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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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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봄으로 바뀌어가고 있지만, 누군가는 혹독한 겨울을 여전히 통과하고 있다. 때때로 매서운 바람을 피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다다른다. 누군가 온기가 담긴 손길을 내밀어준다면 고맙겠지만, 개인의 불행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 않다. 사람들이 오가는 회생법원의 2층 복도에도 겨울의 시샘은 현재 진행형이다. 민원인들의 발걸음과 전화통화 소리로 실내의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져 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은 오가는 이들의 안색을 더 어둡게 했다.

커피 한잔의 도움을 받아 업무를 시작하고 잠시 한숨을 돌리는 오후 4시. 두리번거리며 계단을 올라오는 중년의 남자가 물었다. 그의 눈빛에서 '혹시나' 하는 머뭇거림이 전해져왔다. 가만히 살펴보니 한쪽 다리를 가볍게 절고 있었다. 어렵고 힘든 발걸음이었을까.

"저... 선생님, 저기요.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요즘, 그... 파산은 잘 해주나요?"

한 마디 한 마디가 힘들게 나오는 목소리였다. 검정색 마스크를 썼지만 피곤해 보이는 표정, 핏발 선 눈동자. 그에게서는 약간의 술 냄새도 풍겼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걸음을 멈추고 질문의 맥락을 헤아렸다. 아마도 회생법원에 개인파산신청을 위해 방문한 민원인이겠지. 또한, 파산신청을 받아들이는 선고(면책) 비율을 묻고 있을 터이다.

"아! 개인파산 면책사건이요? 정확한 인용 비율은 기억이 안 나지만, 요건에 맞춰 신청을 잘 하시면 파산면책을 잘해주는 편입니다."

남성은 지나가는 누군가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어서 그런지, 복도 초입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무원의 입장에서 업무 외적인 민원인의 넋두리를 들어주는 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 된다. 자칫하면 자신의 인생사를 장시간 풀어내서 한편의 자서전을 쓰는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정확한 질문과 응답에 최소한의 시간을 들이는 편이다.

그 남자의 사정 

"제가요. 치킨집을 하다가... 그니까 OO치킨 아시죠? 그놈의 코로나가 뭔지... 장사가 잘 안 되기도 하고, 배달하다가 뒷차에 치여서 오토바이 사고도 나고... 빚이 계속 늘어났죠... 가게는 잘 안되고... 아이들한테 돈 들어갈 일은 많고... 그랬죠."

다행히 이분은 아주 간략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띄엄띄엄 스토리 속에 삶의 고단함과 상처가 묻어났다. 얘기를 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고 내리깔고 있었다. 주위에 오가는 다른 민원인들과 직원들을 의식하는지 마스크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채권자로 예측되는 누군가의 탄식과 고함 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네, 그러셨군요. 선생님께서도 법원까지 오시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혹시 여기 오시기 전에 여기저기 파산신청에 대해 알아보셨어요?(최근에는 스마트폰을 통한 인터넷 문화와 민원서비스 확대로 인해 검색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게 많다)"

"그러니까, 그게... 누가 변호사나 법무사 찾아가면 쉽게 할 수 있다고 그러는데... 주위에 워낙에 아는 사람도 없고... 또 그럴만한 비용도 없고 해서... 막연하게 온 게...지금."


법원에 신청하는 각종 재판이나 비송사건(법원이 관여해야 할 사항을 통상의 소송 절차에 의하지 않고 쉬운 절차로 처리하는 사건)은 대부분 전문가인 변호사나 법무사가 대리인으로서 역할을 한다. 절차 자체가 생소하고 개인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사건을 위임하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서 이마저도 힘든 분들이 많다.

개인회생이나 파산신청 사건은 전문가들의 처리비용이 최소 200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 자산이라곤 채무밖에 없는 이들에게는 이 금액 또한 감당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날은 채무자들에 대해 파산과 회생절차를 설명하는 날이라 많은 신청인들이 복도를 오가고 있었다. 다양한 연령대의 민원인들이 '채무자회생법(약칭)'을 통한 구제절차를 통해 기사회생을 바라고 있었다. 회생·파산제도의 개요와 진행절차, 채무자로서 주의사항을 법원 내외의 전문가들로부터 설명을 듣는 것은 낯선 제도와 절차를 이해하고 필요한 행동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면 혹시, 제가 바로 도움을 받을 수는 있나요? 제가 잘 몰라서... 궁금한 것도 많기도 하고요."

법원에 초행인 민원인에게 원하는 절차를 모두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까닭에 각급 법원 민원상담실에 전문 상담관들이 상주하며 대화를 진행한다. 서울회생법원도 유선상담과 현장상담을 통해 채무자들의 회생과 파산절차를 돕는다.

