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일제강점기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독립운동의 의의를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순수 민간단체‘시민모임 독립’은 일본 근대의 뿌리를 살펴보기 위해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메이지(明治) 유신의 발생지인 야마구치현과 가고시마현 일대를 돌아보고 왔다. 이어 2월 28일 전문가들을 초청해 ‘일본 극우,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제하의 학술토론회를 개최했다. 이글은 토론회에 참석한 기자가 발표된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편집자말]
학술토론회 포스터
▲ 일본극우, 그들은 누구인가 학술토론회 포스터
ⓒ 시민모임 독립

관련사진보기

 
일본의 근대를 관통하는 이념적 조류는 '극우'였다. 메이지 시대의 주역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와 식민지 수탈을 전제로 한 제국주의를 신봉했다. 일본 우익의 정신적 스승으로 칭송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한반도 정벌론을 주창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키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최초의 우익결사 단체를 설립한 도야마 미쓰루(頭山 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호사카 유지 교수(세종대)는 "일본 극우의 뿌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라고 볼 수 있고, 그가 뿌린 대륙정벌의 꿈은 에도시대에도 이념적 명맥을 이어갔다"라고 말한다. 일본이 아시아의 중심국가(中國)라는 주장을 펼친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한반도 침략은 신의 뜻이라며 도요토미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세계를 정복해 모두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외친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가 그들이다.

이들로부터 정신적 세례를 받은 자들이 메이지 정부의 주축이었고 따라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을사늑약, 강제 병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보는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이다. "뿌리를 살펴보면 다양한 갈래가 존재하지만, 일본이 세계의 중심으로 서려면 다른 나라를 정복해 속국(屬國)으로 만드는 게 핵심이고 이 이념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향철 교수(광운대)는 "근대 일본의 우익이나 극우의 기원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정치사회경제적 변화의 자장 안에서 찾아야 하고 특히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가 끼친 영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일본은 아시아에서 벗어나 세계로 뻗어나가야 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천황의 말 앞에 쓰러져 죽어야 한다고 외쳤던 제국주의자다.

오늘날 그는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실천적 계몽주의자로 추앙받고 있다. 명문사학 게이오대학 설립자이며, 현재 통용되는 일본 지폐 중 최고액권인 1만 엔에 그려진 초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일본 극우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자임하던 그가 일제 패망 후 어떻게 시민적 자유주의자로, 근대 일본의 아버지로 둔갑할 수 있었을까. 그 배경에 일본 학계의 '천황(天皇)'으로 불리는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가 자리하고 있다.
 
1984년부터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을 쓰고 있다.
▲ 현재 유통 중인 1만엔 지폐 (앞면) 1984년부터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을 쓰고 있다.
ⓒ 위키피디아

관련사진보기

  
마루야마는 일본 정치사상사의 권위자로, 전후 일본 학계의 사상적 구심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학자이자 양심적 지식인인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신화>(2015/이향철 역)에서, "마루야마가 후쿠자와의 저작들 가운데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해 보여줌으로써 그를 일본 근대화의 스승이며 위대한 민주주의 사상가로 미화했다"라고 고발한다. 사실관계에서 유리된 허구적 신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마루야마의 학문적 권위에 힘입어 후쿠자와는 일본 사회를 한 단계 발전시킨 인물로 각인된다. 백성을 '바보'라 칭하고, '배움을 얻은 가난한 민중이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주장한 자가 민주주의의 선구자로 변신하는 사이, 일본의 연구자들은 침묵했다. 이향철 교수는 "마루야마의 영향 밑에서 공부한 한국 학자들 역시 주체적인 역사관 없이 그의 생각을 국내에 전파함으로써 학문적 식민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라고 일갈했다.

