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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22년 3월 2일 한 교실에 등교한 학생들이 앉아 있다.
  지난 2022년 3월 2일 한 교실에 등교한 학생들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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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년이 시작됐다. 지난 2일 저녁에 입학식도 치렀고, 학교생활에 대한 오리엔테이션도 마쳤다. 올해도 지난해처럼 1학년 담임교사 직책을 맡았다. 정들었던 아이들과 함께 2학년에 가고 싶었지만, 담당 교과인 한국사가 1학년에 고정돼 있어 어쩔 수 없다.

앞으로 며칠만 지나면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질 테지만, 지금 교실은 담임교사가 자리를 비워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차분하다. 출신 중학교가 달라 서먹한 탓이다. 서로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거나 그냥 책상에 엎드려 있는 등 데면데면한 분위기다.

서먹하기는 담임교사도 마찬가지다. 3월은 아이들과 상호신뢰를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골든타임'이다. 이른바 한 해 농사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때로, 수업 시간을 제외하곤 거의 매시간 교실을 찾아가 아이들을 만난다. 하다못해 얼굴과 이름이라도 서둘러 익혀야 한다.

이맘때쯤 상담을 위해 담임교사가 아이들로부터 미리 받는 서류가 하나 있다. 가족 관계와 자신의 평소 일상, 취미, 특기 등을 소개하는 자기소개서다. 특별한 양식은 없지만, 초중학교 때의 생활과 친한 친구, 담임교사에게 바라는 점 등을 자유롭게 적도록 한다.

과거에는 '가정환경조사서'라고 해 집 주소는 물론, 부모님의 직업과 경제적 여건 등 민감한 개인정보까지 관행적으로 적도록 했었다. 아이들이 적길 부담스러워하고, 인권침해 소지조차 다분해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당연히 자기소개서도 개인정보 제공 동의하에 제출받는다.

새 학년 담임교사의 업무는 자기소개서를 꼼꼼하게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특히 갓 입학한 1학년의 경우라면 결코 소홀해서는 안 된다. 중학교로부터 이관된 정보 중에 담임교사가 건네받는 건 출신 중학교의 이름과 내신 성적이 사실상 전부여서다.

몸이 아픈 아이들이 적지 않다는 게 맨 먼저 눈에 띈다. 요즘 아이들에게 비염과 아토피성 피부염 등 알레르기 질환은 더는 특별한 질병이 아니다. 정기적인 통원 치료를 받고 있으니 배려해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교실 내 가습과 먼지 관리에 신경 써달라는 세세한 내용도 있다.

요즘엔 비만과 당뇨, 통풍 등 성인병이 있는 아이도 있고, 드물게는 치료를 받으며 매일 약을 챙겨 먹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학교의 역할이 지식 교육으로부터 돌봄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느낀다.

학교와 학원, 주객의 전도 

아픈 아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 외에 도드라져 보이는 게 또 하나 있다. 반 아이들 28명 중에 학원에 다니지 않는 경우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중학교 때 내신 성적 기준 2%대의 최상위권부터 90% 언저리의 아이들까지 예외 없이 보습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학원에 애면글면할 필요가 있나 싶은 아이들이 숱하다. 물어보면, 부모님이 다니라니까 다니고, 주변에서 다들 다니니까 다니는 경우가 태반이다. 홀로 공부해도 충분한 최상위권과 다녀봐야 별 차도가 없을 아이들조차 학원에 목매단 이유는 불안감 때문이라는 방증이다.

예년에도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다수이긴 했지만, 집이나 독서실에서 홀로 공부한다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중3 때 과감히 학원을 끊었다는 아이도 드물지 않았다. 학원은 중학교 때 '졸업'하는 것 아니냐며 친구들에게 농을 걸기도 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주객이 전도'되는 양상을 보인다. 대입을 준비하기 위해선 사교육이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믿어선지, 숫제 학원이 먼저고 학교가 나중이라는 식이다. 버젓이 학교의 학사일정을 학원의 수강 시간에 맞춰달라고 요구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많다.

개학 전부터 학교마다 학부모들의 전화가 폭주했다. 등하교 시간은 물론, 방과 후 수업 계획과 야간자율학습(야자) 일정, 심지어 아직 정해지지도 않은 과목별 교재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주중엔 학교, 주말엔 학원'이었던 아이들의 일상이 이젠 주중의 주간에만 학교에 머무는 걸로 획일화하고 있다.

