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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들른 한 카페에서 할아버지 손님과 직원이 대화하는 모습을 봤다. 할아버지는 카페인이 들지 않은 따뜻한 음료를 원하는 듯했는데 좀처럼 주문을 하지 못했다. 카페 메뉴는 죄다 영어로만 쓰여 있었고 안내 역시 부실했기 때문이다. 직원이라도 친절하게 응대했다면 좋았으련만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워낙 크고 반 말투인 게 거슬렸는지 대놓고 불친절하게 응대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 그러니까 뭘 시킬 거냐고요."
"커피 말고 따뜻한 거 차 같은 거."
"메뉴를 말씀하시라고요."
"따뜻한 차 아무거나 달라고."


한참 승강이를 벌이던 할아버지가 안타까웠는지 뒤에 줄을 섰던 학생이 대신 따뜻한 차로 주문을 해줬다. 여자친구와 함께 온 그 학생은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 근처에 자리를 잡았는데, 불친절한 할아버지를 왜 도와줬냐는 여자의 말에 이렇게 답하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가 해녀였어서 아는데, 노인들이 일하다가 청력이 안 좋아지고 그러면 소리가 커진다"고, "반말을 하는 것도 그분들 살아오신 문화가 그런 거지 알고 보면 좋은 분들이 많다"고 말이다. 못내 그 시끄러운 할아버지를 색안경 끼고 보았던 나도 머리를 한 대 맞는 기분이었다.
 
<힐빌리의 노래> 책 표지
 <힐빌리의 노래> 책 표지
ⓒ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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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 러스트벨트에서 자란 백인

인종적으로도 어느 정도 균일성이 유지되고, 공교육과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막대한 한국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를 충분히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제 주변을 기준으로 주류와 비주류, 바람직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보이는 이들에 대한 무시와 혐오가 쉽게 자리를 잡는다. 조선족이나 저소득층, 노인과 장애인에 대해 쏟아지는 차별적 언어들이 온라인상에서 큰 호응을 얻곤 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가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다.

<힐빌리의 노래>는 미국 역시 한국과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음을 내보인다. 저자인 J.D. 밴스는 예일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실리콘밸리에서 사업을 시작한 유망한 백인 젊은이다. 그러나 이 같은 설명으로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건 그가 러스트벨트라 불리는 미국의 구 공업지대 출신이란 점이다. 힐빌리는 러스트벨트 지역에서 나고 자란 백인들을 칭하는 말로, 그들이 현재 겪고 있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문제점들이 이 책의 주제라고 할 만하다.

책에 따르면 러스트벨트는 미국 공업의 부흥과 함께 일어난 도시들을 묶어 칭하는 말이다.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라 미국 동북부로 길게 이어지는 이 도시들은 지난 수십년간 쇠락을 면치 못했다. 일자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국이 정책적으로 제조업을 포기하고, 공장들을 아시아나 중남미로 이주하도록 한 영향이다. 결과적으로 이 지역 주민 상당수는 일자리를 잃어버렸고 복지정책에 기대어 살아가는 하층민으로 전락했다.

밴스는 증조할아버지 대부터 자신의 세대에 이르는 가족의 역사를 통해 힐빌리와 미국이 마주한 문제를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법보다 총이, 돈보다 명예가 귀했던 초기 이민자들의 문화가 실제 삶에서 어떤 문화를 만들었는지를 내보이고 그 문제들을 서술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또래들과 어울려 밖으로 나다녔고 많은 여자들과 문제를 일으켰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용납하지 못했고 매일같이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그 불안한 환경 속에서 밴스의 어머니는 불안한 정서를 가진 아이로 자라났다. 희망 없는 삶 속에서 밴스의 어머니는 많은 남자들을 전전하며 불안정한 가정생활을 이어갔고 마약에까지 중독되는 등 불성실한 모습을 보였다. 밴스는 이러한 일들이 개인이나 특정 가정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수많은 힐빌리들이 비슷한 과정을 일상적으로 겪는다는 여러 연구를 통해 그는 그 사실을 증명해간다.

힐빌리의 절망이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

특히 흥미로운 건 힐빌리 아이들이 대학교에 거의 진학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아이비리그 명문대를 꿈꾸지 못하고 학비가 싼 주립대 역시 언감생심으로 여기기 일쑤다. 그렇다고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며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저소득의 편한 일에 만족하거나 복지정책에 기대는 것 말이다.

<힐빌리의 노래>를 읽다보면 힐빌리들이 처한 희망 없음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밴슨은 부모의 자리를 대신 채워준 조부모의 지지, 해병대 입대를 통해 예외적인 힐빌리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일대 입학 이후 겪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오히려 힐빌리가 겪고 있는 고질적인 문화적 열등함을 확인한다. 그는 제가 성공한 엘리트로 신분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수많은 우연들이 도운 결과였단 걸 스스로 인정한다. 그것이 그가 이 책을 쓴 이유이며, 이 책이 미국 내에서 커다란 자극을 준 이유다.

한국에서도 이 책에 나온 수많은 갈등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경제적, 문화적 자산이 열등한 이들은 점차 중앙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가고 자립하는데 실패한다. 더욱이 급등하는 자산가치로 노동의 가치까지 추락하고 있다. 열심히 일해 성공을 거두는 사례보다는 일확천금을 기대하거나 일찌감치 포기하는 삶이 훨씬 더 많이 보이는 오늘이다. 벌어진 계층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반목하고 분노하며 혐오한다. 힐빌리에서 노랫소리가 끊어졌듯이 한국의 지방도시에서도 몰락의 징후들이 읽힌다.

미국이 <힐빌리의 노래>에 응답했듯이 한국 역시 우리의 힐빌리들을 찾아나서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흐름출판(2017)


태그:#힐빌리의 노래, #흐름출판, #J, D. 밴스, #김보람,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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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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