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1 20:26최종 업데이트 23.03.1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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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법고전 산책>(조국 지음)을 읽은 다양한 독자들이 '15권의 고전을 통해 바라본 한국사회와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와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글은 독후감 대회 최우수상 수상작입니다.[편집자말]
사람은 누구나 정말로 평등할까. '입결'(입시 결과)에 따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따라, 자산 규모에 따라, 출신 지역에 따라, 나이에 따라 흔히 그에 걸맞은 대우가 있다고 여기는 우리는 정말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생각할까.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평등의 보편적 가치
 

조국의 법고전 산책 ⓒ 이은영

 
소위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공정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며, 부자인지 아닌지, 어디서 왔는지, 나이는 얼마나 먹었는지 등에 따라 사람들은 차이를 둔다. 나아가 쉽게 차별의 언사를 쏟아낸다. 그러한 우리의 현실에서 만민 평등의 보편적 가치는 박제된 진리가 된 지 오래다.

과거 사람들은 정말로 평등하지 않았다. 왕과 귀족, 평민과 노예라는 각각의 계급이 서로 다른 출구로 세상에 나와 서로 다른 트랙을 밟으며 살아갔다. 각 계급의 트랙은 오랫동안 전혀 겹칠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각 트랙이 겹치면서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역사 속의 '모든 혁명'이 시작이었다. 왕의 권리를 제한하기 위한 귀족의 혁명, 왕과 귀족에 대한 평민들의 혁명, 주인들에 대한 노예들의 '모든 혁명'들이 오랫동안 굳어져 진리가 된 규칙을 어기고 내가 뛰던 트랙이 아닌 다른 트랙으로 선을 넘게 했다.

그리고 하나의 트랙에 한 데 뒤엉킨 모든 선수를 위해 17·18세기의 사상가들은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가야 했다. 우리가 사는 국가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계약 위에 설립되었기에 우리의 국가는 우리의 자유와 평등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

이 새로운 규칙을 안착시키기 위해, 17·18세기의 사상가들은 혁명에 대한 반동과 오랜 관습에 따른 관성에 맞서 부단히 외쳐댔다. 그야말로 만민 평등의 보편적 가치가 생동하던 시절의 일이다.

<조국의 법고전 산책>은 그 시절 사상가들의 투쟁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루소·몽테스키외·로크·밀, 그리고 그들의 사상에 거름이 된 또한 그들의 사상을 이어받은 여러 사상가들의 생애와 저작을 소개하고, 그들의 사상이 정립된 역사의 배경과 맥락을 보여준다.

이러한 책의 구성 방식은 흡사 대학의 교양 강의와 같이 평범하다. 하지만 어려울 것만 같은 "법고전에 숨어 있는 비밀을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저자의 저술 의도를 순순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투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사상가들을 만나게 된다.

"사회계약, 삼권분립, 자유, 권리, 법치, 죄형법정주의, 사법심사, 소수자 보호, 시민불복종, 저항권, 평화" 등의 개념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절, 그것들을 당연한 가치로 정착시키고자 했던 거대한 투쟁가들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투쟁가들과의 조우를 우리는 어떻게 향유해야 할까.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위 사상가들의 법고전과 21세기 대한민국을 연결함으로써, 자신이 다룬 15권의 고전들이 "출간된 당시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살펴봄과 동시에 이 책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정리"하고자 하였다고 밝힌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 및 제도의 현실이 나아갈 방향의 실마리를 법고전에서, 즉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근원으로 돌아가 찾자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회 문제의 핵심에 차별과 혐오가 자리한 오늘날 대한민국이 되찾아야 하는 초심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어느 하나의 제도 변화만으로 해결하기엔 조금 더 어렵고, 가 닿아야 할 근원은 조금 더 멀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근원이나 이제는 박제된 진리, 자유와 평등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말이다.

저자는 "한국이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면서 이제 '자유'는 높은 수준으로 보장되고 있다"라고 말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유는 독재정권 시절에 비하면 분명 나아졌다. 적어도 독재정권에 대항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자유가 억압받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루소가 말했듯, 그리고 저자 또한 강조하고 있듯, 자유는 평등 없이 존속할 수 없다면 오늘날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가, 평등한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부라는 거대한 권력이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지만, 다수의 여론이 소수의 의견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현상은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에게 권력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모든 다수의 여론을 '대중 독재'로 폄훼할 필요 또한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다수든 소수든,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모든 발화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에 대한 지향이 담보되어 있는가 하는 데 있다.

우리는 평등한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얼마나 충실한 사람일까. 이렇게 바꿔 물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정말 학벌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걸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처우는 정말로 달라야 할까? 돈이 많다고 해서, 또 돈이 없다고 해서,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어서 혹은 누군가 싫어하는 지역의 출신이라서, 나이가 어려서 아님 많아서, 나와 종교가 달라서, 것도 아니면 나와 정치 지향이 달라서 누군가를 차별해도 되는 걸까.

