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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이듬해인 1947년 20세 때의 김자동 회장과 부모님 김의한ㆍ정정화 여사
▲ 김자동 가족 귀국 이듬해인 1947년 20세 때의 김자동 회장과 부모님 김의한ㆍ정정화 여사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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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심과 친근함이 유달랐던 '백범 아저씨'가 이승만 권력에 의해 암살되자 김자동은 분노와 좌절감에 빠졌다. 본인은 물론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슬픔 역시 못지 않았다. 온 가족이 마치 친상을 당한 듯 슬픔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어머니의 기록이다.

백범의 장례는 온 국민의 오열과 애도 속에 엄숙하게 치러졌다. 나는 소복을 입고 마지막 가는 백범의 뒤를 따랐다. 장례 행렬은 서울운동장,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 앞을 빠져 나갔다. 연도는 온통 인산인해였다.

백범은 나 하나만의 스승이 아니었다. 나는 장지까지 행렬을 따라 갈 수가 없었다. 빈소에서 밤을 지새며 며칠을 버틴 탓에 그만 서울역 앞을 지날 때는 다리에 맥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행렬에서 빠진 나는 근처 도동에 있은 엄항섭의 집으로 들어가 지친 몸을 달랬다. 내 두 다리를 성하게 만들어서 먼 길을 떠나는 백범에게 말벗이라도 되고픈 심정이었다.

"남은 대통령도 하고 그러는데 선생님은 뭘 하실래요?"
"나? 나야 머리에 38선이나 베고 죽지."

다시 물어봐도 대답은 한결같으리라.
"나? 나야 머리에 38선이나 베고 죽지."

선생 생전에 농으로 던진 내 물음에 왼손을 머리 위로 갖다 대면서 싱끗 웃던 모습. 다시 물어봐도 그 웃던 모습 또한 변함 없으리라. (주석 9)

백범 암살은 정치사적으로 거대한 변곡점이었다. 항일과 친일, 정도와 패도, 정의와 불의가 뒤바뀌거나 모호해지는 지점이다. 이로부터 우리 현대사의 병적징후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비록 '낮달'과 같은 처지로 밀렸으나 국민에게는 보름달 같은 존재이던 분의 암살은 어둠의 터널로 들어가는 고속 길목이었다. 이후 이승만과 그 추종자들은 파충류적 식탐으로 독재의 아성을 쌓고, 백범의 정신적 유산 지우기에 급급하여, 국민들의 효창동 묘소 참배까지 경찰을 동원해서 막았다.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김자동은 공부를 더 하고 잘못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잡고자 작심했다. 자신이 직접 참여하고 지켜보았던 임시정부 사람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뒷날 생애의 마지막 열정을  바쳐 조직하고 이끌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는 백범 암살의 현장에서 각인된 역사적 과제였다. 

1949년 11월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49학번이다. 주위에서 고려대학 정치학과를 추천 했으나 서울대학을 택한 것은 우선 국립대학이어서 학비가 쌌기 때문이다. 여기에 상하이에서 같이 지냈던 김인환 아저씨 집의 숙동(淑東) 형의 권유도 있었다.

궁한 형편에 내 학비까지 대려니 집안 살림은 설상가상으로 더 어려워졌다. 서울법대 입학 당시 아버지가 애지중지하시던 오메가 시계를 팔아 학비에 보탰다. 아버지는 충칭에서 내 중학교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상하이에서부터 쓰시던 만년필을 판 적이 있었다. 서울대를 간 것도 등록금이 싼 국립대를 찾아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집안 형편이 어려워도 부모님은 어떻게든 내 학비를 마련해주셨다. 요즘 같으면 내가 아르바이트라도 했겠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일자리가 없었다. (주석 10)

해방 후 아버지는 한독당 조직부장에 이어 중앙상무위원을 맡고,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일을 하였다. 1947년 3월부터는 '독립운동 60년사' 자료수집위원회를 조직, 대표를 맡았다. 많은 자료를 모았으나 6.25 전쟁이 터지면서 모두 분실되고 말았다. 한독당 일이나 독립운동 관련 자료 수집 작업이 돈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계가 늘 어려웠다. 

정부가 수립되면서 성재 이시영이 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다 임정요인 중 해공 신익희와 함께 참여파에 속한다. 성재와는 충칭시절부터 인연이 깊었던 사이고, 당시 바로 이웃에 살았다. 성재는 정부 감찰위원장직을 역사학자 정인보에게 맡기고 위원의 한 사람으로 정정화를 추천하였다. 오랫동안 지켜봐온 터라 신생정부 관리들의 공정성을 살리는데 가장 적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성재의 말을 듣고 난색을 표하자 성재는 그 자리에서 당장 수락 여부를 대답하지 말라면서 거듭 재고할 것을 당부했다. 나는 성재의 제의를 지나치게 무시하는 태도로 예의가 아닐 듯싶어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을 하고 성재와 헤어졌다.

그러나 단정을 반대하고 선거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성재의 제의를 재고할 필요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만약 내가 반쪽짜리 정부에 들어가 일을 한다면 그것은 민족적인 죄를 범하는 짓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성엄하고 의논해본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며칠 후에 성재를 찾아가 내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주석 11)

김자동은 이와 같이 강직한 부모 밑에서 힘겹게 공부하여 서울대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주석
9> 정정화, 앞의 책, 193~194쪽.
10> 앞의 책, 169쪽.
11> 정정화, 앞의 책, 28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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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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