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3 13:29최종 업데이트 23.03.03 13:29
  • 본문듣기
이 법의 목적은 라거, 라거 맥주, 에일, 포터, 스타우트 또는 밀 맥주 같은 음료와 액체를 의미하는 '맥아주'가 맥아, 홉, 물로만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1890년 미국 의회는 '미국 맥주 순수령' 제정을 앞두고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맥주 순수령은 1516년 독일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4세가 맥주에 맥아, 홉, 물만 넣어야 한다고 공표한 법이다. 독일에서야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의 맥주 정체성을 지키고자 이어 온 법이지만 갓 독립한 미국에서는 생뚱맞고 어색하게 보였다. 

맥주 품질을 위해 제정된 독일과 달리 미국 맥주 순수령을 주도한 이들은 보리와 맥아 제조업자들이었다. 1860년 대 미국 맥주 시장에는 옥수수와 쌀 같은 부가물을 넣은 맥주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전체 맥아 양의 30% 정도를 대체하는 이 부가물 때문에 보리와 맥아 제조업자들은 위기감을 느꼈고 로비를 통해 미국 맥주 순수령을 관철하려 한 것이다. 

미국 양조업계는 이 법이 미국 자유주의를 크게 훼손한다고 생각했다. 저명한 양조학자 프랜시스 와이어트는 곧바로 '부가물이 현대 순수하고 건강한 맥주에 필요한 이유'라는 글을 게재했고 미국 라거의 아버지 안톤 슈바르츠 박사 또한 '맥주와 재료'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미국맥주협회 회장 윌리엄 마일스는 미국 맥주 순수령이 통과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여러 신문에 기고하며 여론전을 펼치기도 했다. 
 

1890년 제정될 뻔 했던 미국 맥주 순수령. 'The Inspiring and Surprising History and Legacy of American Lager Beer' 논문에서 발췌. ⓒ Library of Congress

 

미국 양조업계에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이 법은 거센 저항에 부딪혀 결국 좌초됐고 보리 이외의 곡물이 들어간 밝고 가벼운 라거 스타일은 미국 맥주의 간판이 된다. 아메리칸 라거로 명명된 이 스타일은 20세기 초 영국 에일과 독일 필스너를 제치고 시장을 석권했다.


특히 독일 이민자들이 설립한 잉링, 앤하이저부시, 밀러, 쿠어스 같은 맥주 회사는 자신들의 맥주를 전 세계로 퍼트리며 옥수수와 쌀을 미국 맥주의 정체성으로 만들었다. 19세기 전까지 위스키에 익숙했던 젊은 미국은 20세기를 지나며 맥주를 사랑하는 국가로 변해있었다.

미국 맥주의 상징, 옥수수와 쌀

흔히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을 최초의 미국 이주민이라고 한다. 그러나 13년 전에 이미 버지니아에 도착한 영국인들이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황금이었다. 기대와 달리 황금은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환경으로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 원주민의 도움으로 담배 재배에 성공한 생존자들은 영국과의 거래를 통해 정착에 성공한다.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고 대서양을 건넌 청교도들은 영국 성공회의 탄압을 피해 망명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칼뱅파의 분파인 청교도는 성공회를 정화시키려 했다. 목표에 실패한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를 원했고 지금의 보스턴 남쪽 지역에 도착했다. 

영국에서 온 초기 식민지인들에게 미국 땅은 척박했다. 보리와 밀농사는 녹록지 않았다. 대신 옥수수가 풍부했고 키우기도 용이했다. 이런 미국 사람들에게 술의 재료로 옥수수를 넣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맥주보다 옥수수를 이용한 증류주가 더 인기를 끌었다. 가정에서 소량으로 양조를 하기도 했지만 맥주는 대부분 영국에서 수입됐다. 1783년 독립 후에도 미국인들에게 맥주는 영국 포터와 에일을 의미했다. 

미국에 본격적으로 맥주 시대가 열린 건 독일 이민자 덕분이었다. 1840년대 이들이 가져온 어두운 색 라거 둥켈은 영국 에일을 밀어냈다. 과학에 기초한 양조 기술도 정착되기 시작했다. 맥주가 위스키를 앞선 것도 이때 즈음이었다. 1860년부터 미국 맥주 산업은 2차 산업의 붐과 함께 크게 성장했다. 미국 노동자들이 선호한 맥주는 갈증 해소에 좋은 밝은 색 라거였다. 그들에게 둥켈은 너무 무겁고 진했다.

