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0월 29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경찰에 첫 신고가 들어왔다. "압사당할 거 같다." 공권력이 제대로 대응만 했다면 1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경찰을, 사업가를, 음악가를, 간호사를, 배우를 꿈꿨던 159명의 바람은 이뤄졌을지 모른다. <오마이뉴스>는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이태원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편집자말]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연희씨의 대학생 시절 사진을 아버지 김상민씨가 핸드폰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사진 뒤 신발은 연희씨가 주문했지만 사고 후 배달되어 뜯지 못한 택배 상자 속에 있던 물건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연희씨의 대학생 시절 사진을 아버지 김상민씨가 핸드폰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사진 뒤 신발은 연희씨가 주문했지만 사고 후 배달되어 뜯지 못한 택배 상자 속에 있던 물건이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아빠, 나 지금까지 잘 성장했지?"

연희씨는 운전석의 아빠를 보며 밝게 웃었다. 지난해 7월 서울에 살 집을 계약하고 아빠와 함께 광주 집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원하던 곳에 막 취업한 연희씨의 설렌 표정이 아빠는 지금도 생생하다.

경기도 직장에 다니던 아빠는 지난 설을 앞두고 가족이 있는 광주로 차를 몰았다. 그때처럼 서울에서 연희씨를 태우고 오순도순 내려갔다면 좋았겠지만, 그때와 달리 아빠는 혼자였다. 아빠는 텅 빈 조수석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딸의 이름을 불렀다.

"연희야... 연희야..."

지난달 26일 연희씨가 잠들어 있는 광주 영락공원에서 아빠 김상민(55)씨를 만났다. 당시를 떠올린 그는 "조수석 빈자리를 보는 것이 너무나 참기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딸의 고귀한 인생이, 아니 한 우주가 사라져버렸다"라며 눈물을 훔쳤다.

취업 꿈 이룬 지 3개월 만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연희씨의 아버지 김상민씨가 지난달 26일 딸이 잠들어 있는 광주 영락공원을 찾았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연희씨의 아버지 김상민씨가 지난달 26일 딸이 잠들어 있는 광주 영락공원을 찾았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고 김연희(1999년생)씨는 사회에 막 첫발을 내딛은, 밝은 웃음을 지닌 청년이었다. 아빠는 "자신의 꿈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던 모습이 항상 대견했고 현재의 삶에 자부심을 지닌 듬직한 아이였다"고 딸을 떠올렸다. 친구들은 연희씨가 떠난 뒤 쓴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누군가 내게 '연희는 어떤 친구였냐'고 물어보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제가 너무 좋아해서 쫓아다니던 친구', 그리고 '그 마음을 사랑으로 돌려준 친구'라고 말할 거야. 넌 따뜻하고 행복한 감정을 다 알려준 너무 근사하고 멋지고 좋은 친구야."

"멍하니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 보는 일이 잦아졌어. 그때마다 이 도시 한복판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이 보이더라고. 난 그때마다 옆에 있는 친구들, 가족들, 나한테, 그리고 너한테 '저거 연희다'라고 말해. 항상 기억하고 또 기억할게. 좋은 기억들만 남겨줘서 고마워. 연희야 다음 생에도 우리 꼭 다시 친구하자."

"우리 잠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몇 십 년이 지나도 우린 친구일 테니까 최강인싸 김연희, 친구 많이 만들어놔!"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연희씨의 친구들이 지난 1월 연희씨에게 쓴 편지.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연희씨의 친구들이 지난 1월 연희씨에게 쓴 편지.
ⓒ 유족 제공

관련사진보기

 
항공승무원이 되고 싶어 관련 전공으로 대학 진학을 준비한 연희씨는 경기도 한 대학의 항공관광과를 졸업했고 학과에서 진행하는 해외연수 프로그램까지 마쳤다. 하지만 코로나19로 항공업계 사정이 여의치 않자 연희씨는 진로를 변경해 광주의 한 백화점에서 1년 간 근무한 뒤 자신이 희망하던 서울의 대형 백화점에 입사했다.