한때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가장 솔직한 답을 자신의 내밀한 생각 안에서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정말로 '솔직히' 말한다. 솔직히 학벌은 중요하고, 솔직히 비정규직이 정규직처럼 대우받는 것은 싫다고. 가난은 혐오스럽고, 외국인들은 자기들 나라로 돌아갔으면 싶다고. 위선도 선(善)이라면, 한때나마 착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 솔직함 앞에 위선의 가면을 벗고 쉽게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세상을 거꾸로 뒤집어본다면 어떨까. 선(善)을 잠시 제치고 보면, 돌연 솔직해진 사람들을 영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불평등하게 살아왔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예속관계는 인류 역사의 유구한 관습이자 제도였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선언이 천명된 것은 고작 이백삼십여 년이 됐을 뿐이다. 오랜 관습이 유전자 속에 각인될 수 있다면,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은 어쩌면 불평등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솔직한 내면이 드러내는 것이 차별이라는 점은 불행히도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같은 자연스러움 앞에 당위만으로 선언되는 자유와 평등은 솔직히 힘이 없다.

그런 까닭인지 우리 사회는 마치 자연 상태로 회귀하는 것처럼 차별과 혐오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중이다. 알맹이는 온데간데없이 껍데기만 남은 평등 위에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은 다시 시작되고 있으며, 이 거대한 파도를 막을 방법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역사는 반복된다 하니 그저 언젠가 이 흐름이 다시 역행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는 없는 것일까. 그러나 역사는 반복될 수도 있지만,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과거엔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사상가들과 투쟁가들이 있었고, 그리고 그들의 선언에 공명했던 많은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공공선(公共善)에 대한 지향을 점점 잊어가고 있으며,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에 공명할 사람들조차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백마 탄 초인이 돌아온대도, 허상을 쫓던 돈키호테 취급을 면할 길이 없다.

우리는 '왜' 평등해야 하는가
 

루소. <조국의 법고전 산책> 중 일부. ⓒ 오마이북

 
저자는 법고전 '산책'길의 첫 길잡이로 루소를 배치했다. 루소는 민주주의 사회의 근본 원리를 '사회계약'이라는 개념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회계약은 시민들 사이에 평등을 수립함으로써 시민들 모두가 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하고 또 모든 권리를 똑같이 누린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모든 법과 제도의 기저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바로 평등이라는 가치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개인이 모여 대등한 계약을 통해 형성된 것이 우리의 사회이고, 국가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모든 법과 제도는 자유와 평등을 향해가야 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평등을 모든 조건이 동등하게 갖춰진 상태로 이해한다. 개개인의 차이의 격차를 메우고, 모두가 동등한 출발점에 서는 것을 평등의 요체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자본주의 사회라면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개인들의 욕망과 충돌을 빚는다.

능력에 따라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은 사람들에게 평등은 '나'의 욕망 추구를 방해하는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 반복적으로 선언되고 있을 뿐인 당위적인 평등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엄존하는 현실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은 왜 평등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모두가 평등한가?

미국의 역사학자 린 헌트(Lynn Hunt)는 <인권의 발명>에서 18세기의 소설(서한 소설) 읽기 과정을 통해 평등의 형성 과정을 설명한다. 헌트에 따르면, 독자들은 소설 속 평범한 주인공들, 특히 여성 주인공의 삶에 울고 웃으며, 그들과 독자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계급과 성별, 나이 등의 "전통적인 사회적 경계"를 넘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즉 소설 읽기가 "평등과 공감의 감각을 창출해 냈다"는 것이다.

이는 평등이 그저 한 역사적 사건에서 선언됨으로써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즉 평등은 나와 타자를 동일시하는 감정,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공감의 감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헌트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러한 배움의 과정이 없었다면 '평등'은 깊은 의미를, 특히 정치적 성과를 전혀 얻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우리들이 가져야 할 미덕은 타인에 대한 공감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전제 안에 그와 나는 똑같은 물질로 구성된 신체를 가졌고, 영혼이 있으며, 같은 내면의 자유를 가졌기에 모두 평등한 존재들이라는 이유를 채워놓아야 한다.

그런 후에 이 책 속의 사상가들과 다시 마주하면 어떨까. 국가권력의 형성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계약으로 설명되어야 할 이유, 통치 권력이 분립되어야 하는 이유, 사람들이 권력의 억압에 저항해도 되는 이유, 고문을 금지하고 사형을 폐지해야 하는 이유,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

이 모든 이유가 우리 모두가 동등한 인격체로서 동일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납득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들의 주장에 함께 공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란히 발을 맞춰 걷는 산책은 그제야 시작된다.


조국의 법고전 산책 - 열다섯 권의 고전, 그 사상가들을 만나다

조국 (지은이), 오마이북(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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