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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신탁통치반대 시위 당시 경교장의 사진(LIFE Alfred, Elsenstaedt  촬영)
 1946년 신탁통치반대 시위 당시 경교장의 사진(LIFE Alfred, Elsenstaedt 촬영)
ⓒ 서울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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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에게 특종은 쉽지 않다. 낚시꾼에게 월척이 쉽지 않은 것과 비슷하달까. 언론인 김자동은 대단히 부지런했다. 아니 성실했다고 할 것이다. 외신부에 근무하면서 미국에 대해 더 자세히, 깊이 알고자 두 종의 잡지를 자비로 구독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은 기자들도 다르지 않다. 

해방 후 한미관계는 반공을 앞세워 동맹관계를 지속해왔다. 미국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미국에 대해 폭넓고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런데 당시 외신을 통해 들어오는 미국 관련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나는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잡지인 <먼스리 리뷰(Monthly Review)>와 <더네이션(The Nation)> 두 종을 개인적으로 구독하였다. 직접 미국에 주문해서 우편으로 받아보았다. 이 잡지들은 미국의 외교 정책에 대해 다양하고도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내용들을 접할 수 있었음은 물론 미국에 대한 시각을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됐다. (주석 18)

그가 외신부와 정치부 그리고 판문점을 출입하면서 주목한 일은 해방공간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 우리나라(민족)의 비극의 단초가 되고 후과로 작용하는 신탁통치문제였다.

해방 1년 후에 귀국하여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전개된 찬반투쟁을 겪지는 않았지만, 그 상처는 현재진행형이었다.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되기도 전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제목의 오보(가짜뉴스)를 냈다. 이는 미군정과 맥아더 태평양사령부의 '공작'의 결과물이었다.
▲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 기사(1945. 12. 27)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되기도 전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제목의 오보(가짜뉴스)를 냈다. 이는 미군정과 맥아더 태평양사령부의 '공작'의 결과물이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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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신문사에 근무할 때 <뉴욕타임즈>에서 얄타 비밀문서를 공개한 적이 있다. 64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웬일인지 국내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얄타 비밀문서가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의 발원지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문건은 베일에 덮여 있었다. 그는 미국대사관을 찾아가 64쪽이 실린 <뉴욕타임즈>를 입수했다. 그리고 숙독했다.

민족문제 특히 국가의 자주독립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분단의 변곡점이 된 신탁통치 문제를 파고 들었다. 

1945년 12월 말, 미·영·소 3국의 대표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결정한 것이다. 한반도의 신탁통치 방침은 2차 대전 중 미국에 의해 구상되고 카이로, 테헤란, 얄타회담 등에서 제안된 바 있었다.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고 한반도는 미·소 양군이 분할점령하게 되자 관련국들은 한반도문제 처리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3상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미국 번즈 국무장관은 한국인의 참여가 극히 제한된 '통일시정기구'를 설치하여 "미·영·중·소 4개국 대표로 구성되는 집행위원회에서 권한을 수행할 것"과 "탁치기간은 5년을 넘지 않을 것"등을 골자로 하는 안을 제시했다. 이에 소련은 "한국의 독립을 부여하기 위한 임시정부 수립과 그 전제로서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등 4개항의 수정안을 제안했다. 회의는 소련의 수정안을 약간 손질하여 최종안으로 채택했다. 

신탁통치안을 요약하면 ①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한다. ② 한국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③ 미·영·소·중의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한반도의 5년 신탁통치안이 국내 신문에 보도되면서 남한의 정국은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았다. 신탁통치 소식을 처음 전한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27일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란 제목의 1면 머릿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외신 보도의 형식이었다.

이 기사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떤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서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면서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란 큰 제목을 달아 보도하였다.

이 보도를 근거로 이승만과 한민당,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을 비롯하여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이 반탁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반탁운동에 동조하였다. 즉각적인 자주독립만을 기대했던 독립운동가와 국민에게 신탁통치란 상상할 수 없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따라서 이념과 정파를 초월하여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도 반탁대열에 섰다. 좌익세력의 경우 1946년 1월 2일부터 공식적으로 찬탁의 입장을 취할 때까지 개별적으로는 반탁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담이 진행 중인 시점에서 반탁운동에 불을 지른 이 기사는 3상회담의 내용을 신탁통치만으로 국한시키면서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처럼 전한 잘못된 기사였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12월 25일자 미국발 기사라면서 정확한 출처도 밝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 기사가 나가게 된 배경을 놓고 당시 국내 언론을 통제하던 미군정 당국의 단순 실수설, 반소·반탁 감정을 형성하기 위한 국내외의 모종의 음모설 등이 지금까지 제기되고 있다.

