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7 06:48최종 업데이트 23.03.07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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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3.1절이었다. 크게 생각하면 20세기 전반기 지배적 세계 질서였던 제국주의를 다시 생각해 보는 날이다. 제국주의 지배는 정치적 권리 박탈, 중심-주변부를 형성하는 경제 종속 구조, 문화 영역에서의 헤게모니, 오리엔탈리즘과 인종 차별과 같은 우열 담론 등 사회 전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정치적 지배 형태는 사라졌지만 나머지는 미해결이라 제국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현재 진행형 주제다.

흥미롭게도 지난 3.1절 대통령 기념사에는 일본 제국주의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와 20세기 전반기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구심점으로 기능한 민족이란 단어도 빠졌다. 대신 세계사, 조국, 애국, 자유, 고통, 불행 등 1910년대가 갖는 시대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일반적 단어로 채웠다.

크나큰 오판

제국주의에 대한 침묵은 역사관 논쟁을 떠나 시대적 오판이다. 2022-23년 현재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흑역사를 자발적으로 꺼내고 있다. 정의로워서가 아니다. 지정학적 경쟁에서 또 중-러와 거리를 둘 경우 잃어버릴 자국의 경제적 탄력성을 미리 준비해 두기 위해서다. 이는 현실적으로 국제 무대에서 동등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구 식민지 국가들에 한 시대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만들고 있다.     


이 흐름이 처음 공개적으로 포착된 것은 지난해 9월 20일 유엔 총회였다. 이날 독일 숄츠 총리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제국주의란 단어를 꺼냈다. 윤 대통령 연설도 같은 날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을 포함해 외교부 고위 공직자가 모두 들었을 연설이다.

당시 독일의 숄츠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법 없는 국제 사회가 도래하는 징조"라고 말했다. 그리고 무법의 상태는 무정부 상태가 아닌 "힘이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단계라며 푸틴의 러시아를  "제국주의"로 규정했다. 프랑스의 마크롱 역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 24일 이후 (세계가) 목도한 것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시대로의 회귀"라고 비판했다.

굉장히 튀는 단어였고 적어도 외교 라인 인사들은 주목했어야 하는 단어였다. 전쟁, 코로나, 기후 변화, 경제 위기, 빈부 격차, 인권 등 수두룩한 현안 속에서 뜬금없이 제국주의라니, 그것도 자국의 흑역사와 직결되는 단어를 전 세계 정상이 다 모인 유엔 총회에서 독일과 프랑스 두 정상이 허투루 꺼낼 리 없다.

이유는 신냉전 논리의 한계에 있다. 신냉전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구도로 여기서의 민주주의란 자유, 평등, 인권을 핵심 가치로 한다. 하지만 이는 남반구에 설득력이 없었다. 역사적으로 서구는 민주주의와 제국주의를 병행했다. 냉전 이후 자유 경쟁을 외친 신자유주의는 경제 불평등을 심화했다. 중국 인권 문제 비판에 동참하라 하면서도 남반구가 외치는 기후 인권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침묵했다(관련기사: 윤대통령 비판받을 때 이 두 지도자는 박수받았다 https://omn.kr/20v6t)

유엔 총회 이후 제국의 역사를 가진 국가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사과를 경쟁적으로 하고 있다. 영국을 선두로 프랑스, 미국이 약탈 문화재를 반환하고 있다. 독일은 천여 점이 넘는 아프리카 약탈 문화재를 전부 반환하며 "잘못을 시정하러 왔다"고 말했다. 나이지리아 문화부 장관 라이 모하메드에 따르면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독일은 문화재 반환뿐 아니라 기술 이전과 인력 교육 프로그램까지 포함한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을 돕는 투자 계획에 도장을 찍었다(관련기사: "잘못 시정하러 왔다" 놀라운 독일 행보, 그 속의 큰 그림 https://omn.kr/224g4).

제국주의는 아니었지만 제국주의의 산물인 노예제를 노동력으로 사용했던 미국도 마찬가지다. 아프리카에서 중국과 경쟁해야 하는 바이든은 "미국은 아프리카에 원죄가 있다"고 공식 인정하고 "아프리카의 미래에 올인한다"고 밝혔다. 기후 인권 문제와 경제 불평등 완화에 150억 달러(약 19조 원) 투자를 약속하며 동반자 관계를 제안했다(관련기사: 대통령이 바뀌니까… 세계가 구애하는 이 나라 https://omn.kr/22tbn).

한국이 가장 중시하는 한·미 동맹의 바이든까지 "(미국의) 원죄"를 언급하며 공개적으로 과거 반성을 하는 시기다. 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 그리고 그 식민지였던 한국의 역사를 활용해 한·미·일 관계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있는 절묘한 시점이다.