타지에서 일하며 딸을 물심양면 응원했던 아빠는 자신이 쓸 돈을 아껴 취업 준비 중인 딸에게 보낼 때마다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덧붙였다. 딸 역시 아빠에게 "사랑해"란 말로 화답했다. 아래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 중 일부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연희씨와 아버지 김상민씨가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연희씨와 아버지 김상민씨가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아빠 : 연희야, 100만 원 보냈다. 연희가 배우고 싶은 거 학원 등록하고 용돈 사용해라. 그리고 아빠도 연희처럼 학교 졸업하고 나서 바로 취업이 안 돼 쉬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때는 좀 답답했었지만 끊임없이 준비하다보니 취업이 되더라. 그러니 연희도 시간이 흐르면 좋은 결과 있을 테니 항상 앞으로 잘 될 거라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기 바란다.

: 미안해고 답답해서 그러지 나는... 이번 달은 그냥 학원 안 다니고 독서실 끊어서 영어공부 먼저 하기로 마음먹었어. 아빠가 준 돈은 잘 놔뒀다가 다음 달에 학원 등록할게요. 더 노력할게. 나도 사랑해.


아빠는 "고교 시절부터 장래희망과 직업 선택에 있어서 자기 신념이 강했고 더욱이 자기 적성에 맞는 곳에 입사하며 너무나 기뻐했다"라며 "입사 후에도 업무가 재밌고 동료들과 근무환경도 좋아 오래도록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라고 전했다.

"악몽 속 헤맸다" 헝클어진 머리칼 쓰다듬던 그날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연희씨의 영정을 들고 있는 아버지 김상민씨.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연희씨의 영정을 들고 있는 아버지 김상민씨.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입사 후 3개월, 연희씨는 자신처럼 서울로 취업한 고향 친구와 이태원을 찾았다가 함께 참사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10월 29일에서 30일로 넘어가는 새벽, "뉴스에서 수 십 명이 CPR(심폐소생술)을 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본 아빠는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이는 참사 현장에서 딸의 휴대폰을 주운 남성이었다.

그 남성을 만나 휴대폰을 받았지만 아빠는 한동안 딸을 찾을 수 없었다. 10월 30일 오후 4시 병원에서 연락을 받을 때까지 아빠는 딸의 생사도 모른 채 응급실 곳곳을 헤매야 했다. "악몽 속을 헤매던 시간"이었다. 아빠는 결국 영안실에서 딸과 마주했다.

"싸늘한 얼굴에 시퍼런 멍 자국이 눈가에 선명했어요. 눈을 채 감지도 못한 우리 연희를 보면서도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며 다시 쳐다봤죠. 하지만 우리 연희가 맞았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채 감지 못한 눈을 감겨줬습니다. 살려볼 기회도 없이 딸을 보냈다는 생각에 아버지로서 이 상황이 너무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우리 연희를 어쩌나, 우리 연희를 어쩌나...' 흐느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연희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그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 얼마나 외롭게 세상을 떠났을까요? 살아 있을 때 병치레 하나 없었고 크게 아파본 적도 없었던 우리 연희가 그 처절한 압사 현장에서 얼마나 살려달라고 애원했을까요? 당시를 상상하려니 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연희씨와 아버지 김상민씨.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연희씨와 아버지 김상민씨.
ⓒ 유족 제공

관련사진보기

 
참사 후 120일(인터뷰 날짜 기준), 아버지는 그 시간을 "정부의 비정함을 몸소 체험한 날들"이라고 꼬집었다.

"과거에도 핼러윈 행사는 계속 열렸었고 경찰은 질서유지를 계속 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경찰 극소수만 배치됐고 오후 6시 34분~10시 15분까지 112 신고가 빗발쳤는데도 제대로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그 흔한 재난문자 발송조차 없었습니다. 국가의 위기관리 실패로 대형 참사가 발생했기에 이는 분명히 인재입니다.

