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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걷는 것은 동시대를 기억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그 안에 우리네 삶의 오늘과 내일, 어제가 있다. ‘골목길 TMI’는 골목의 새로운 변화와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번 호에는 배다리에서 도원역 뒤편 언덕으로 이어지는 ‘쇠뿔고갯길’을 거닐었다. 비탈진 그 길엔 굴곡진 근대사를 교육과 자립의 열망으로 살아낸 인천시민들의 정신이 맥맥이 이어지고 있었다.[기자말]
제물포항에서 서울 가던 옛 경인가도京仁街道, 일제강점기 민족의 앞날을 밝힌 길, 지난 한 세기 공동체를 따스히 품은 비탈길이 새 시대의 질문 앞에 놓였다.2022년 여름, 재개발로 철거되고 있는 쇠뿔고개의 마을. ⓒ 유승현 포토 디렉터
 
100년 넘게 이어진 교육 열망, 창영초
 

인천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최초로 조선 어린이들을 가르치고자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인천시 문화재로 지정된 옛 교사(校舍) 앞에는 횃불 모양의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비'가 웅장하게 서 있다.
 
1919년 3월 6일 정오, 인천 3·1운동의 불씨가 교정에서 타올랐다. 상급반 학생들이 만세의 첫 깃발을 올렸다. 그들은 어느 단체의 지령이나 누구의 지시도 없이 자발적으로 항일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대한 독립 만세!" 목이 터져라 외친 피맺힌 함성은 배다리, 동인천역 부근 채미전 거리 등 시내로 퍼져 나갔다.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궐기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116년 역사가 깃든 배움터는 우리 민족의 교육열과 자립의 열망을 보여준다. 2부제로 수업을 나눌 만큼 배움에 목마른 아이가 많았다. 갈수록 학생 수가 많아져 1970년대 전교생은 6000명을 웃돌았다.

미술사를 처음 학문으로 승화한 우현 고유섭,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 이경성, 전 대법원장 조진만, '그리운 금강산' 작곡자 최영섭,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부하들을 살린 강재구 소령, 프로야구 류현진 선수 등이 창영초가 배출한 인물들이다.

인천창영초등학교 동구 우각로15번길 16

조선 민중을 밝힌 근대 교육, 종교의 길
 
?116년의 역사가 깃든 창영초의 옛 학교 명패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된 옛 교사 ⓒ 유승현 포토 디렉터

1883년 1월 인천항 개항 이후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은 종파를 막론하고 순교의 피가 서린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그중 감리교회는 인천 동구 우각로 일대를 기점으로 교세를 확장했다. 인천에 스며든 종교의 이정표적 건물들이 나지막한 언덕길을 따라 이어진다.
 
영화학교 옆에 우뚝 서 있는 창영감리교회. 우각로는 근대 교육과 종교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창영초에서 담 하나 건너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초등학교인 영화초등학교와 영화국제관광고등학교가 나온다. 미국 감리회 선교사 G.H 존스가 1893년에 세웠다. 그 옆엔 창영감리교회가 나란히 서 있다. 에즈베리 동산으로 불리는 교회 뒤쪽 언덕에는 감리교 여선교사 기숙사가 감춰져 있다. 남선교사 합숙소는 1955년 신설된 인천세무서 청사로 개축되었다.

영화초·영화국제관광고 동구 우각로 39
창영감리교회 동구 우각로 43


3월이면 학생들로 넘쳐나던 책방 거리의 봄
 
옛 아벨서점 자리에서 만난 곽현숙 대표. 1970년대엔 배다리 철교부터 창영초, 영화초 앞까지 책방이 성업했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1970~1980년대 이 일대는 학생들로 넘쳐났다. 새 학기만 되면 까까머리, 단발머리 남녀 학생들이 새카맣게 모여들었다. <수학의 정석> <성문종합영어> 같은 학습 교재는 물론이고 교과서도 활발히 거래됐다. 지금의 헌책방 거리뿐 아니라 창영초, 영화초 앞까지 크고 작은 서점이 성업했다. 국제서림, 한미서점, 평화서점, 학생서림 등 1969년 판 <인천상공명감>에 기재돼 있는 책방만 26개에 이를 정도.

