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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에 도착한 다음날, 제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인도네시아 국립미술관이었습니다. 사실 그냥 숙소 근처에 큰 미술관이 있다기에 방문한 것 뿐이었죠. 하지만 저는 이 미술관에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 저는 자카르타에 도착한 뒤 복잡한 거리 풍경을 보고 싱가포르와의 대조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미술관 역시 싱가포르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인도네시아 국립미술관에서는 미술사와 인도네시아의 현대 정치를 아주 밀접하게 연관짓고 있었습니다. 현대사의 격랑을 미술관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와 아시아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충실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싱가포르의 미술관에서 비어 있던 것들이, 여기에는 채워져 있습니다.
 
자카르타 국립미술관
 자카르타 국립미술관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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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도네시아로서는 국가 정체성과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고민이, 다른 나라에 비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아주 현대적인 국가거든요. 여기서 현대적이라는 의미는 기술이나 물질의 발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도네시아라는 국가의 정체성 자체가 현대사의 산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일본은 1942년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3년 뒤인 1945년 8월 15일 패망하죠.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미 일본 치하에서도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쇼와 덴노의 항복 선언 이틀 뒤, 8월 17일 수카르노(Sukarno)를 대통령으로, 하타(Hatta)를 부통령으로 하는 위원회가 만들어져 일본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은 지금 자카르타 공항의 이름으로도 남아 있죠.

물론 네덜란드를 포함한 연합국도 이 땅에 곧 상륙합니다. 이들은 수카르노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고, 인도네시아인의 무장 해제를 주장했죠. 하지만 인도네시아인은 저항했습니다.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신정부 사이 전쟁이 벌어졌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이미 몰락한 제국이었습니다. 남아있는 식민지도 거의 없는 상황이었죠.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사이 인구의 격차도 컸습니다. 지금도 자바 섬의 인구는 1억 5천만명에 가깝지만, 네덜란드의 인구는 2천만명이 되지 않으니까요. 네덜란드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이었죠. 결국 국제사회의 압박까지 더해지며 1949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철군합니다.
 
자카르타 대성당
 자카르타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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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합중국(United States of Indonesia)'의 건국을 선언합니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합중국'으로, 연방제 국가였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여러 지역이 공화국이나 주, 자치령이 되어 '인도네시아 합중국'이라는 연방에 가입하는 형태였죠.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1950년까지 각 주와 자치령을 차례로 폐지합니다. 1950년 8월 17일 독립 선언 5년 만에 '인도네시아 공화국'이라는 단일한 공화국으로 인도네시아 전역이 통합되죠.

이렇게 만들어진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처음부터 국가 정체성에 대한 문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수많은 섬들은 언어도 역사적 경험도 모두 다르니까요. 지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고, 그만큼 문화도 아주 달랐습니다. 모두 네덜란드의 지배를 경험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나라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국가의 정체성을 만들 수는 없겠죠.

결국 역사상 처음으로 출범한 인도네시아라는 정치체를 두고서는 여러 논쟁이 오갔습니다.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이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인도네시아가 현대적인 국가라 말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현대사에 접어들어서야 국가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고,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죠.
 
반둥 대모스크
 반둥 대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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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가 아시아적 정체성을 고민하고,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도모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자카르타에서 며칠을 보낸 후 기차를 타고 반둥으로 향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반둥 회의'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장소죠.

반둥은 사실 자카르타 만큼이나 네덜란드 식민 지배의 흔적이 많이 남은 장소입니다. 1880년대부터 자카르타와 반둥 사이 도로와 철도가 만들어졌죠. 지금도 아찔한 길을 여럿 지나는 철도를 그 시절에 만들었다는 것이 놀라운 수준입니다. 네덜란드는 아예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수도를 반둥으로 옮길 계획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식민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땅에서, 1955년 4월에 열린 회의가 '반둥 회의'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로 불리죠. 이미 인도네시아와 인도를 중심으로 아시아 신생 국가들 사이의 회의가 이어지던 상황에서, 이를 통합해 보고자 한 시도였습니다.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 버마, 아프가니스탄, 캄보디아, 실론, 이집트, 에티오피아, 이란, 일본 등 아시아와 아프리카 29개 국가가 이 회의에 참여했습니다. 이들 국가의 인구를 합하면 세계 인구의 54%를 차지하는 대규모의 회의였습니다.