<동아일보>의 이 기사와 관련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조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기사를 조작한 자는 누구였나?
"워싱턴 25일 발 합동"이라는 걸 보면 합동통신사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봐야 할 텐데 워싱턴의 어느 매체에 누가 쓴 글인지도 밝혀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한민당 대표 송진우가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의 조작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가 주범이란 것은 증거가 분명한 사실인데, 범죄의 성격으로 보아 단독범행은 아니다. 공범 내지 공모자를 밝히는 것은 명확한 증거가 없으므로 쉽지 않은 일이다. 정용욱은 <태평양성조기>지 12월 27일자에 같은 기사가 실린 것으로 보아 맥아더 사령부 개입의 개연성을 밝혔고, 이 허위기사의 유포가 방치된 사실로 보아 군정청의 작용을 시사했다. 완벽한 실증적 증거는 아니라도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개연성을 보인다. (주석 19)
 
1946. 3. 1. 서울. 신탁통치 지지 궐기 대회로 가마니를 펼쳐 구호를 쓴 프래카드가 이색적이다
 1946. 3. 1. 서울. 신탁통치 지지 궐기 대회로 가마니를 펼쳐 구호를 쓴 프래카드가 이색적이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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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신탁통치를 추구하는 미국무성 정책을 뒤집기 위해 맥아더 사령부, 미군정청, 이승만, 한민당 세력이 협력하여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측은 12월 28일 긴급 국무회의를 열어 김구와 김규식의 명의로 <4개국 원수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각계 대표 70여 명으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여기서 강력한 반대투쟁을 결의하고 김구·김규식·조소앙·김원봉·유림·신익희·김붕준·엄항섭·최동오 등 9인을 탁치반대총동원위원회 '장정위원'으로 선정했다. 이날 채택한 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성명서

우리는 피로서 건립한 독립국과 정부가 이미 존재하였음을 다시 선언한다. 5천 년의 주권과 3천 만의 자유를 전취하기 위하여는 자기의 정치 활동을 옹호하고 외래의 탁치 세력을 배격함에 있다. 우리의 혁혁한 혁명을 완성하자면 민족의 일치로서 최후까지 분투할 뿐이다. 일어나자 동포여!

1개 신문의 왜곡된 신탁통치 보도는 해방정국의 황금과도 같은 시기에 이 문제가 온통 블랙홀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모든 현안과 이슈가 이것으로 빨려들어 갔다. 해방정국의 최대 이슈는 통일정부 수립과 미·소 양군의 철수 그리고 친일 민족반역자 처벌이었다. 민생문제도 시급한 과제였다. 하지만 탁치 문제는 이같은 민족사 절체절명의 과제를 뒤로 한 채 찬반 투쟁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찬반 운동이 어느새 이념대결로 대치되었다. 친일민족반역자들은 '귀축미영'에서 '친미반공'의 기치를 들고 해방공간의 주역으로 탈바꿈하였다.

사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결정된 사항 중에는 활용하기에 따라 우리에게 유리한 조항도 없지 않았다. 민족지도자들이 좀더 진지하게 이를 검토하고 분석하여 결집된 역량으로 대처했으면 해방공간의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정보가 없었고 이를 확인하고자 하는 인력이 없었던 것이 무엇보다 아쉬운 대목이었다. 

민족진영은 반탁운동에 참여하면서 미·소 열강의 대립과 이에 추종하는 신사대주의 세력의 준동을 지켜보면서 한없는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즉각적인 자주독립정부 수립운동에 나섰으나 세불리 역부족이었다.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은 모스크바의 지침에 따라 1946년 초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제2차세계대전 후 유럽의 오스트리아는 미·영·불·소 4대국에 점령되어 10년 동안의 신탁통치를 받고도 모든 정파들이 협력하여 외국군을 차례로 내보내고, 영세중립을 선언하면서 평화로운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였다.

한민족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나, 분단과 함께 또 다시 외국의 신탁통치를 받게 되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주석
18> 앞의 책, 288쪽.
19> 김기협, <해방일기> (2), 295~296쪽, 너머북스, 201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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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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