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5 11:50최종 업데이트 23.03.15 11:50
<조국의 법고전 산책>(조국 지음)을 읽은 다양한 독자들이 '15권의 고전을 통해 바라본 한국사회와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와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글은 독후감 대회 우수상(청소년) 수상작입니다.[편집자말]
과거와 비교했을 때 한국은 분명 크게 발전했지만 많은 사건들을 보면 법을 다루는 집단의 권력과 법에 의한 폭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어쩌면 더 심화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에서 <조국의 법고전 산책>은 큰 의미를 가진다.

저자가 말한 것과 같이 고전이 많이 읽히는 이유는 고전이 주는 진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또 시대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해석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한 인간이자 국민으로서 나는, 책 속 법고전들이 주는 가르침을 정리하고 또 되새겨보고자 한다. 그를 내 삶과 현실 사회에 적용시켜보면서, 저자와 산책을 함께하고 싶다.

나와 법 고전

첫째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들여다보고 싶다. 인민이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에서 계약을 맺음으로써 국가를 형성한다는 내용의 사회계약론에서는 인민주권론, 직접민주제, 지방분권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는데, 나는 그 중 루소가 정치참여는 국민의 의무라고 강조한 부분이 인상깊다.

이 역시 인민은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에게 자신의 권한을 양도하고, 국가는 이 권한을 인민을 보호하고 또 그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사회계약론의 주요 메시지와 상통한다. 이때 인민이 자신의 권한이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한국 사회에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하면 안 된다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특히 학생인 나는 현실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을 때마다 가족끼리도 정치 얘기는 하면 안 된다, 학생이 무슨 정치냐는 말을, 심지어 학교 자치 활동에 참여하려고만 해도 잔소리를 들어왔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기에 그 권리를 착실하게 실천하는 것이, 즉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고 있는 이들은 이 한국 사회가 얼마나 답답하게 느껴질까, 루소에게 토로하고 싶은 심정이다.

다음으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루소의 자유와 평등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다. 루소는 자유는 평등 없이 존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생각에 크게 공감한다. 자유는 분명 중대한 가치지만,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어떤 제한도 없다면 강자는 약자를 어떤 방식으로든 억압할 수밖에 없다.

루소가 말한 것과 같이 그것이 세상의 본능적인 추이이기 때문이다. 이런 실정이라면 말로만 외치는 자유는 얼마나 피상적이며 무용한가. 그렇기에 정부가 법과 제도를 통해 격차를 조정하며 평등을 실현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하다.

루소의 주장은 페인이 지향했던 자유권은 물론 사회권이 보장된 세상과도 연결된다. 이때 페인이 제시한 구체적인 개혁 방안과 그 속에 담겨 있는 경제적 약자의 삶의 질을 높이자는 가치는 현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물론 그 가치에 기반해 현 사회에 맞는 또 다른 구체적 방안을 모색해봐야겠지만 말이다).

또 "사회권 보장을 자유권 보장 수준으로 높여야만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 위해 가불했던 빚, 그래서 여전히 남아 있는 빚을 갚을 수 있다"라는 저자의 말에서는 전태일 평전의 내용이 떠오르기도 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속 여공들은 지옥 같은 노동환경 속에서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 했다. 과거 수많은 분야에서 같은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해 지금의 한국이 있는 것이다.

나같이 보다 평탄한 현재를 살고 있는 이는 괴로운 과거를 보낸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평등을 이루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 아주 과거에 페인이 꾸었던 꿈이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노동 시간을 늘리고 최저 임금을 폐지한다며 퇴행하고 있는 모습이 조금 씁쓸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둘째로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다. 예링은 법의 진정한 목적은 모든 인간을 위한 평화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법이 다양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투쟁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그 내용 중 예링이 콜하스 사건에서 사법살인이란 개념을 다룬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예링이 사법이 부패하여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그 어떤 불법보다 심각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나는 저자가 언급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비롯하여 몇 가지 사건을 떠올렸다.

사법부는 법의 본 목적 그대로, 법을 집행하는 과정과 결과 모두에서 무엇보다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법부가 입법부, 행정부와 다르게 선거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것 또한 특정 집단의 권력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공정하게 행하여 국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러한 법률의 수호자가 법률을 이용해 국민에게 폭력을 행한다니, 얼마나 끔찍한 모순인가. 하지만 여전히 사법부 안 부패는 잔재하고, 그 부패가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기는커녕 파괴하는 사건은 꽤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세태 속 우리는 예링의 "권리 침해에 대한 저항은 의무이다"라는 말대로 부당한 것에는 맹렬히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음으로 제2장 '법과 권리를 위한 개인의 투쟁'에서 예링의 소송에 대한 관점도 다시 보고 싶다. 예링은 소송을 단순히 이익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인격, 명예, 법감정, 자존심의 측면에서 부당한 권리 침해에 저항하는 것으로 보았다. 법이 보장하는 인격적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소송을 포함한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하는 것은 개인의 생존과 공동체의 안위를 위한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오빠의 사례를 떠올렸다. 오빠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에서 문을 닫는다며 모든 직원들에게 퇴사를 요구했는데, 그 시점이 고작 폐업 일주일 전이었다. 이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오빠는 먼저 카페 사장에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용노동부에 정식으로 건의했고, 그 후 적절한 조치가 내려졌다.

