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3 04:52최종 업데이트 23.03.13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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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다임러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강제노동자들 ⓒMercedes-Benz Classic, Archive, Stuttgart ⓒ Mercedes-Benz, Archive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나치 박해의 희생자들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항상 분명히 인정해 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배상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도덕적 책임은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특히 젊은 세대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지난해 1월 독일 재정부 차관 루이제 횔셔(Luise Hölscher)가 기억책임미래 재단(Stiftung Erinnerung, Verantwortung und Zukunft, EVZ)과 함께 독일 청년 세대를 위한 기억 프로젝트 계획을 발표하며 한 말이다.

나치 강제노동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마무리하고 기억 문화를 발전시켜 온 독일이 최근 고민에 빠졌다. 시대의 증언자는 점점 사라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독일의 청년 세대들에게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게 할 것인가?

가해국과 가해 기업이 만든 기억책임미래 재단

독일 정부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약 2500만 명이 나치의 강제노동 피해를 입었다. 독일은 1952년 이스라엘 등 피해국에 총 44억 마르크를 지급했지만, 피해자 개인에 대한 배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나치의 강제노동 피해자였던 노베르트 볼하임(Norbert Wollheim)이 독일 화학기업 이게파르벤(IG Farben)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볼하임은 폴란드 모노비츠에 있던 아우슈비츠 3호 수감자였다. 이곳은 근처에 위치한 이게파르벤의 합성고무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해 새롭게 지어진 수용소였다. 이게파르벤은 아우슈비츠 3호, 즉 강제노동자 숙소가 될 이 수용소를 짓는 데 직접 7억 마르크를 투자했고 이후 합성고무 및 연료 생산 공장에 노동자들을 투입했다. 

이게파르벤은 다른 독일 기업을 대신해 책임을 부인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강제노동을 국가의 책임으로 돌리며 심지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보다 공장의 환경이 좋아 노동자들이 기꺼이 일했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법적 선례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기업 측은 결국 피해자와 3000만 마르크 보상에 합의했다. 하지만 볼하임 재판은 역사에 남는 재판이 됐고 개별 기업에 배상 요구가 줄을 이었다.
  
1980년대까지 강제노동 피해자 그룹과 크룹(Krupp), AEG 텔레풍켄(Telefunken), 지멘스(Siemens), 라인메탈(Rheinmetall), 다임러 벤츠(Daimler-Benz) 등 개별 기업과의 배상 논의가 꾸준히 진행됐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치 강제노동자 배상에 관한  근본적인 해결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커졌다.
  

2000년 8월 2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기억책임미래 재단법이 통과됐다. ⓒBundesarchiv, B145 Bild 00046031/ Christin Sutterheim/EVZ 홈페이지 갈무리 ⓒ Bundesarchiv

 
1990년대 중반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미국 법원에 제기한 집단 소송으로 미국 내 독일 기업이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특히 알리안츠 그룹과 도이체 방크 등 나치에 부역한 독일 기업이 집중 포화를 맞으며 미국 확장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독일 연방정부는 독일 12개 대기업 대표와 만났다. '미국의 집단 소송에 대응하고, 우리 국가의 경제와 명성에 반하는 캠페인의 근본 문제를 없애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2000년 설립된 기억책임미래 재단이다. 

독일 정부가 50억 마르크, 독일 산업계가 50억 마르크의 기금을 출연했다. 참여한 독일 기업은 6500곳. 누구나 볼 수 있는 참여 기업 명단에는 우리가 아는 독일 회사 대부분이 포함돼 있다.

재단은 2007년 강제노동 피해자 및 후손들 보상금 지급을 공식 완료했다. 총 98개국 166만 명. 보상금은 총 44억 유로.

 

독일 미래책임기억 재단이 보상금을 지급한 나치 강제노동자 및 희생자들 거주국 분포 ⓒ EVZ

 
강제노동 보상 그 후
 
희생자들에게는 금전적 보상만큼이나 그들이 처했던 고통에 대한 인정이 중요합니다.
- 2000년 샬로테 크노블로흐(Charlotte Knobloch) 뮌헨 및 오버바이에른 이스라엘 문화공동체 대표.
 
기억책임미래 재단은 보상금 지급 이후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재단은 나치의 강제노동 역사에 대한 기억과 기록 작업에 착수했다. 가능한 한 많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받아 기록을 남겼다. 2010년부터 6여년간 '강제노동, 독일인, 강제 노동자 그리고 전쟁'이라는 제목의 순회 전시를 열었다. 이 전시는 올해부터 바이마르에서 상시 전시될 예정이다.

재단의 현재 임무는 ▲역사 기억 ▲인권 활동 ▲나치 희생자들에 대한 존중으로 나뉜다. 장기적인 활동을 위해 3억 5000만 유로의 자본금을 마련하고 동유럽, 이스라엘, 독일 등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기억 문화 프로젝트에 매년 800만 유로를 지원한다. 
 

독일 기억책임미래재단이 강제노동 피해자 보상을 마무리한 이후 구축한 피해자 아카이브. ⓒ zwangsarbeit-archiv.de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증언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독일의 고민이 시작됐다. 지금 청년 세대들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 현재 다문화 특성이 강해지는 독일에서 다시 대두되는 인종주의, 차별, 혐오, 배제를 보며 독일은 무엇을 다시 기억해야 하는가. 최근 독일은 이 문제에 매달렸다.

