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6 10:41최종 업데이트 23.03.06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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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3·1절 기념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이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협력 파트너"로 변했다며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하고 협력"하자고 역설했다. 기념사 말미에서는 "이것은 104년 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그 정신과 다르지 않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반성을 요구하지 않고, 일본과의 협력을 주문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어이없는 기념사로 인한 비판과 반발이 거세지자, 대통령실은 금요일인 지난 3일 해명에 나섰다.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기미독립선언문에 담겼던 정신이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 고스란히 그대로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1919년 3·1운동 때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그 정신이 이번 기념사에 담겼다고 주장했다(관련기사: 대통령실 "기미독립선언문에 담겼던 정신, 기념사에 고스란히 담겨" https://omn.kr/22xyn).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자주 언급하는 '자유'의 가치도 거론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를 세우고 보편적 가치를 가진 이웃 나라와 연대하고 협력하고 번영의 미래를 가져오는 것, 그것이 3·1운동의 정신"이라며 이것이 윤 대통령의 국정철학이라고 강조했다.

잘못을 바로잡고 올바른 상태로

기미독립선언문의 궁극적 목적은 일본 비판이 아니었다. 이 선언의 주목적은 일본이 신의 없음을 논죄하거나 일본이 의리 없음을 책망하는 게 아니었다. 선언문은 "일본의 무신(無信)을 죄(罪) 하려 아니 하노라", "일본의 소의(少義)함을 책(責)하려 아니 하노라"라고 천명했다.

이는 일본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고 무조건 미래를 지향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일본을 논죄하고 일본을 책망하는 게 최종 목표가 아님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우리 자신을 책망하기에도 바쁘고 현재를 준비하기에도 바빠 남을 원망하거나 잘잘못만을 따질 수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천명했다.
 
구(舊)사상, 구세력에 기미된 일본 위정가의 공명적 희생이 된 부자연한 착오 상태를 개선광정(改善匡正)하여 자연(自然) 우(又) 합리한 정경대원(正經大原)으로 귀환케 함이로다.
 
침략주의·제국주의에 빠진 일본 위정자들로 인한 부자연스러운 상태를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상태로 귀환하는 게 만세운동의 목표라고 천명했다. 일본과의 관계를 올바로 바로잡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무조건 화합하면서 미래만 도모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고 올바른 상태를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선언이었다.

대통령실은 '자유'를 거론하면서 이런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나라와 연대하는 것이 기미독립선언문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연한 말이겠지만, 독립선언문에 언급된 자유는 일차적으로 '일본으로부터의 자유'였다.

독립선언문은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라며 한민족의 독립·자주를 선포한 뒤 "민족의 항구여일한 자유 발전을 위하여 차(此)를 주장함"이라고 말했다. 일본에 맞서 민족적 차원의 자유를 회복하는 데 주안점을 뒀던 것이다.

대통령실은 선언문 속의 '자유'라는 표현을 매개로 미·일 주도의 대중국 전략인 인도태평양전략에서 말하는 '보편적 가치'와 연결한 뒤, 자유·민주·법치·인권 등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나라들과 연대하는 것이 독립선언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논리를 통해 '3·1운동=한일협력'이란 공식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3·1 운동 당시의 독립운동가들도 자유를 '일본으로부터의 자유'로 이해했다. 이 점은 이들이 3·1 운동의 열망을 담아 제정한 임시정부 헌법에서도 확인된다. 1919년 9월 11일 제정된 이 헌법은 전문(서문)에서 "대한인민은 아국이 독립국임과 아민족이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라고 선포했다. 일본을 상대로 한민족의 자유를 외쳤던 것이다.

무조건적인 한·일 협력 외치는 세력

이처럼 식민 지배의 부조리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 한·일 협력을 외치는 주장은 3·1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주장은 3·1 운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쪽에서 나왔다. 한국의 독립자주를 원치 않는 쪽이 그런 주장을 내세웠다.

3·1 운동 발생 뒤인 1919년 8월 제3대 조선 총독이 된 인물이 사이토 마코토다. 한국인들의 폭발적 저항에 놀라 문화통치를 표방하는 새로운 식민정책을 펼칠 일제 대리인이었다. 그가 한국으로 부임하는 도중에 발표한 담화가 총독부 기관지인 1919년 8월 30일 자 <매일신보> 2면 상단에 실려 있다.

담화에서 그는 두 민족의 동화 정책을 서두르면 곤란에 빠지게 된다면서 자신은 향후 백년을 바라보며 장기적으로 동화를 추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금번에 종결된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되어 우월적 지위를 획득한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금후로는 두 민족이 협력 파트너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은 이렇다.
 
금도(今度)의 세계대전쟁에 의하야 일본은 우월의 지위를 득(得)하얏스니 금후 동포가 일치이 협력하야 국력의 충실에 노력하야 진(眞)히 강국인 소질을 비(備)함에 지(至)하면 조선은 자연히 통치되리라 하노라.
 

본문에 인용된 사이토 총독의 담화. ⓒ 저작권 만료

 
사이토 총독은 두 민족이 협력해 국력 배양에 힘써 진정한 강국의 기질을 완비하는 단계에 도달하면 조선의 질서가 자연스레 잡히리라고 역설했다. 한국인들이 태극기를 들며 독립만세를 외친 이유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무조건적 한·일 협력을 주문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3·1 운동의 기운을 억누르고자 했던 일본 지배층의 정서가 사이토 담화에서 드러난다.

그런 주장은 대한제국 멸망 이전에도 유행했다. 일본이 북쪽 러시아는 물론이고 서양세력을 막아내자며 유포하는 한·일 협력론이 대한제국 내에서도 퍼지고 있었다.

동양주의라는 이름으로 전개된 그런 선전전에 맞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명제로 유명한 역사학자 겸 <대한매일신보> 주필 신채호가 1909년 8월 8일부터 10일까지 이 신문에 쓴 글이 있다. '동양주의에 대한 비평'이라는 연재 기사가 그것이다.

이 글에 따르면 일본의 침략주의를 경계하기보다는 일본과의 협력을 외치는 세력은 동양의 무조건적 단결을 주문했다. 이들은 동양 국가들이 협력해 서양에 맞서는 게 중요하므로 동양권 내에서는 매국매적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매(賣)한 자도 동양인이요 매(買)한 자도 동양인이니, 서(誓)컨대 초궁(楚弓)을 초득(楚得)함이라. 오배(吾輩)가 하죄(何罪)리오"가 이들의 강변이었다. 나라를 팔아넘긴 쪽도 넘겨받은 쪽도 다 동양인들이니, 맹세컨대 이는 초나라 활을 초나라가 확보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1919년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사람들도 한·일 협력의 필요성을 모르지 않았다. 신채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한·일 간의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해야 진정한 협력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일본과의 관계를 바로잡고자 궐기했던 것이다. 이것이 3·1 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진짜 정신이었다.

윤 대통령의 기념사에 대한 대통령실의 해명은 이 같은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하고 있다. 3·1절의 정신을 그렇게 훼손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3·1 운동에 담긴 보편적 정신은 반인류적인 제국주의의 해악을 걷어내는 것이지 제국주의와 무조건 손잡는 게 아니었음을 대통령실은 외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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