민사와 형사재판을 주로 하는 일반 지방법원과 달리 회생법원은 '채무자 구제와 배려'라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이는 민사비송 영역 중에서도 국가의 후견적 관여를 통해 채무자의 경제적 파산상황을 완화하고 다시 재출발할 수 있게끔 회생절차를 진행한다.

"네, 이 건물 1층 종합민원실에 가시면 NEW START(뉴 스타트) 상담센터가 있습니다. 센터에는 변호사와 법무사, 회생위원 등 전문가들이 상담을 해주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방문목적과 사정을 말씀하시면 앞으로 원하시는 절차와 준비할 서류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실 겁니다."

"그러면, 개인이 파산이나 회생을 구분해서 신청할 수는 있나요? 저도 제 채무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돼서..."

"당연합니다. 선생님의 변제의사와 경제적 상황에 따라 회생제도를 통해 일부 변제를 하거나, 아니면 파산선고를 통해 면책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실 겁니다."


"아이고,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늘 여기 오기까지 잠도 못 이루고 맘고생이 심했는데... 이렇게 친절하게 말씀해주셔서."

"별말씀을요.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시면 안내창구에서 상담센터를 물어보시고, 대기하시면 원하시는 대답을 들으실 겁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진짜로 마음고생하셨습니다. 혹여나 상담을 받고도 신청이 어려우시면 법률구조공단을 방문하시면 신청대행도 받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말씀드리면 신용회복위원회를 가시면 부채증명발급이나 개인파산 신청 절차에 대해서 무료 작성 지원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일단 상담 받아보시고 편하신 방법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2022년 7월 14일 서울회생법원 안의 모습. "개인회생" "파산면책" 등 안내푯말이 있다.
 2022년 7월 14일 서울회생법원 안의 모습. "개인회생" "파산면책" 등 안내푯말이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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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를 잇기 위해 

잠시 15분 정도의 대화였지만, 중년 남성의 눈동자에 잠시 생기가 도는 듯했다. 1층으로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힘이 없어보였지만, 무언가 소득 있는 발걸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손에 서류봉투를 들고 바쁘게 오가는 민원인들 사이로 잠시 한조각 햇빛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우리가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날의 햇살을 소망하듯이, 누군가는 파산상황에서 일상으로의 회복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국가와 법제도의 존재이유는 국민을 위한 공공선(공동선)의 추구에 있다. 스콜라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공공선이 정부의 목적이자 법의 목적이라고 한다. 계몽주의 철학자인 장자크 루소 또한 사회는 각 개인들의 공통의 이익을 가질 때 작동하며, 국가의 최종 목적은 공동선의 현실화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공동체와 법제도가 처한 현실은 철학자들의 이상적인 주장에 어느 정도 부합하고 있을까?

경제적 곤궁과 과도한 채무로 서울회생법원에 개인회생과 개인파산을 신청하는 이들의 수는 한 달에 대략 2000~3000명 정도에 달한다. 전국법원에 접수되는 신청 건수는 대략 1만여 건에 이른다. 이들 통계 수치는 경제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동된다.

이들 중 일부는 개인회생제도를 통해 채권자들에게 일부변제를 통해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고, 일부는 파산면책 제도를 통해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난다. 어쩌면, 감정 없는 법제도가 가진 가장 선한 모습을 개인회생·파산 제도에서 보고 있지 않을까?(반면, 채권자들에게는 가혹한 법의 이면일 수도 있겠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사회적 삶이 달랑 종이 한 장에 담기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한계 상황에 다다른 누군가의 삶은 신청서라는 양식에 담겨 법과 제도의 도마 위에 오르고 평가받는다. 더욱이 파편화된 개인의 삶은 자본주의적 냉혹함에 무기력하기만 하다.

비록 법은 인간의 얼굴을 닮지 않았지만, 법과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과 절차는 인간의 심장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제도는 분명 존재의의를 가진다. 물론 이러한 절차는 채권자의 일방적인 희생과 양보를 전제로 한다. 채권자와의 관계에서 양면의 평가를 받는 채무자 회생·파산제도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생각해보면, 법원에 파산신청을 한다고 해서 인생파산 신청까지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경제활동 복귀라는 새로운 봄날을 위해 재기의 기회를 주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사회공동체의 공공선이 아닐까.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를 이어주는 공공선(公共善)과 개인선(個人善)의 조화를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회생법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발행할 예정입니다.


태그:#개인회생 파산제도, #공공선, #파산신청, #채무자회생법, #회생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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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교육원 교수를 거쳐 현장에서 밥벌이 중입니다. 부모와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꿈꾸고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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