의 오래된 구상이다. 제3자 변제안 발표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파트너십의 획기적인 새장을 열었다며 심야 환영 성명을 낸 것도,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약속한 것도 미중 양국 갈등에 한국을 든든한 아군으로 끌여들이려는 의도와 무관치 않다.

더 나가 미중 갈등에서 한국과 일본에 군사·경제·지리적으로 최전선 역할을 맡길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는 게 미국이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속내다. 이런 와중에 윤 대통령이 일본의 잘못보다는 한국의 무능을 탓하는 3.1절 기념사를 내고 대법원판결마저 무력화시키면서 일본에 손 내미는 형국이니 바이든 대통령이 한밤중에 환영 성명을 낸 것을 그저 호의로만 볼 일은 아니다.

그러나 대중국 한미일 안보라인 동참은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할 일이다. 일본의 요구대로 군사정보보호협정 지소미아를 가동하고, 미국의 희망처럼 일본과 같이 대중국 압박에 동참하는 건 남북 관계가 가장 큰 리스크로 거론되는 우리 경제에 또 다른 불안 요인을 키우는 일이다.

역대 정부가 미중 갈등 국면에서 힘겨운 일방적 선택을 주저했던 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미일 안보라인이 구축되고 미중 갈등에서 우리나라가 최전선에 선다면, 제3자 변제안의 후과보다 더 큰 안보와 경제의 폭풍이 될 수 있다. 신중히 숙고해야 할 일인데 제3자 변제안 발표로 성큼 한발을 놓는다는 생각이 든다.

1961년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 후 일본 정계 거물이 모인 한 요정에서 다다미 위에 양손을 짚고 유창한 일본어로 "잘 부탁드립니다. 미숙한 소생을 잘 지도해 주십시오"라고 인사했다는 박정희 대통령.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65년 한일조약이 맺어졌다. 잘못된 후과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굴욕과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한일·한미 정상회담 전에 제3자 변제안이 어떤 평지풍파로 다가올지 가늠해야 한다. "지지율 0%, 1%가 나와도" 강행해야 할 정책은 없다. 국가의 이익이 될 리도 만무하다. 결단이 아니라 독단이다.

독단이 독재로 흘러간다는 건 숱한 과거가 증명한다. 강제징용 해법으로 내놓은 제3자 변제안.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한 결단이라고? 그건 대통령의 잘못된 역사 인식에서 비롯된 독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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