지금껏 '학원은 제2의 학교'라더니, 이젠 자리를 바꿔 '학교가 제2의 학원'인 양 취급받고 있다. 밤낮 대입 준비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숨통을 틔워줄 요량으로 하교 시간을 앞당겨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학원으로 향하는 시간만 앞당겨졌을 뿐이다.

광주광역시교육청의 경우, 지난해까지 매주 수요일을 '광주교육공동체의 날'로 지정해 운영해왔다. 월화수목금 닷새 중 하루만이라도 방과 후 수업과 야자를 실시하지 말도록 사실상 강제한 것이다. 분명 정책의 도입 취지는 교육적이었으나,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매주 수요일은 지역 사교육 시장의 '대목'으로 전락했고, 학원마다 문전성시를 이뤘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말할 것 없고, 교사들 사이에서도 수요일과 주말은 '학원 가는 날'로 각인됐다. 처음엔 국영수 위주의 보습 학원이 늘더니, 이젠 별의별 예체능 학원까지 생겨나고 있다.

결국 올해 교육청도 '백기 투항'했다. 급기야 공문을 내려 '광주교육공동체의 날'을 학교마다 자율적으로 운영하도록 했다. 매주 수요일 방과 후 수업을 운영하든 야자를 실시하든 학교장 재량에 맡기겠다는 거다. 내용상 학원가에 미칠 파장이 만만치 않은 사안이다.

학교도 '과거로 퇴행할' 채비를 하고 있다. 진학 실적에 목매단 일부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수요일 방과 후 수업과 야자의 부활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교육청의 지침은 '자율 운영'이지만, 학교는 '강제 허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상 과거 야자도 자율이었던 적은 없었다.

놀라운 건, 교육청의 공문에도 정작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는 점이다. 수요일이 과거처럼 운영된다고 해도, 학원을 끊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답했다. 이미 학원에 일상이 맞춰져 있어서 학교의 방과 후 수업과 야자를 신청하지 않겠다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바짝 긴장했던 학원가도 교육청의 공문과 학교의 대응을 '종이호랑이'처럼 여기는 듯하다. 학원에 가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그들의 우군이 돼 학교의 '자율 운영'을 압박하는 모양새다. 내 반의 경우만 해도 수요일 야자를 신청한 아이가 단 한 명도 없다.

기초 수급자 가정의 아이조차 학원 두세 곳은 기본이다. 과목당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학원비의 부담이 만만치 않을 텐데도 수강료가 없는 학교의 방과 후 수업과 야자를 마다하고 죄다 학원으로 향한다. 학벌 구조와 대입만으론 설명이 안 될 만큼 맹목적인 모습이다.

학원이라는 '수렁'에 빠진 사람들  
 
서울의 한 스터디카페.
 서울의 한 스터디카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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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야자가 끝난 밤 10시 이후에도 스터디 카페에 가지 않으면 왠지 불안하다고 말한다. 하다못해 그 시간 인터넷 강의라도 듣고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거다. 학원이란 일단 발을 담그고 나면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 같은 곳이라는 걸 그들도 모르진 않는다.

요즘엔 친구도 학원에서 사귄다고 한다. 학원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거다. 한 아이는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는 내신 등급을 놓고 다투는 경쟁자지만, 학원 친구는 서로의 공부를 도와주는 협조자라고 부연했다. 그래서 학원에 다닌다는 그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이 놀라울 따름이다.

엊그제 한 아이가 조퇴해야겠다며 교무실을 찾아왔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야겠다는 거다. 정규수업이 끝난 뒤 병원에 가도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럼 학원 시간에 맞출 수 없다고 답했다. 예전 같으면 대번 돌려보냈을 텐데, 학부모까지 전화를 걸어와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질병 조퇴'라는 학생부 기록이 대입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학교의 정규수업은 빼도 학원 수업은 놓칠 수 없다는 그들의 모습에 교사로서 자존감에 생채기가 난다. 그래서였을까. 지난 겨울방학에 10여 년간 함께 근무했던 동료 교사가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을 차렸다.

태그:#사교육 열풍, #방과 후 수업, #야간자율학습, #광주교육공동체의 날, #가정환경조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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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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