터줏대감 '아벨서점'이 처음 책방을 연 곳도 창영종합사회복지관 맞은편 자리였다. 지금은 카페로 변했다. 곽현숙(73) 대표는 이맘때면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아련하다.

"10년 전까지도 학생이 많았어요. 철교 앞 우각로와 금곡로 입구로는 중구 쪽 학교의 학생들이, 동구청길과 세무서길로는 도화동 학생들이 무리 지어 들어섰죠."
 

오늘 책방 거리는 철교 앞 한곳으로 좁혀졌다. 교재로 빽빽하던 책방엔 새로움이 꽂혀간다. 애들 참고서 사러 오던 어른들이 자신들을 위한 책을 사러 온다. 이 길을 평생 지킨 곽 대표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고 싶은 사람들이 여미는 아름다움을 매일 본다.

커피내리는고냥(옛 아벨서점 자리) 동구 우각로 58 1층 | 032-773-0725
아벨서점 동구 금곡로 5-1 | 032-766-9523


영화학교 앞 노부부의 문구점
 
영화학교 정문 앞 문방구, 영화문구사의 주인. 빛바랜 추억이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는 단골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부부가 인천에 온 건 45년 전. 영화학교 정문 앞, 명당에 자리 잡았다. 워낙 바지런해 문방구 안팎은 언제나 반질반질 윤이 났다. 아이들이 우르르 떼로 몰려들어도 물건이 한눈에 보이니 '척'하면 '착'하고 찾는 물건을 내주었다. "나이 들어서 예전만 못해." 말은 그렇게 해도 할머니의 오래된 문방구는 여전히 정갈하다.

"예전엔 재미났지. 새 학기, 운동회, 졸업식 때 학용품이 최고의 선물이었으니까. 지금은 학생 수도 줄고, 문방구도 학교 앞에 하나씩밖에 안 남았어."

개학이 코앞인데도 거리가 한산하다. 그래도 매일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문을 열어둔다.

"졸업생들이 계속 찾아와. 다들 어른이 돼서 나는 못 알아보는데, 기억하고 오면 반갑지."

이젠 모두 빛바랜 추억이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는 단골들이 있어 노부부는 외롭지 않다.

영화문구사 동구 우각로 40 | 032-773-5011

마을의 열린 공간, 이야기가 머무는 곳
 
배다리와 쇠뿔고개 사이에 자리한 복합문화공간, 창영당. 조은숙 작가와 주민들이 마을 이야기를 담은 ‘15분 연극제’를 준비 중이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우각로 6번지. 창영당은 동화구연가이자 시인, 연극배우인 조은숙(55) 작가가 꾸민 공간이다. 지난 2017년 마을과 사람들이 좋아 정착했다. '이야기 가게'라는 부제를 단 이곳에서 조 작가는 초등학생부터 90세 어르신까지 이웃 모두에게 공간을 활짝 열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작년에 창영초 아이들과 <금창동 동네 한바퀴>, 어르신들과는 <창영동, 풀꽃들의 이야기>라는 이야기책을 만들었어요. 휴대폰 속 사진 한 장을 열고 시를 한 번 써보는 거죠.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올해는 거리로 나와 연극을 올리는 '15분 연극제'에 마을 사람들과 참여할 계획이다. 아이스께끼집 창영당, 배다리 성냥공장 등 마을 이야기를 담아낸다.

'어지간히 흉년이 들더라도/ 우리들 가난한 사랑은 배고프지 않다/ 더는 허기지지 않게/ 쌀 알 같은 이야기들 한 됫박식 꺼내/찬밥을 남기지 않을 정도의 먹을 만큼만 뜬다 (배다리, 조은숙 작)'라고 마을을 노래한 조 작가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척 기대된다.
 