조관자 교수(서울대)는 쇼와(昭和) 시기의 일본 우익사상에 대해 발제했다. 일본에서 쇼와 시대는 1926년부터 1989년까지 64년에 걸친 기간을 말하며, 1945년을 기점으로 전전(戰前)과 전후(戰後)로 구분한다. 쇼와 전기(前期), 일본은 극심한 사회불안에 시달렸다. 빠른 산업화와 도시화의 여파로 농업 생산성이 추락하면서 쌀 파동(1918년)이 일어났고, 의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분출되면서 정당정치가 붕괴했다.

제2의 유신을 통해 국가를 개조하고 분열된 국민사상을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쇼와 유신(維新)'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다. 이 시기에 기타 잇키(北一輝),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같은 우익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기타(1883∼1937)는 "천황 친정체제를 세워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라며 쿠데타를 일으킨 청년 장교들에게 사상적 배경을 제공했고 일본을 개조해 아시아연맹을 구축하고 폭력혁명을 통해 세계연맹을 건설하자고 주장한 이상주의자다.

쇼와 후기(後期), 1950년대 말에 이르면 우익사상을 새롭게 평가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된다. '우익은 전범이고, 우익이념은 천황제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라는 도식에서 벗어나 일본의 우익사상은 서구적 합리주의로 해석할 수 없는 민족 정서이고, 자본주의와 대립하는 농본주의의 가치와 공동체를 중시하는 향토주의 정신을 담고 있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하시카와 분조(橋川文三)가 대표적 인물이다.

일본의 우익이념은 서구적 인식 틀로 해석할 수 없는 독특한 민족사상이고 서양화(西洋化)에 대결하는 것의 총칭이라는 것이다. 조관자 교수는 이런 흐름과 해석에 대해 "지배권력으로서 국가를 부정하는 전후 민주주의가 고양된 시대(1950∼1970) 분위기에서 우익사상의 국가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민중 정서에 뿌리내린 향토주의를 구제하려는 시도로 봐야 한다"라고 설명한다.

길윤형 기자(한겨레신문 국제부장)는 "일본은 전쟁 패배라는 거대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천황제가 여전히 존속하는 나라"임을 강조하며, 일본 사회를 테러의 수렁으로 몰고 간 천황 절대주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우에스기 신키치(上杉慎吉)를 지목했다. 1910년대 동경제국대학 교수였던 그는 "천황은 곧 일본이므로 일본은 당연히 그의 뜻을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라는 '천황주권설'을 주장했다.

일본은 연호(年號)를 사용하는 유일한 나라다. 일본의 근현대사는 메이지, 쇼와, 헤이세이, 레이와와 같이 '천황'이라는 존재를 시기 구분의 잣대로 삼는다. 연호는 패전 후 미군정에 의해 공식적인 사용이 금지되었다가 1979년에 '법'으로 부활했다. 히로히토 천황 즉위 50주년을 맞아 연호 법제화 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일본의 우익들이다. 천황을 국가의 중심이며 뿌리로 바라보는 것이다.

'쇼와 시대에 극우 세력이 실제로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했는가?'에 대해 길윤형 기자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전후 일본 정치를 움직인 건 보수 원류고, 이들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나름 합리적인 역사 인식으로 갈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가 전체적으로 우경화되면서 극우 세력이 도드라지게 되었고, 일본 사회가 건강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악성 바이러스처럼 번질 수 있는 위험한 존재들임을 강조했다.

한승동 전 논설위원(한겨레신문)은 '일본 극우 세력이 한국에 미친 영향'을 기시 노부스케, 세지마 류조, 아베 신조, 세 사람을 매개로 풀이했다. 기시는 보수합동을 통해 일본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1955년 체제)를 설계한 주역이고, 그의 외손주이며 정치적 계승자인 아베는 역대 최장수 총리를 지낸 바 있다. 세지마 류조(瀬島 龍三)는 관동군 참모 출신으로, 소련군 포로가 되어 11년간 시베리아에 억류됐다가 귀환 후 재벌 회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기시는 대아시아주의 이념의 신봉자로, 일본이 중심이 돼 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선린외교를 통해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인다는 노선을 견지했다. 일제가 아시아침략의 명분으로 삼았던 대동아공영권과 같은 맥락이다. 이 이념의 핵심 고리 중 하나가 '한일관계 정상화'였다. 냉전 질서 속에서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공산권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코자 했고, 기시는 그 전략을 충실히 따랐다.