미국 양조사들은 독일과 체코 필스너를 벤치마킹하며 옥수수와 쌀을 첨가했다. 옥수수와 쌀이 들어간 아메리칸 라거가 미국 환경과 문화에 더 적합하다는 연구도 잇달았다. 미국 양조학자들은 추운 유럽과 달리 날씨가 온화한 미국에는 무겁고 진한 올 몰트 맥주(all malt beer)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869년 '곡물, 특히 쌀을 첨가한 양조 방법'을 발표한 안톤 슈바르츠는 부가물 맥주를 옹호하는 대표적인 학자였다. 

미국 맥주에는 6줄 보리가 사용된다는 것도 좋은 과학적 핑계가 됐다. 유럽에서 사용하는 2줄 보리와 달리 6줄 보리는 단백질이 많아 맥주를 탁하게 했다. 미국 양조사들은 보리 맥아 대신 일정 비율의 옥수수나 쌀을 넣어야 더 밝고 투명한 라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맥주를 물처럼 단번에 마시는 미국인들의 음주 습관도 가벼운 맥주를 선호하게 했다. 미국인들이 향미보다 가벼운 목넘김을 좋아한다는 것을 포착한 양조사들은 맥주에 부가물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비용도 중요한 이유였다. 보리 맥아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옥수수나 쌀을 넣으면 전체적인 양조 비용도 낮출 수 있었다.  

1890년 미국 맥주 순수령이 기각되자 미국에서는 부가물을 넣은 라거가 대세가 된다. 1912년 미국 맥주 시장에서 올 몰트 맥주의 점유율은 겨우 5%에 불과했다. 아메리칸 라거의 성장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치지 않았다. 20세기 들어 유럽과 아시아로 진출한 아메리칸 라거는 영국과 독일이 쥐고 있던 기득권을 흔들었다. 그중 앤하이저부시의 버드와이저는 그 폭풍의 중심에 있는 맥주였다.  

미국 맥주의 신화, 앤하이저부시

1857년 야망으로 가득 찬 18살의 독일 젊은이가 미국 세인트루이스로 건너온다. 그의 이름은 아돌푸스 부시, 양조 장비 세일즈를 하던 그가 새로운 기회를 잡은 건, 또 다른 독일 출신 사업가 에버하드 앤하이저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양조장을 인수한 앤하이저는 업무 차 관계를 맺은 아돌푸스 부시를 눈여겨봤고, 1861년 자신의 딸과 결혼시킨 후 경영에 참여시켰다.

1879년 회사 이름이 앤하이저부시로 바뀌며 부시는 후계자로 인정받았고 1880년 앤하이저 사망 이후에는 단독 대표로 양조장을 운영하며 회사를 발전시켰다. 부시는 놀라운 개척가이자 사업가였다.

그는 1864년 루이 파스퇴르가 고안한 저온 살균법과 병 맥주 대량 생산 시스템을 자신의 맥주에 과감히 적용했다. 1874년에는 얼음을 넣은 냉장 차도 운용하는 개척가다운 면모도 보였다. 다양한 경험과 기술이 들어간 앤하이저부시 맥주는 장거리 배송과 장기간 보관에도 흔들리지 않는 맛과 품질을 자랑했다. 1876년 앤하이저부시가 출시한 맥주가 바로 버드와이저다.   
 

아돌푸스 부시 ⓒ 위키피디아

 
버드와이저(Budweiser)는 6줄 보리 맥아와 약 30% 쌀 그리고 미국과 유럽 홉을 넣은 전형적인 아메리칸 라거다. 아돌푸스 부시와 그의 친구 콘래드가 체코 여행 당시 감명 깊게 마신 필스너 부드바이저 부드바(Budweiser Budvar)를 기반으로 디자인됐다. 

공교롭게도 버드와이저라는 이름 또한 체코 부드바이저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부드바이저는 약 7백 년의 역사를 지닌 체코 남부 체스키 부데요비치 지역 맥주로 부드바이저는 '부데요비치의'를 뜻하는 독일어다. 버드와이저는 부드바이저의 미국식 발음이다. 

버드와이저의 슬로건 'King of Beer'도 부드바이저의 'Beer of King'에서 따왔다. 체코 부드바이저의 주인은 체코의 왕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드바이저를 'Beer of King'이라고 불렀다. 저작권 개념이 희박했던 19세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 맥주 회사들은 미국 맥주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버드와이저가 유럽 및 아시아에서 인기를 얻자 체코 부드바이저 양조장은 상표권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부드바이저 양조장의 주인은 체코 정부였고 길고 지루한 소송이 시작됐다. 소송에 지친 앤하이저부시는 체코가 공산주의를 벗어났을 때, 부드바이저 인수를 추친했지만 체코 국민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소송 결과 버드와이저는 현재 국가별로 다른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유럽 대륙에서 버드와이저는 버드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지만 한국에서는 버드와이저가 허용된다. 반대로 체코 부드바이저는 유럽 대륙에서 본명 그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부데요비체 부드바로 판매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 멕시코, 브라질에서는 체코바(Czechvar)로 수입되고 있다. 
 

