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노부모의 결혼 7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노부모의 결혼 7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 김창배

관련사진보기


혼례를 치르던 날, 신랑신부는 처음으로 서로를 만났다. 신부가 신랑의 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연애편지 한 통이 전부였다. 그렇게 시작된 부부의 연이 70년 동안 이어졌다. 고덕 용리에서 6남매 자식농사를 마치고, 이제는 소일거리로 집 앞 텃밭을 가꾸며 여생을 보내는 김칠봉(89)·권영예(90) 어르신이 주인공이다.

열아홉 신랑과 스무살 신부는 1953년 10월 백년가약을 맺었다. 자식들은 지난 19일 삽교의 한 음식점에서 70년 세월을 동고동락한 부모님을 위해 '금강혼식'을 열었다.이날 아들딸은 물론 손자손녀와 증손들까지 총출동했다.

할아버지는 무심한 듯 "돈이 많이 들어 하지 말라 했는데, 할 수 없이 끌려가다시피 했다"면서도, "그날 120명이 모였다. 동네 사람들만 모시려 했는데, 큰아들은 농협 이사여서 농협 직원들이 왔고, 둘째는 문인협회장이니까 문인들도 참석했다. 자손들이 한데 모이니까 새삼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자식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아랫동네 외사촌 누님이 우리집에 왔다가 착하고 이쁜 색시가 있으니까 얻으라고 해 만났다(할아버지)", "중매쟁이로부터 신랑될 사람이 착하고, 괜찮고, 착실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혼인하던 날 문구녕으로 머리를 빡빡 깎은 신랑을 처음 봤을 때 그냥 웃음이 나왔다(할머니)"는 노부부의 결혼이야기는 70년 전 우리나라 농촌지역 결혼풍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다.
 
???????대흥중학교 2학년 때 김칠봉 할아버지,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받은 상장을 70년 넘게 소장하고 있다.
 ???????대흥중학교 2학년 때 김칠봉 할아버지,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받은 상장을 70년 넘게 소장하고 있다.
ⓒ 김창배

관련사진보기

 
할아버지는 혼인식이 있던 1953년 6·25전쟁으로 뒤늦게 진학한 대흥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졸업도 하기 전 결혼을 서둘렀던 까닭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집안에서 미혼으로 군대에 갔다가 만일 사고를 당하면 후손을 못볼 것을 염려해 군대 가기 전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그 해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이제 막 전쟁이 멈춘 상황을 감안하면, 당시 시대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신혼 살림은 할아버지 고향이자 본가인 대흥 신속리에서 시작했다. 그러다가 1961년 집이 예당저수지 부지로 편입되면서 할머니 고향인 고덕 용리로 터전을 옮겼다. 할아버지는 "원옥(장녀)이와 인배(장남)는 걸어서, 성옥(차녀)이는 안사람 등에 업혀 40리 길을 걸어서 왔다. 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반겨주며 이삿짐을 날라줬다"며 용리 주민들의 친절함을 잊지 않았다. 

"이사를 와 첫해 가을 추수해보니 반칸짜리 토도지(곳간) 반도 안되는 15가마니였다"고 한다. 2남1녀의 장남인 할아버지는 여동생 혼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듬해 농비, 집 건축비 등을 제하면 우리 가족이 살기 막막했다. 밤에는 새끼를 꼬고, 낮에는 가마니를 쳐 용돈을 벌며 그해 가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는 고생담도 전했다.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 가장으로서 아들딸에게 정말로 미안했다. 쌀밥을 제대로 못 먹여 키웠다." 그땐 그랬다.

시부모를 모시고, 시동생을 보살펴야 했던 할머니는 "혼례를 치르니 김장할 때가 됐는데, 한복을 입고 절구에 고추를 빻으면서 눈물을 삼켰다"며 스무살 어린 나이에 겪은 시집살이를 회상했다. 그 역시 밭에서 김을 매고, 삼과 모시를 길쌈하며 넉넉하지 않은 집안살림에 힘을 보탰다.

"안식구가 허리, 다리가 많이 불편하다. 기억력이 점점 떨어져 간다"며 애틋한 마음을 전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마음씨 착하고. 담배 피우지 않고, 싸우지 않아서" 좋았던 든든한 우군이었다.

예산군청에서 민원봉사과장으로 정년퇴임한 넷째 김창배(61) 전 예산문인협회장은 자식을 키우느라 고생했던 어머니에 대한 속깊은 마음을 시어로 형상화한 시집 '어머니의 우주선'을 금강혼식에서 헌정하는 감동적인 장면도 연출했다.

그는 시집서문에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2남 4녀를 키운 이야기는 끝없이 길다. 어머니는 겨우내 삼을 말려 200자나 되는 베를 짜셨다. 이 베는 인근 마을과 지인들의 수의 옷감으로 팔려나갔다. 그 돈으로 우리의 대학 등록금과 학자금을 마련했다"는 말로 아낌없는 사랑에 고마움을 나타냈다. 
 
???????김칠봉·권영예 어르신이 장남 인배(오른쪽)씨, 차남 창배(왼쪽)씨와 손을 잡고 사진을 찍고 있다.
 ???????김칠봉·권영예 어르신이 장남 인배(오른쪽)씨, 차남 창배(왼쪽)씨와 손을 잡고 사진을 찍고 있다.
ⓒ <무한정보>. 황동환

관련사진보기

 
다른 자녀들도 각자 제 몫을 거뜬히 하고 있다고 한다. 예산자동차운전학원을 운영하는 장녀 김원옥(69), 고덕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둘째 김인배(66), 요양보호사인 셋째 김성옥(딸), 전 충남도의원이자 현재 천안시가족지원복지센터장인 다섯째 김장옥(57), 그리고 회사원인 막내딸 김성원(54)씨다.

"아버님은 한편으론 엄한 분이셨지만 한편으론 자식들이 자율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셨다"는 장남 인배·넷째 창배씨 기억처럼, 노부부의 자식교육법은 "초등학교 때는 엄하게, 그리고 그 이후엔 자율적으로"였다.

몸이 불편한 아내를 대신해 말을 이어가던 할아버지는 "소망은 다 이뤄진 것 같다.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큰 욕심은 없다. 자식들 다 컸고, 애들이 속 안썩여 좋다. 자손들이 평화롭게 해줘서 내가 오래 사는 것 같다"며 무탈하게 자란 자식과 손자 자랑을 했다.

노부부의 일과는 매일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틀에 한 번씩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몸이 괜찮을 때는 채소밭에서 상추, 오이 등 우리가 먹을 정도로 밭농사를 하고 있다"며 평범하지만 평온한 일상을 소개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혼인 건수는 19만1697건으로 1970년 통계 작성 이래 가장 적었다. 고령화, 인구감소 추세로 혼인적령기 인구가 줄었고, 주거난·취업난 등 사회·경제적 현실이 반영된 결과다. 결혼관도 점점 옅어지고 있다. 2022년 한국인 의식 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17.6%로 나타났다. 이혼도 더 이상 흠이 아닌 세상이다.

"(부부라도) 서로 듣기 싫은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6남매를 번듯하게 장성시키겠다는 삶의 목표를 세워 서로를 존중하며 한평생을 살아온 노부부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돼서도' 변함없이 옆을 지키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예산군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에서 취재한 기사입니다.


태그:#금강혼식, #백년가약, #예산군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예산의 참소리 <무한정보신문>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이젠 소 경매도 '스마트'하게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