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권중희 선생(오른쪽)과 기자가 '민족혼은 살아있다'라는 권중희 선생의 휘호를 펼치고 있다(2004년).
▲ "민족혼은 살아있다" 권중희 선생(오른쪽)과 기자가 '민족혼은 살아있다'라는 권중희 선생의 휘호를 펼치고 있다(2004년).
ⓒ 오마이뉴스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역사를 위하여

"탕! 탕! 탕! 탕!"

1949년 6월 26일, 서울 종로구 평동 경교장에서 한낮 정적을 깨트리는 네 발의 총성이 잇따라 울렸다. 그날은 일요일로 그 일대는 도심답지 않게 고즈넉했다.

그날 정오가 조금 지난 12시 34분 무렵, 육군 정복차림의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는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을 향하여 미제 45구경 권총 방아쇠를 네 차례나 당겼다.

그 네 발의 총알은 김구의 가슴과 얼굴을 관통했고, 그 가운데 두 개는 유리창도 꿰뚫었다. 또한 그 네 발의 총알은 백성들의 간장을 찢었을 뿐 아니라, 이 나라 민족정기에 움푹한 생채기를 남겼다.

그날부터 70년 이상이 지났다. 그날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암살범 안두희를 둘러싼 백범 시해사건의 배후는 아직도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동안 시계 제로의 컴컴한 암흑 속에서도 암살범을 끈질기게 추적 응징하고, 그 진상을 밝히고자 고군분투한 의인들이 있었다.

이분들은 김용희, 곽태영, 권중희, 박기서씨 등이다. 이미 고인이 된 분도 있지만 나는 기록자로 곽태영, 권중희, 박기서씨 세 분 의인과 마지막 비서실장 선우진 선생을 직접 만났다. 그리하여 <오마이뉴스> 여러 열성 독자의 성원으로 백범 암살배후 진상규명을 위해 2004년 1월 31일부터 그해 3월 17일까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40여 일간 다녀오기도 했다. 내가 시민기자로 권중희 선생을 만난 때는 2003년으로 그분의 행적을 취재한 지 만 20년이 지났다.
 
안두희의 총을 맞고 깊은 잠이 드신 백범 선생
 안두희의 총을 맞고 깊은 잠이 드신 백범 선생
ⓒ 백범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지난 9일 오후 2시, 서울의 한 방송국(JTBC) 제작진 세 분이 카메라를 메고 내 집을 방문했다. 그들은 나에게 20년 전,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 추적한 권중희 선생을 만난 얘기와 그분과 함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다녀온 얘기를 그들 방송국에서 신설한 <듣고 보니 그럴 싸…>라는 프로그램에 담고 싶어 찾아왔단다.

요즘 '민족'이라는 말을 하면 꾀죄죄한 골동품으로 '꼰대'소리 듣기 딱 알맞은 시류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 세대에게는 천금보다 더 소중한 보배 같은 금언이라서 나는 그동안 애써 소지한 모든 자료를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장장 3시간 대담을 했다. 그런 뒤 그들을 돌려보내자 모처럼 긴 대담으로 기운과 넋이 다 빠진 듯, 피로와 함께 졸음이 와서 한잠을 자고 난 다음에야 이 기사를 쓴다.
  
1948년 4월, 북행길에 오르신 백범 일행(왼쪽부터 선우진 비서, 백범선생, 아들 김신).
 1948년 4월, 북행길에 오르신 백범 일행(왼쪽부터 선우진 비서, 백범선생, 아들 김신).
ⓒ 백범기념관

관련사진보기

 
가슴 먹먹한 말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은 이 나라 독립운동의 화신이다. 그분은 안두희가 쏜 네 발의 총알을 맞고 조국의 제단에 당신을 오롯이 바치면서 생애를 마무리하셨다.

"그 첫 번째 총알로 흘리신 피는 조국의 수호신에게 바치셨다. 그 두 번째 총알로 흘리신 피는 당신의 동지들에게 바치셨다. 그 세 번째 총알로 흘리신 피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바치셨다. 그 네 번째 총알로 흘리신 피는 이 나라 후세들에게 바치셨다." - 박도 지음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중에서

백범 선생님! 1948년 5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고자 북으로 떠나기 전, 기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남조선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락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일생을 바쳐서 오로지 자기 동족을 구하고 국가를 사랑한다는 내가, 몇 해 남지 않은 여생을 안락하게 보내기 위하여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동포의 지옥행을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그해 4월 19일, 북행 날 아침 선생의 앞길을 막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가면 공산당에 붙들려서 오지 못할까 염려해서인 줄 안다. 그러나 내가 살면 얼마를 사느냐. 제발 나의 길을 막지 말라."
 

백범 선생님! 당신이 붉은 피를 흘리시며 서거하신지 꼭 1년 만에 선생께서 예언하신 대로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두 조각이 난 조국의 형제자매들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원수지간이 돼 강대국이 가져다 준 무기로 온 나라를 불구덩이로 만들었습니다.
  
권중희 선생으로부터 몽둥이 세례를 받고 누워있는 암살범 안두희와 가해자 권중희 선생.
 권중희 선생으로부터 몽둥이 세례를 받고 누워있는 암살범 안두희와 가해자 권중희 선생.
ⓒ 권중희 제공

관련사진보기

 
후손들이 그런 오욕의 역사를 배우다가 선생님의 거룩한 발자취를 알게 되면 얼마나 감동하며 뿌듯함을 느끼겠습니까? 선생님이 평생 걸어가신 조국의 광복과 조국 통일의 길은 우리들에게는 등대요, 한 줄기 거룩한 빛일 것입니다.

오늘 제 집을 찾은 세 젊은이들이 의욕적으로 만든 프로그램이 이즈음 민족애가 잦아들고 있는 이 척박한 땅의 후손들에게 뜨거운 감동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하여 조국통일의 열망이 용솟음쳐 마침내 한반도가 하나 된 나라로 항구적인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하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자정이 넘은 깊은 밤중임에도 미국 워싱턴 D.C. 덜레스공항에 영접을 나온 재미 동포들이 권 선생과 기자에게 손다발을 안겨주고 있다.
 자정이 넘은 깊은 밤중임에도 미국 워싱턴 D.C. 덜레스공항에 영접을 나온 재미 동포들이 권 선생과 기자에게 손다발을 안겨주고 있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저승으로 보낸 박기서 의사와 정의봉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저승으로 보낸 박기서 의사와 정의봉
ⓒ 박기서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권중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 추적 얘기를 더 알고 싶은 분은 오마이뉴스 "내 평생 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 (2003. 11. 7.) 기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태그:#권중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