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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를 받으려면 죽음의 9부 능선을 넘어야 한다고 한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실제로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들다. 이런 박사학위를 일부러 세 개 받으려는 사람은 속된 말로 '미친놈'일 것이다. 그 누가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죽음의 9부 능선을 넘으려 할까?

철도고 1학년(1977) 때 한글학회 전국국어운동고등학생연합회(지도: 오동춘 교사, 현 짚신문학회 회장)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세종대왕ㆍ주시경ㆍ최현배 위인들의 뒤를 잇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름까지 한자식 이름 '용성(庸性)'에서 순우리말 이름 '슬옹'으로 바꾸기까지 했지만, 이런 험난한 인생 여정을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세 번째 박사학위를 외솔 최현배 선생께 바치며, 연세대 외솔관 앞에서(2020)  @윤양선
▲ 세 번째 박사학위를 외솔 최현배 선생께 바치며 세 번째 박사학위를 외솔 최현배 선생께 바치며, 연세대 외솔관 앞에서(2020) @윤양선
ⓒ 김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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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그럼 세 번째 박사학위가 제일 쉬웠겠네요?"라고. 전혀 그렇지 않다. 가장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다. 자랑하려고 티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랬다. 물론 세 번째는 쉽게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도전했다. 1994년에 연세대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1997년에 수료했으나 박사 논문 제출 자격시험인 종합시험에서 김하수 교수님 과목(형태론)의 4학기 연속 과락으로 포기를 해야 했다.

이때 내가 만든 200자 5천 장 분량의 종합시험 준비서, ≪문답으로 배우는 국어학 첫걸음≫은 20여 년간이나 후배들의 종합시험 지침서가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2018년, 이때는 이미 박사학위가 두 개나 있었지만, 21년 전에 반강제적으로 중도에 포기한 박사과정의 한을 풀고 싶었다. 결국, 서상규 교수님의 배려로 21년 만에 복교하여 1년 만에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타난 보편 문자 사상 연구"를 완성해 심사를 청구했다.

자만이었고 오만이었다. 2005년 훈민정음 역사 연구로 첫 번째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훈민정음 관련 수많은 연구서를 냈고, 2015년에는 간송미술관과 교보문고 요청으로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을 최초로 직접 보고 해설서를 쓰는 영예까지 누렸으니 쉽게 통과할 줄 알았다.

보기 좋게 1심에서 탈락했다. 그때 다섯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공통 심사평을 간단히 줄이면 청구 논문이 박사학위 두 개 있는 사람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고, 훈민정음 관련 저술이 이미 많으므로 '자기 표절' 인상을 준다는 것이었다.

심사평은 간결하고 부드러웠으나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매섭고 엄격했다. 물론 출처를 밝혔으니 자기 표절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기존 내 저술을 종합하다 보니 그런 혐의를 주는 것은 분명했으므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코로나 박사, 몰입의 결실

마음을 비우고 초심으로 돌아가 누구도 이의 제기를 하지 못할 창의적인 주제를 찾아야 했다. 완성 단계에서 세 차례나 논문 다시 쓰기를 반복하며, 무려 2년이 더 걸려 "≪훈민정음≫ 해례본의 역주 방법론 정립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의 학위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논문 내려받기: www.riss4u.net).

해례본은 한문본이므로 한자, 한문과 번역 맥락에 대한 역주가 매우 중요한데 이에 대한 이론적 기반과 훈민정음 해례본학의 바탕을 정립한 것이다. 나이 든 후학을 더욱 엄격하게 지도해 주신 서상규 지도교수님과 심사위원분들 덕이었으니 새삼 고개가 숙여지고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다.

정신없이 바쁜 중에 어려운 주제의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코로나 덕이기도 했다. 공공단체를 이끄는 책임자였기도 했지만, 자유직업인으로 대중강연가였던 나는 코로나로 모든 강연이 중단되면서 10개월 가까이 논문 완성에 몰입할 수 있었다. 코로나는 모든 이들의 고통이었으나 나에게는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역주 방법론은 해례본이 1940년에 발견된 이후 전혀 다루지 않은 주제였고 해례본만의 전체 내용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논문이었으므로 나에게도 떳떳한 논문이 되었다. 세 번째 박사학위이기도 하지만 26년 만에 받은 논문이라 학위 받던 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사춘기 때 한글운동가, 한글학자의 길로 인도하셨던 외솔 최현배 선생 흉상이 있는 연세대 교정을 찾아 논문을 헌정하니 비로소 외솔 선생님도 활짝 웃으시는 듯했다. 연세대에서 외솔의 뜻을 잇는 교육자가 되는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교정에서 학위를 마무리하니 뛸 듯이 기뻤다.