지난해 독일 연방재정부와 기억책임미래 재단은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재단의 새로운 과제를 발표했다. 바로 '나치 불의에 대한 교육 어젠다'다. 미래의 기억 전수자가 될 현재 청년을 대상으로 역사를 인식하고, 나치 피해자와 당시의 차별과 배제를 기억하고, 피해자와 피해 그룹을 계속해서 드러내는 교육 프로젝트에 집중한다. 그동안 유대인과는 달리 나치의 피해 그룹으로 잘 인식되지 못했던 신티족과 로마족 등에 대한 주제도 강화할 계획이다.

독일 청년 84% "과거를 다루는 일은 중요하다"

기억책임미래 재단과 빌리펠트 대학 연구소는 지난 2월 독일 청년 348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MEMO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청년들이 과거사와 기억 문화를 어떻게 접하고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조사한 내용이었다.

*MEMO (Multidimensionaler Erinnerungsmonitor) 다차원 기억 모니터 연구

설문조사 응답자의 84.8%가 "우리의 과거를 다루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답했다. '나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집중적으로 다루었는가'라는 질문에는 62.8%가 (매우)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라고 답했다. 설문자 응답자의 4분의 3이 아직까지 나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조사 결과는 젊은이들이 역사에 관심이 없다는 세간의 편견을 뒤집었다. 독일 전 연령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보다 청년들은 더 역사에 관심이 많고, 기억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간 독일 사회가 꾸준히 강조해 온 기억 문화 덕분이다.

청년들은 학교 수업뿐 아니라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서도 관련 콘텐츠를 꾸준히 접하고 있었다. 독일 공영방송도 새로운 플랫폼으로 역사를 알리고 소통하는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아네테 샤반(Annette Schavan) 기억책임미래재단 감독위원회 대표는 "이런 연구는 기억은 과정이며 결코 완전한 제품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세대와 출신, 교육 어젠다가 우리의 기억을 결정한다. 나치 불의를 다루는 것은 우리의 평생 교육에 속한다"라고 말했다.

현재의 청년들은 미래의 기억 전수자들이다. 독일은 이제 새로운 세대에 맞추어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 문화와 정치 교육을 시작하고 있다. 
 

지난해 2월 독일 재정부와 독일 기억미래책임 재단이 함께 발표한 '교육 어젠다-나치 불의'. 독일의 과거사 반성과 기억 작업은 세대를 이어 진행중이다. ⓒ Jan Zappner/Raum 11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인식한다

과거사 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마무리했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도 바쁜데 독일은 왜 이렇게 기억을 강조하는 것일까.

위 설문조사에 참여한 독일 청년 60%가 "나치 역사를 다루며 차별과 배제라는 주제에 더욱 예민해졌다"라고 답했다. 과거를 배우고 기억하며 오늘날의 불의함을 더 잘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청년들은 현재의 정치·사회적 담론에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행동한다.

기억책임미래재단 안드레아 데스포트(Andrea Despot) 대표는 "나치에 대한 권리 박탈, 박해를 다루는 사람은 오늘날의 차별에 더 민감하다. 역사를 전달하는 것은 연대와 민주주의를 촉진한다"라고 강조했다.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마치고 수용소로 돌아가는 노동자들 ⓒ FSB archiv / https://www.sachsenhausen-sbg.de/geschichte/1936-1945-konzentrationslager-sachsenhausen ⓒ FSB archiv/sachsenhausen-

 
이것이 바로 독일 사회가 과거의 기억을 강조하는 이유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과거에 매몰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인식하는 정치 교육이다. 

독일은 또한 '금전적 보상'으로 피해 보상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억책임미래 재단은 "나치의 강제노동은 (나치에) 경제적으로만 기여한 것이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나치가 '열등'하다고 간주한 집단을 박해하고 배제하고 착취하기 위한 도구였다. 나치 노동은 인종적 이데올로기였다"라고 설명한다.

역사를 직시하고 해결하는 일이 단순히 금전 배상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기억책임미래 재단이 2007년 공식 보상을 다 마치고도 아직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이유다.

기억책임미래재단은 이름에서 그 가치를 그대로 드러낸다. 기억과 책임, 미래는 따로 놀지 않는다. 기억해야 책임을 지고, 책임을 져야 미래가 있다. 그리고 그 주체는 당연히 '가해국'인 독일이다.

최근 한국에서 들려온 강제징용안 해법을 듣고 순간 착각했다. 한국이 가해국인 줄 알았다. 피해자, 가해자를 나눠서 악을 쓰지 말자고 한다. 그런 건 보통 가해자가 하는 말이다. 독일은 외부의 압박에 떠밀리기는 했지만 가해자가 나서서, 지금까지 모범적인 선례를 보여주고 있다. 보고도 배우지 못하는 일본 정부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일본에 되려 머리를 조아리는 한국 정부가 안타까울 뿐이다.
덧붙이는 글 MEMO (Multidimensionaler Erinnerungsmonitor) 다차원 기억 모니터 청소년 연구는 아래 사이트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https://www.stiftung-evz.de/was-wir-foerdern/handlungsfelder-cluster/bilden-fuer-lebendiges-erinnern/memo-jugendstu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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