그래요, 그렇게 참사가 난 것까진 그렇다고 합시다. 사고 직후 희생자 신원을 파악하고 유족을 모두 모아 공동 장례절차 등을 논의하는 게 잘못을 저지른 국가의 도리 아닙니까. 국가는 무엇이 두려워 40여 개 병원으로 희생자를 뿔뿔이 흩어 놓은 겁니까. 대통령은 왜 위패도 영정도 없는 분향소를 만들어 조문하고 종교 행사에 참석해 유가족이 듣지도 못하는 사과를 한 겁니까. 서울시는 왜 유족과 시민들이 만든 분향소를 '불법 시설물' 운운하며 철거하겠다고 하는 겁니까.

그동안 경찰 특수본의 수사와 국정조사가 진행됐음에도 현장 실무자에게만 책임이 전가됐습니다. 권한이 있는 책임자들은 책임을 회피했고 정부여당의 많은 사람들이 망언을 일삼았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을 경황도 없이 철거 위기에 놓인 서울광장 분향소를 24시간 지키고 있습니다. 가슴에 독화살이 꽂혀 심장을 난도질당하는 것 같습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누군가는 시간이 지났으니 잊으라고 하지만 속사정을 알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겁니다."


30여 년 직장생활 끝낸 이유
 
이태원참사 희생자 김연희씨 아버지 김상민씨가 지난 2월 15일 분향소를 지키기위한 159배 기자회견에 참석해 절을 하고 있는 모습.
 이태원참사 희생자 김연희씨 아버지 김상민씨가 지난 2월 15일 분향소를 지키기위한 159배 기자회견에 참석해 절을 하고 있는 모습.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연희씨의 아버지 김상민씨가 3일 오전 서울광장 분향소에서 국화꽃을 들고 참배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연희씨의 아버지 김상민씨가 3일 오전 서울광장 분향소에서 국화꽃을 들고 참배객을 맞이하고 있다.
ⓒ 소중한

관련사진보기

 
아빠는 30여 년간 다녔던 직장을 최근 그만뒀다. 회사에 해를 끼칠 수 없어 마음을 굳게 먹고 일을 이어갔으나 정부의 행태에 분노가 쌓여 결국 정든 직장을 떠났다. 아빠는 퇴사 후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때론 분향소를 지키고 때론 대통령 공식 사과, 독립적 조사기구 설치, 행정안전부 장관 사퇴 등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인터뷰 닷새 후인 지난 3일 서울광장 분향소에서 다시 연희씨 아빠를 만났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국민 안전은 국가의 무한책임'이라고 말했다. 완전한 언행불일치"라며 "정부는 무엇이 두려워 책임을 회피하고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건가"라고 강조했다.

"얼마 전 그리스에서 열차 사고가 났고 그곳 교통부 장관은 하루 만에 책임을 통감하며 사임했더라고요. 그게 일반 정상적인 국가, 그리고 중책을 맡은 책임자의 자세 아닌가요. 우리나라도 지금까지 그래왔고요. 유독 이 정부는 왜 그러는 걸까요. 우리 대통령은 되레 해외로 순방을 나가며 행정안전부 장관의 어깨를 토닥였잖아요. 그걸 보는 우리 유족의 심정은 어떻겠어요.

짐승도 제 새끼가 위험에 처하면 온몸을 던집니다. 하물며 사람인 제가 소중한 자식을, 그것도 세상 어디보다 안전한 곳인 서울 한복판에서 딸을 잃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충분히 예견하고 막을 수 있었던 참사가 발생했고 그 이후 정부의 반인륜적인 모습을 몸소 겪으며 우리 유족들에게 진실규명은 숙명이 되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국가의 인파관리 방치로 159명의 꽃다운 청춘이 희생됐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이를 직시하고 유족을 대하는 태도를 하루빨리 바꾸기 바랍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연희씨의 영정과 다니던 회사의 명찰.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연희씨의 영정과 다니던 회사의 명찰.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활짝 핀 벚꽃 아래 아빠와 딸. 아빠의 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이 사진이다. '김연희' 세 글자가 적힌 회사 명찰과 영정 사진, 그리고 딸 이름으로 도착한 택배 속 털신을 아빠는 지금도 고이 품고 있다. 