반둥 회의는 모든 국가의 평등함을 인정하고, 강대국의 이익을 위한 연합 방위의 형성을 반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반둥 선언'을 채택합니다. 이런 노력은 계속 이어져, 1957년 카이로에서도 유사한 회의가 개최됩니다. 그리고 1961년 베오그라드 회의를 시작으로 '비동맹운동'이 창설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죠.
 
아시아-아프리카 회의 기념 조형물
 아시아-아프리카 회의 기념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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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인도네시아의 현대사는 그 뒤로도 여러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판차실라'라는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말했습니다. 하지만 1959년 계엄을 선포하고 점차 독재자의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독재는 1965년 벌어진 쿠데타를 진압하며 성장한 군부 지도자 수하르토(Suharto)의 시대로 이어졌습니다. 수하르토는 '새로운 질서(New Order)'를 선언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부정합니다. 군부의 정치적 힘은 강해지고, 반대파는 탄압의 대상이 됩니다. 100만 명 넘는 사람이 정부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이 이 시대를 주제로 하고 있기도 합니다.

수하르토 정권은 1998년에 이르러서야 민주화 운동을 통해 붕괴합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에 따른 경제적 문제도 수하르토 정권의 붕괴에 큰 역할을 했죠. 그렇게 '개혁의 시대'가 찾아옵니다.

1999년 인도네시아는 역사상 최초로 자유로운 국가 단위의 선거를 치렀습니다. 2004년부터는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죠. 2004년과 2009년에는 군부 출신의 유도요노 대통령이 당선됩니다. 그리고 2014년 좌파 진영인 민주항쟁당의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당선되며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초의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가 이룩되죠.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2019년 재선에 성공하며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습니다. 
 
돌로로사 시나가, <연대>, 2000. 인도네시아 국립미술관.
 돌로로사 시나가, <연대>, 2000. 인도네시아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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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정치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합니다. 긴 군부독재의 유산은 아직 온전히 청산되지 못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는 보장되지 않습니다. 인도네시아인은 모두 이슬람, 개신교, 가톨릭, 힌두교, 불교, 유교 중 하나를 반드시 믿어야 하고, 이를 등록해야 합니다. 종교를 믿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로 몰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르죠.

분리주의 문제도 여전히 심각합니다. 동티모르 문제는 그 대표적인 사례죠. 동티모르는 1975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했지만 인도네시아는 이 땅을 무력으로 강제 병합했습니다. 2002년 독립 때까지 이 상황은 계속 이어졌죠.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서뉴기니는 여전히 독립하지 못하고 인도네시아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군부 독재국가에서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는 국가로까지 성장했습니다. 여전히 종교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차별이 남아 있지만,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지수를 가진 나라가 되기도 했죠. 각 지방의 언어가 남아 있지만,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많은 사람들이 말레이-인도네시아어로 소통할 수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말했듯 인도네시아는 현대적인 국가입니다. 인도네시아의 국가 표어는 '다양성 속의 통합'이라죠. 저는 인도네시아가 아직 그 정체성의 고민을 끝내지 못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이 다양성이고, 무엇이 통합인지 아직 결론짓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도네시아는 아직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 많은 문제가 남아 있지만, 저는 이 새로운 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계속해서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시아적 가치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사회 구성원 모두를 존중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함께 향하고 싶습니다.

인도네시아는 2023년 아세안 의장국을 맡았습니다. 거리 곳곳에는 2023년 아세안의 비전을 알리는 포스터가 걸려 있습니다. 꼭 의장국이 아니더라도, 원래 아세안의 사무국이 자카르타에 위치해 있기도 하고요. 바람에 날리는 현수막 앞, 이웃 국가와의 그런 연대를 생각하며 저는 오늘도 아시아의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반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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