전화위복,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전화위복'이라는 말이다. 만일 1997년 무렵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아마도 말뭉치(코퍼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전산언어학 분야로 받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 말뭉치인 연세 말뭉치는 고 이상섭 교수 발의로 구축된 것으로, 나는 최초 실무 팀장을 맡아 전산과 후배들과 함께 말뭉치 분석 알고리즘과 도구를 개발하는 등 이 분야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므로 당연히 전산언어학 분야로 학위논문을 썼을 것이고 쉽게 대학 전임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부덕한 탓으로 중도에 하차하면서 전공이 훈민정음으로 바뀌었다. 사실 바뀐 것이라기보다 학사 논문인, '입말투 글말의 역사적 의미(문효근 교수 지도)'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으로 언문일치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주제이므로 원래 주제(훈민정음)로 돌아간 것이다. 더불어 고등학교 때의 한글학자 꿈을 다시 살려낼 수 있었다.

1997년 연세대를 떠난 뒤에는 5년간 자유롭게 소쉬르, 촘스키, 들뢰즈 등 세계적인 사상가들의 사유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서울사회과학연구소 등에서 다른 학문 전공자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의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그러다가 2005년에 상명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최기호 교수님 지도로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관련 기사를 통해 본 문자 생활 연구"로 첫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당시 실록 시디(CD, 서울미디어)가 처음 나와 가능한 주제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천여 건의 훈민정음 기록을 종합 분석한 최초 논문이었다.

생계를 위해 국어교육 쪽으로 일하다 보니 제대로 된 국어교육학을 연구하고 싶었고, 2010년에는 동국대 국어교육학과에서 김혜숙 교수님 지도로 "국어교육 내용으로서의 '맥락' 연구"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맥락 중심 사유는 세종식 사유이기도 하였으니 이 또한 세종의 길이었다.

시련 뒤의 영광

박사학위가 둘이 되다 보니 대학 전임교수 되기가 더 어려웠다. 원서를 낸 것만 50여 차례, 총장 면접만 20여 차례가 됐다. 결과는 참패였다. 박사학위 두 개가 더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왜 왔다 갔다 하느냐는 것이다. 어느 대학 심사에서는 어느 쪽이 진짜 정체성이냐고 묻기까지 했다. 통섭, 융합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학 강사로서 강의 평가 1위 2회 수상, 교보코칭센터 조사(2016) 가장 듣고 싶은 국어강사 1위 선정, '베스트 티처상' 수상 교수의 수업 모형 선정(문화인류학회, 이용숙 교수), 수십 권의 저술과 수많은 논문 업적, 20년 이상의 시각장애인을 위한 사회봉사 업적, 많은 대학생들을 직접 취업시킨 공로 등이 있어도 전임 되기가 불가능했다. 모교인 연세대에서조차 다섯 번이나 실패했다. 연세대 출신으로 유일하게 정통 국어교육학 박사학위가 있음에도 사범대가 없는 연세대 교육대학원에서조차 교수가 되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했다.

그러나 전화위복이었다. 전임 교수로 안정된 자리에 올랐다면 굳이 세 번째 박사 학위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뜻하지 않은 시련 덕에 나는 세종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세종대왕과 훈민정음학(지식산업사)", "조선시대의 훈민정음 발달사(역락, 우수학술도서)", "한글혁명(살림터)", "세종학과 융합인문학(보고사)"등 훈민정음학과 세종학을 집대성한 책을 쓸 수 있었으며, 훈민정음 해례본의 세종식 한글 교육을 최초로 적용한 "위대한 세종 한글(1-5권, 한울림어린이)"을 집필할 수 있었다.

덕분에 외솔상, 대한민국 한류대상, 세종문화상 학술 부문 대통령상,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 세계한류문화공헌대상 등을 받는 영예를 누렸고, 문체부 지정 비영리단체인 세종국어문화원 원장으로,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전문위원, 세종대왕생가터성역화국민위원회 사무총장, 한글학회 이사 등으로 세종 정신을 널리 펴는 신바람 세종운동을 펴게 되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세 번째 학위로 훈민정음학과 훈민정음 해례본학을 제대로 세울 수 있었고 세종을 오롯이 이해하고 가슴으로 품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 세종대왕을 존숭하지만, 세종의 업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이다. 논문으로도 발표했지만, 요즘 학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소쉬르, 촘스키, 들뢰즈의 사유와 사상이 이미 1446년에 나온 훈민정음 해례본에 녹아 있다.

박사학위 세 개의 명예를 걸고 장담하건대, 100년 뒤의 챗지피티(ChatGPT)도 15세기의 훈민정음을 뛰어넘는 독창적인 문자를 만들지 못할 것이며 세종대왕과 여덟 명의 학사들(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이 쓴 ≪훈민정음≫ 해례본보다 더 뛰어난 인류의 고전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불운의 연속이었던 파란만장한 고단한 삶이 오히려 생의 의지를 더 북돋아 주고 훈민정음을 더욱 깊게 이해하고 세종대왕을 더 흠모하게 만들었으니, 어찌 그 시련을 감사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그:#훈민정음, #세종, #박사학위, #최현배,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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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학과 세종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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