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 지면을 통해 세상에 공개한 분은 1982년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를 쓴 윤정모 작가다. '일본군 위안부' 출신임을 최초로 고백한 분은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다. 그분은 1991년 도쿄에서 "일본 깃발만 봐도 치가 떨린다"라고 증언했다.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의 참혹한 만행을 증언한 내용을 수록한 증언집으로 고 강용권 선생이 엮었다. 그는 1999년 자전거 답사 도중 별세했다.
▲ <끌려간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해와 달, 2000) 책 표지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의 참혹한 만행을 증언한 내용을 수록한 증언집으로 고 강용권 선생이 엮었다. 그는 1999년 자전거 답사 도중 별세했다.
ⓒ 하성환

관련사진보기

 
고 강용권의 증언집 <끌려간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해와 달, 2000)에 따르면 13~18세 소녀가 하루에 일본군을 30명~50명씩 마주했다. 이용수 할머니 증언에 따르면 그냥 뒤집힌 개구리처럼 그 상태로 계속 있어야 했다. 또 다른 피해 할머니는 군 위안소로 계속 밀려 들어오는 군인들 때문에 밥 먹을 시간조차 없어서 누운 상태 그대로 식사 문제를 해결했다고 증언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 여성들이 겪었을 수모와 고통 그리고 그 참상과 만행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조선인 여성을 '사냥'했다고 전쟁범죄를 고백했던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은 물론이고 야마기시 히로시의 증언 또한 '일본군 위안부' 참상을 이해하는 작은 단초를 제공한다. <동아일보> 1993년 9월 18일자 보도에 따르면 야마기시 히로시는 1943~1945년 중국 하북성 위수지역에서 일본군 보병부대 직영 군 위안소 육군 경리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그가 증언하기를, 함경북도 청진에서 끌고온 조선인 여성 8명을 '식민지 인간'으로 여겨 '가축'처럼 함부로 취급했다고 울면서 참회했다.

일본군은 '군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 여성을 '조센삐'로 불렀다. '삐'는 여성 국부를 가리키는 중국 속어다. 1992년 윤정옥 교수는 <정신대 문제 아시아 연대회의 보고서>에서 제국주의 일본은 '군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 여성을 '성욕 처리 도구'로 취급했다고 썼다. 다시 말해 조선 여성을 쓰다 버릴 '군용 소모품'으로 취급했다.

1984년 EYC 여성선교위원회 자료에도 적시됐듯 일본군은 조선 여성을 '탄환 1박스'로 표기하고 '군 위안부'가 탔던 수송선이 침몰해 조선 여성들이 사망했을 땐 '군수품 약간 손해'로 처리했다. '군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 여성을 '천황의 군대'인 황군을 위문하기 위한 '천황의 하사품'정도로 인식했던 셈이다.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가 펴낸 자료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 위안부들>(1993)에는 인도주의에 반하는 전쟁범죄인 '군 위안부' 만행이 1930년대 초부터 이미 시작됐다고 밝혔다. 그러다 전선이 중국으로 확장되고, 다시 동남아로 그리고 미국으로 확전되면서 일본 정부와 일본군대는 조직적으로 조선인 여성들을 강탈했다. 때론 돈을 벌 수 있다는 속임수로, 또는 직접 군 트럭을 동원해 강제 납치하는 수법으로 만행을 저질렀다.
  
1944년 10월 27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난 ‘軍 慰安婦 急募’ 라는 제목의 군 위안부 모집 광고
▲ <군 위안부> 모집광고를 낸 매일신보 1944년 10월 27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난 ‘軍 慰安婦 急募’ 라는 제목의 군 위안부 모집 광고
ⓒ 하성환

관련사진보기

 
태평양전쟁 말기로 치달을수록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가기 위한 조선인 여성에 대한 '사냥'은 극에 달했다. 1970년 8월 15일 자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1944~1945년 두 해 동안 끌려간 조선인 여성만 5만~7만 명을 넘어섰다. 실제로 1944년 10월 27일 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엔 '軍 慰安婦 急募'라는 제목으로 조선 여성을 군 위안부로 급히 모집하는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조선인 여성이 감당했던 참상과 만행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파푸아뉴기니 라파울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 제144연대 병사 니시야마가 들려준 증언은 그 끔찍한 참상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된다. 일본인 작가 센다 가고가 써서 중국어로 본역된 책 <종군위안부>(후베이인민출판사)에 실린 니시야마의 증언은 이렇다. 

"라파울에 그녀들이 도착해서 여장을 푼 첫날, 사병의 대기행렬이 3km나 되었고 그녀들은 종일토록 그 행렬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3km라면 3000명 이상입니다. 여자들은 1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13살에 끌려가 일본군 장교 가네무라와 나카무라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고 김영숙 할머니 증언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가해자는 주머니칼로 소녀의 신체를 훼손했고, 겁에 질려 도망가는 13살 어린 소녀를 칼로 위협하며 군홧발로 무릎을 짓이겼다. 그밖에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잔혹한 행위들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전면에 나서서 맨 먼저 해결했어야 할 과거사 문제였다. 그러나 일본이 저지른 참혹한 전쟁범죄에 대해 불행하게도 역대 우리 정부나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단 한 번도 사과를 요구한 적이 없다. 2004년 3.1 독립운동기념일에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으로 과거사 문제나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본 정부의 잘못을 확인시켰을 뿐이다.

"일본에 대해서 한 마디 꼭 충고를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이, 한국의 정치지도자가 굳이 역사적 사실을...(중략)...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소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미래를 위해서 마음에 상처를 주는 얘기들을 절제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 도움이 된다는 뜻으로 우리 국민들은 절제하고 있습니다."

2018년 전범 기업 미쓰비시의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해 대한민국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당시 일본 내각 아베 수상은 적반하장으로 경제 보복 조치로 겁박했다. 그러자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 승리의 역사를 만들겠다. 우리가 굴복한다면 역사는 반복될 것"이라며 단호하게 대응한 게 그동안 과거사 문제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가 보여준 태도의 전부다.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 행태를 보였던 이승만은 해방 후 반일을 정치적으로 교묘히 악용했다. 박정희는 전 국민의 반대에도 한일 국교 회담을 강행해 과거사 배상 문제에 대해 일본이 거부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전두환은 A급 전범 일왕 히로히토와 축배를 들었고 이명박은 일왕이란 표현 대신 '천황'이란 표현을 썼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3월 13일 "일본 정부에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방침으로 이에 대한 보상은 내년부터 정부 예산에서 하라"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일본 관방장관은 이를 "배상 포기로 받아들인다"며 맞장구치듯 환영했다. 그러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65년 박정희 정권 시절 이미 종결된 문제임을 한국 정부가 인정한 것"이라 부연했다. 그만큼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대해 무관심했고 소극적이었다.

(*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다른 매체에 싣지 않았습니다.


태그:#윤미향, #일본군 위안부, #정대협(정의연), #시민단체(NGO), #평화의 소녀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