체코 부드바이저 부드바 ⓒ 위키피디아

 
미국 문화 전도사로 우뚝 선 버드와이저

버드와이저는 금주령 이전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던 맥주였다. 맥주 자체도 훌륭했지만 그 배경에는 미국 산업 구조의 변화가 있었다. 1908년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은 산업과 소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동차 가격을 합리적으로 만든 컨베이어 시스템은 상품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곧 공산품과 대중의 탄생을 의미했다.

대량으로 동일한 물건을 찍어내는 생산 체계는 합리적 가격의 공산품을 제공했다. 안정적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 소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용도와 가격이었다. 임금 노동자와 공산품이 만나자 대중 소비 사회가 도래했다. 수요가 공급을 압도하는 시대에 개성이나 취향 같은 가치는 무의미했다. 대중들의 취향은 사치였고 소비 자체가 미덕이었다. 몰개성은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맥주도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가벼운 목넘김이 강조된 아메리칸 라거는 다른 어떤 맥주보다 대중 상품으로 적합했다. 호불호가 없는 것이 대중 맥주가 갖춰야 할 첫 번째 미덕이었다. 개성과 특징은 없었지만 합리적 가격에 무난한 향미를 가진 버드와이저는 누구나 좋아하는 맥주가 됐다. 

1919년부터 1930년까지 있었던 금주령 시기는 앤하이저부시에 위기이자 기회였다. 맥주 대신 개발한 맥주 맛 음료와 무알콜 맥주는 인기를 끌었고 효모와 맥아, 심지어 아이스크림 사업도 나쁘지 않았다. 힘든 시기를 버틴 결과는 달콤했다. 수백 개에 달했던 맥주 양조장이 수십 개로 줄어들며 자연스럽게 독과점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가정용 냉장고 발명은 버드와이저 판매에 날개를 달아줬다.
 

이 700미리 캔 버드와이저는 미국에서 생산된 것들이다. ⓒ 윤한샘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은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강국이 된다. 특히 한국 전쟁 이후, 전시 체제를 벗어난 미국은 베이비 붐 세대와 함께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뤘다. 경제는 문화를 낳았다. 1960년대 미국 문화는 영화·음악·예술을 망라하는 가장 힙한 문화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맥도날드, 리바이스, 코카콜라 같은 미국 상표들도 이 흐름에 편승했다.  

미국 맥주도 마찬가지였다. 맥주 산업은 미국 경제 성장과 함께 발전했다. 앤하이저부시는 1957년 라이벌 슐리츠를 누르고 미국 최대 맥주 회사가 됐고 적극적인 인수합병을 시도하며 세계를 호령했다. 앤하이저부시의 대표 맥주 버드와이저 또한 맥주를 넘어 미국 문화를 상징하는 상품으로 전 세계로 수출됐다. 아메리칸 라거는 버드와이저라는 호랑이의 등을 타고 20세기 맥주의 표준이자 표상이 된 것이다. 

사라진 미국 맥주와 그 영혼

2008년 세계 맥주 시장에 속보가 타전됐다. 앤하이저부시가 벨기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다국적 맥주 회사 인베브에 적대적 합병을 당한 것이다. 두 회사는 앤하이저부 인베브(AB Inveb)라는 이름을 가진 거대한 초국적 맥주 기업이 되었다. 이 소식에 미국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앤하이저부시 합병 이후, 미국을 대표하던 맥주 회사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앤하이저부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밀러는 이미 2002년 남아프리카 맥주 회사에 인수되어 사브밀러가 되었고 미국에서 3번째로 큰 맥주 브랜드였던 쿠어스도 2004년 캐나다 맥주 회사 몰슨에 합병되어 몰슨 쿠어스로 이름을 바꿨다. 한 술 더 떠 앤하이저부 인베브와 사브밀러는 2015년 한 몸이 됐다. 
 

편의점에서 구입한 버드와이저, 쿠어스, 밀러. 모두 미국에서 만들어진 맥주가 아니다. ⓒ 윤한샘


한 때 팍스 아메리카나를 등에 업고 세계를 호령했던 미국 맥주들이 21세기 초라한 신세로 전락한 모습은 변화와 혁신에 인색한 결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버드와이저는 광주에서 생산된 것이다. 라벨은 버드와이저의 것이지만 정체성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20세기 공산품이었던 맥주는 어느덧 영혼을 따지는 문화가 되었다. 미국 산 버드와이저의 영혼을 찾는 시대가 올 줄이야. 가혹하고 서글프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 중복 게재됩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