"사랑하는 우리 연희야. 가족 중 가장 마지막까지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가야 했을 연희가 너무나도 빨리 떠났구나. 또 다른 세상에서 만날 때까지 항상 행복하길 바란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연희씨.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연희씨.
ⓒ 유족 제공

관련사진보기

 
<친구 원서씨가 지난 1월 연희씨에게 쓴 편지>

사랑하는 연희에게. 여냐~ 안녕. 나 원서야. 우리 연희는 너무 착하고 예쁘고 소중한 사람이니까 아주 좋은 곳에 잘 도착해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그렇지? 아주 작은 네가 받았을 고통, 그리고 네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생각하니 너무 속상해.

날씨가 그새 더 많이 추워졌지. 눈도 많이 왔었고. 이렇게 너 없는 첫 번째 겨울이 왔어. 그리고 우린 잘 버텨내고 있는 것 같아. 사실 난 여전히 믿기지가 않아서 네게 전화를 하면 받을 거 같고 답장이 올 것 같고 그래. 그냥 오래 못 만나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많이 보고싶고 그래.

나는 네가 떠난 이후로 늘 자기 전에 잠이 안 오면 네 사진을 봐. 동영상에 나온 목소리도 자꾸만 다시 들어봐. 꼭 너랑 같이 있는 것 같거든. 사진 속, 동영상 속 너는 항상 웃고 있어. 네가 사진 찍는 거 좋아했던 게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몰라. 이젠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우리 연희 만지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어. 더 많이 연락할 걸, 더 자주 얼굴 볼 걸. 좋은 데 더 많이 가고 맛있는 거 더 많이 먹을 걸. 더 많이 이야기 나눌 걸. 이런 후회를 너무 많이 해.

문득 혼자 생각을 하다 먼 훗날 있을 내 결혼식에 네가 올 수 없을 것이고 내 생일, 내가 앞으로 살아갈 모든 날들에 네가 없을 것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아 눈물이 난다. 우리 아직 못한 게 너무 많은데 다음 생에도 우리 꼭 친구하자. 그때 우리 못해본 것 전부 다 하자. 그때는 내 옆에 오래오래 있어주라.

고등학교 첫날, 난 반에 아는 친구가 없었고 낯가려서 어색해하고 있다가 저녁에 급식 먹으러 가는 길에 작고 예쁜 네가 나한테 와서 먼저 말 걸어줬잖아. 우리 같이 급식 먹고, 매점도 가고, 그렇게 그날부터 친하게 지내게 됐잖아. 아직도 난 그날을 잊을 수 없어. 옷차림, 대화 내용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나. 그날 나 너한테 너무 고마웠거든. 먼저 용기내 줘서 고마워.

우리 연희 나한테 좋은 일 생기면 나보다 더 많이 기뻐해주고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또 안 좋은 일이나 힘든 일 말하면 자기 일처럼 울고 걱정해주고 슬퍼해줬는데... 나 이제 그런 너 없이 어떻게 지내지?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정되고 난 축하하면서 한편으론 자주 못 보겠다는 생각에 섭섭하기도 했어. 그리고 네가 나한테 '나 없이 살 수 있냐'고 물어봤었지. 장난으로 물어봤던 그때도 내가 대답했지만 난 너 없이 못 살아.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겠니. 절대 못 살지.

내 옆에 항상 있지 연희야? 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버텨. 네가 선물해준 8년간의 예쁘고 소중한 추억으로 잘 버텨볼게. 너랑 함께한 날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너무 행복했어. 너랑 같이 있으면 너무 즐겁고 위로가 됐어. 너한테도 내가 그런 친구였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머니·아버지께는 우리가 연락도 드리고 찾아뵙기도 하고 그럴 테니 너무 걱정 마. 연희 빈자리를 다 채울 순 없겠지만 우리가 노력해볼게. 우리가 잘 할게. 우리 믿지?

너무 보고 싶어. 사랑해. 너를 많이 사랑하는 원서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연희씨가 잠들어 있는 광주 영락공원.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연희씨가 잠들어 있는 광주 영락공원.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태그:#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연희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기사는 연재 이태원참사_희생자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독자의견

해당 기사는 댓글 서비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