나는 오빠의 행동이 단순히 금전적인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모든 직원들이 갑작스럽게 일자리를 잃게 된 권리 침해에 저항하기 위해서라고 보았다. 오빠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카페 주인을 대할 때 자신의 태도를 계속해서 점검했다는 것을 보면, 오빠의 사례는 분명 예링이 말한 의무를 적절히 실천한 사례이다. 나 또한 앞으로의 삶에서 "사법이야말로 국민의 정치교육의 진정한 학교"라는 예링의 말을, 일상에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 오빠의 용기를 기억하고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곱씹고 또 곱씹어도 여운이 남는 서술

셋째로 다루고 싶은 부분은 <페더랄리스트 페이퍼> 속 메디슨이 소수자 보호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다. 모든 인간은 천사가 아니기에 야심에는 야심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권력에 대한 메디슨의 철저한 시각도 유념했지만, 나는 그가 소수자 보호를 강력하게 주장한 점을 더 중요하게 보고 싶다.

민주주의 체제 속 한 명의 독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수 전체가 독재자가 되어 소수를 억압한다면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저자가 서술했듯이, 한국은 정치적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일상도 민주화되었다고 말하기는 아직 한참 이르다. 아직도 수많은 소수자들이 억압받고 있고, 많은 이들이 맹목적으로 믿는 다수결의 원칙은 그런 소수자들을 저 멀리 외지로 밀어내고 있다.

민주주의가 완전해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독재와 불평등을 항상 경계하고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데, 장애인의 이동권을 주장하는 시위를 돕기는커녕 진압하고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세태를 보면 매디슨은 어떤 생각을 할까.

밀 또한 같은 맥락으로 다수의 전제를 경계했는데, 이때 도덕과 관습을 통해 개인을 억압하는 경향을 언급했다. 이는 다수자와 소수자 간에서는 단순한 차이가 절대적인 것이 된다는, 다수자가 말하고 행하는 것이 도덕과 관습이 된다는 통찰이다. 밀은 인민의 감정 속에는 이단자 배척이라는 효모가 들어 있기에 그들을 도발하여 박해를 가하게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특히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사상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빨갱이로 몰리고 철저하게 배척당했던 한국전쟁 역사의 탓이 크지 않을까. 국민들은 여론에 너무 쉽게 휩쓸리고, 주류가 아닌 집단을 또는 개인을 한계까지 내모는 일이 빈번하다.

내가 학생의 위치에 있기 때문인가, 특히 대학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 하거나 다른 꿈을 가져 소외되고 무시받는 학생들의 사례가 생각이 난다. 다른 것을 틀렸다고 치부해버리는, 개성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밀의 의식은 너무도 중요하다.
 

존 스튜어트 밀. ⓒ 오마이북

 
마지막으로 밀이 주장한 '사상과 토론의 자유의 중요성'을 마음 깊이 새기며 마무리하고 싶다.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같은 의견이라 해도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나는 이것이 평생 잊으면 안 되는, 잊을 수 없는 문구라고 생각한다. 이는 권력과 권력 사이에서든,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든,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든 서로의 의견을 피력할 권리를 빼앗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의미이다.

누군가의 의견에 오류가 있다고 해도, 오류를 차단하는 것이 아닌 끝없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교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만약 그 의견이 옳다면 인류는 오류와 진리를 바꿀 기회를 잃는 것이고, 그 의견이 잘못되었다면 인류는 진리가 오류와 충돌함으로써 생기는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생생한 인상을 잃는 것이라고, 밀은 말한다. 곱씹고 또 곱씹어도 여운이 남는 서술이다.

토론하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데, 내가 토론을 하며 느낀 많은 감상을 밀의 표현으로 들은 것만 같은 동시에 사상의 자유와 토론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항상 토론을 할 때면 깊게 알기 위해 내가 하는 주장과 반대 주장의 근거를 같이 대조해가며 조사했었는데,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밀이 2장의 결론에서 요약한 자신의 사상을 나는 마음 깊이 기억할 것이다. 또한 끊임없이 사색하고 오류를 고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해갈 것을 맹세한다.

아무리 위대한 법고전을 집필한 위인이라 해도 흠결과 한계가 없는 인간일 수는 없다. 저자가 책 속 사상가들마다 살아온 배경과 당시 상황을 포함해 그들의 한계를 다룬 점 또한 이 책을 가치 있게 한다. 그들의 사상과 이론이 담긴 저작에서 그들이 살아온 삶을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다룬 내용 외에도 나는 생각이 날 때면 언제든 책을 펼쳐 읽고 나의 생각을 기록하며, 동네 공원에 한하던 산책을 드넓은 숲까지 이어가고 싶다. 어둡고 차가운 터널을 같이 걷지는 못 해도 긴 터널이 마침내 끝나면 다시 새로운 길의 산책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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