이 흐름은 판이 고정되지 않은 과도기라 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신냉전을 이야기하지만 구체적인 모습을 알지 못한다. 가다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수도, 선명한 대립 구도가 형성될 수도 있다. 이 불확실성 때문에 미국과 유럽은 외교 무대에서 신냉전이란 단어를 삼간다. 대신 모든 가능성을 계산하고 포석을 깐다.

현재 유럽의 움직임을 보면 중국을 열어두되 의존도를 빠르게 줄이고자 한다. 지난해 G20 직전 독일 숄츠는 미국의 주의 및 경고(?)에도 불구하고 기업인들을 이끌고 단 하루 방문 일정으로 중국을 찾았고 그 즉시 프랑스 마크롱은 중국 방문 의사를 밝혔다. 

중국에 환상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중국과의 관계가 돌이키지 못할 만큼 깨질 경우에 대한 대안을 마련할 때까지 시간을 벌 목적이다. 중국은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에서 남반구에서 원자재를 수입해 중간재를 생산·공급하며 성장했다. 미국과 유럽은 이 연결 고리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자체 공급망을 마련하고자 한다. 현재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중간재까지 생산할 수 있는 기술 이전을 제안하며 손을 내밀고 있다. 과거 제국주의에 대한 사과는 첫 단추를 끼는 데 윤활유다. 

국제 외교 무대에서 과거사가 중요시 되는 기회는 아주 드물다. 그리고 국제 질서가 안정화 되면 사라질 기회다.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하면 과거사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한 발 앞으로 나가고, 외교 및 안보에서도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3.1절 기념사에 나타난 윤 대통령의 인식은 과거사 무용지물이다.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위 문장을 보면 일본의 현재를 과거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다. 일본이 과거와 달리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한국과 공유하고 있으므로 파트너로 놓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19~20세기 제국주의는 모두 민주주의 국가였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대표 구호는 자유 무역이었다. 대단히 불편한 이 사실은 영국, 프랑스, 독일 뿐 아니라 일본에도 적용된다. 유럽보다는 늦었지만 일본의 정당 정치는 20세기 초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은 세계 1차대전 이후 일본의 정당 정치가 안정적인 단계로 접어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와 거의 맞물린다. 1920년대 일본은 '내부로는 입헌주의, 외부로는 제국주의'라는 공식을 기본으로 삼았다. 

위 문장의 군국주의는 일본 민주주의가 대공황 이후 활로를 찾지 못하고 불과 5년 만에 무너지며 극단으로 치닫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적용되는 개념이다. 3.1절의 초점은 일본 제국주의이지 군국주의가 아니다.  

변화하는 흐름 못 읽는 건 윤석열 정부

과거사 무용론에 이어 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한·미·일 동맹 만능론을 시사했다. 현시점을 "세계적인 복합 위기, 북핵 위협을 비롯한 엄혹한 안보 상황 그리고 우리 사회의 분절과 양극화"라고 설명한 후 대안으로 한·미·일 동맹 강화를 내놓았다. 안보뿐 아니라 기후, 에너지, 사회 양극화까지 모두 한·미·일 동맹을 기반으로 해결한다는 방향성이 보인다.   

한·미·일 동맹 강화에 걸림돌인 과거사를 빨리 정리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간과하는 부분은 전쟁은 동맹을 강고하게 만들지만 전환기는 동맹 내부의 경쟁도 유발한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은 동맹 1순위 영국과도 자유 무역 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있다. 프랑스를 향해서도 AUKUS (호주-영국-미국 안보 협약) 때 뒤통수를 때린 후 마크롱을 지난 12월 국빈 초대해 양해의 손만 내밀었을 뿐이다. 나토(NATO)로 뭉쳐 있지만 미국과 독일은 남반구 진출을 두고 '조용한 듯하지만 사실은 살벌한' 경쟁을 하고 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22년 12월 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 내 안보 및 에너지 영역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지난 10월 갈등이 심각한 수준까지 갔다. 자유 무역 기조를 뒤집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 이후 EU 역시 첨단 산업 보조금에 대해 미국과 경쟁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이게 현실 외교다. "낙수 효과 경제에 신물이 난다. 우리는 아래로부터 그리고 중산층 중심으로 경제를 건설한다"고 바이든이 2년 전부터 누누이 말해왔기 때문에 경제가 자국 중심으로 재편될 것을 모르지 않았다. 미국의 전기차 보조금과 반도체 정책에 배신감을 느낀다면 그건 동맹에 대한 과도한 환상에서 비롯된 오판이요, 전 세계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외교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 정부가 과거사 무용론과 동맹 만능론을 뒤집기를 바란다.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강도를 높여 외교력으로 까칠하게 가시처럼 이용할 수 있는 시점이다. 미국과 함께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 중인 EU가 미국과 경쟁하듯 한국도 누구와의 경쟁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 자명합니다.

다름 아닌 윤석열 대통령이 한 3.1절 기념사의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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