창영당 동구 우각로 6 

실크스크린의 역사는 살아 있다
 
거리 이름을 달고 있는 주식회사 쇠뿔. 상패, 냉장고 자석, 에코백 등 기념품이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상패, 냉장고 자석, 현수막으로 만든 에코백 등 사회적기업 '쇠뿔'에는 기념품들이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다. 예전처럼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스무 살에 인천에 올라와 평생 이 길을 지킨 최현모(62) 대표는 실크스크린 가게가 하나둘 사라지는 모습이 못내 아쉽다.

"1980년대까지도 이 거리에 실크스크린 가게가 즐비했어요. 인쇄 역사가 있는 거리입니다."

최 대표는 올봄 실크스크린 체험 프로그램을 본격 운영할 계획이다.

주식회사 쇠뿔 동구 우각로 46 | 032-761-5678

인천의 마지막 달동네, 전도관 일대
 
재개발로 곧 허물어질 누군가의 오래된 삶터. ⓒ 유승현 포토 디렉터
 
마당이 곧 길이 되고, 네 것 내 것이 따로 없는 한 뼘 앞마당에서 주민들은 서로 기대어 살았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인천세무서를 지나면 쇠뿔고갯길은 좁고 가팔라진다. 1883년 개항을 거치며 일본인들이 몰려들어 지내던 개항장 지역과 달리 이곳은 변두리로 밀려난 조선인들이 주로 살던 곳이었다. 오늘날엔 비탈진 골목에 낡고 오래된 집이 다닥다닥 붙어살아 '인천의 달동네'로 불렸다.

달동네 꼭대기에 우뚝 솟은 '전도관'은 한때 인천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인천의 랜드마크였다. 주인은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그곳에는 원래 초대 주한 미국 공사를 지낸 알렌의 여름 별장이 있었다. 이후 계명학원, 대학교 분교 등으로 쓰이다가 1957년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가 건물을 헐고 전도관을 세웠다. 1978년 전도관은 이곳을 떠났다.

쇠락해 가던 마을에 우각로 문화마을 사업이 추진돼 생기가 돌았던 적도 있다. 예술가들이 동네 언덕으로 올라와 텅 빈 집과 쓰러져 가는 담벼락, 황량한 콘크리트 계단에 알록달록 고운 색을 칠했다. 그렇게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해 20명의 예술인이 마을 주민이 됐다. 빈집이 공예방으로, 영화 제작소로, 작은 도서관으로, 게스트 하우스로 변신했다.
 
2022년 여름, 전도관구역주택재개발 지역의 모습. 비탈을 감아내리며 다닥다닥 붙어 있던 500여 채 집이 헐리고 전도관도 철거를 기다리고 있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김종선(60) 작가는 전도관이 철거되기 직전, 마을을 나왔다.

"남들에겐 낡고 오래된 이곳이 흉물로 보이겠지만, 역사와 서민의 삶이 묻어 있는 소중한 곳입니다. 속도가 느린 건데, 골목 하나 남겨 두면 안 되었을까요."
 

현재 미추홀구 숭의동 109번지 일원에선 전도관구역주택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500여 채 주택이 철거되고 아파트 숲이 들어선다. 배성수(54)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과 들어간 펜스 안엔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만 남아 있었다. 세월을 삼킨 황토는 말이 없다. 2023년 2월, 갑자기 찾아 온 꽃샘추위에 코끝이 시리다.
 
2023년 2월, 민둥산만 남은 쇠뿔고개에 오른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 숭의동 109~119번지 일대에 임대 88가구를 포함해 1700여 가구의 대형 아파트가 들어선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
사진 유승현 포토 디렉터
도움말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굿모닝인천> 2023년 3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굿모닝인천, #인천, #쇠뿔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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