아베는 일본을 전범국으로 규정한 도쿄 전범재판(1946년)의 해석을 거부하고 단죄의 대상인 극우적 전통을 오히려 되살리려 했다는 점에서, 반시대적인 세계관에 젖어 있던 사람이다. 그는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주창하는 '자유주의 사관'을 신봉했다. 자유주의 사관이란 일제가 저지른 전쟁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아시아 민중을 해방하기 위해서 치른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보는 역사관을 말한다.

한승동 위원은 이에 대해 "아베는 냉전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거부했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라며, 아베를 암살한 야마가이 데쓰야(山上徹也)는 통일교에 강한 원한을 품고 있었고 통일교와 자민당은 오랜 역사적 밀월관계를 맺어 온 사이라는 아사이신문 보도(2022,8.6)를 인용하며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선대의 영광을 현실에서 복구하려는 헛된 노력을 하다가 비명에 갔다"라고 표현했다.

토론회 좌장을 맡은 서승 우석대 동아시아 평화연구소장은 최근 키시다 정부가 안보 문서를 개정해 사실상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행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자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경우,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조항은 자위(自衛)라는 개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며, 이는 한국과 상의 없이 일본의 독자적 판단에 따라 언제든 전쟁을 감행할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핵이 뇌관으로 작용할 경우, 한반도 일대가 전쟁의 불구덩이에 빠질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다. 일본은 현재 심각하게 우경화되어 있고, 보수 우익들이 장악하고 있는 집권 자민당의 독주를 견제할 정치세력이 부재하다. 서승 소장은 "일본의 국가주의 이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한국과 일본의 양심 세력과 시민사회가 함께 연대해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2월 28일, 서울시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진행
▲ "일본 극우, 그들은 누구인가" 학술토론회 참석자 단체사진 2월 28일, 서울시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진행
ⓒ 문진수

관련사진보기

 
일본은 지난 과거를 참회하고, 그 반성의 토대 위에서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일본의 국가주의 이념은 바뀔 수 있을 것인가. 한국과 일본이 사이좋은 이웃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일본 내 극우 세력이 정치 지형을 장악하고 있는 한,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피력했다. 동아시아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거라는 뜻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한미일 3자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하고 협력해서 우리와 세계시민의 자유 확대와 공동 번영에 기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보편적 가치'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수구냉전 시대를 지배했던 반공주의 이념을 말하는 것인가. 중국을 제치고 일본을 파트너로 삼아 미국이 지배하는 동북아 질서에 복속하겠다는 뜻인가.

이런 시선은 아베 사망(2022년) 후, 일본 대사관에 설치된 분향소를 찾아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 고 아베 신조 전 총리님의 명복을 기원한다"라고 조문록에 썼던 것과 맥(脈)을 같이 한다. 일제가 저지른 악행과 만행에 대한 사과와 반성은커녕 선조들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세계관을 가졌던 자에게 '아시아의 번영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라는 찬사를 보내다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일본은 지난 역사에 대해 참회하였는가. 아시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협력적 '파트너'가 될 자격을 갖추었는가. 그렇지 않다. 천황을 중심에 둔 국가주의, 지배와 패권을 숭상하는 군국주의 이념은 메이지 시대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잃어버린 30년의 터널을 지나면서 아시아의 맹주라는 환상이 무너지며 '이등 국가'로 전락한 일본의 극우들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 욱일기를 펄럭이고 있다. 엄중한 상황이다.

 

태그:#일본 근대의 뿌리를 찾아서, #시민모임 독립, #일본 극우, #일본 우익, #학술토론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