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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4차 수출전략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4차 수출전략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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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권 행사를 적극 건의할 예정이다." -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2월 21일)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협박에 흔들리지 않겠다." -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2월 22일)


'대통령 거부권'이 가벼워지고 있다. 최근 정가에서 '대통령 거부권'이라는 말이 남용되는 탓이다. 용산 대통령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거부권 행사 가능성을 시사하는 메시지를 던진다. 집권여당도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 야당들은 "입법권 무력화"이자 "협박"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언론의 거부권 관련 보도들도 매일 쏟아진다.

국회 과반을 점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24일 혹은 27일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양곡관리법과 간호법 통과를 예고했다. 여야 쟁점 법안이지만, 국민의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임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야당은 손쉽게 해당 법안들을 가결시켰다. 국민의힘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체계 자구 심사권한을 활용해 이들 법안을 저지하려 했으나, '직회부' 카드에 막혔다. 법사위에서 60일 이상 계류된 법안을 각 상임위에서 회수해 본회의로 바로 상정한 것이다.

이미 민주당은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 역시 정의당과 손잡고 직회부할 계획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사실상 '상원' 역할을 해온 법사위마저 저지선이 되지 못하자, 여당이 기댈 곳은 여의도가 아니라 용산이 됐다. 대통령실과 정부가 앞장 서서 거부권 행사를 천명하는 이유이다.

거부권 카드 만지작하는 윤 대통령, 사실상의 선전 포고?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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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요구권, 이른바 대통령 거부권은 입법부를 견제하기 위한 행정부의 가장 강력한 수단 중 하나이자 최후의 무기다.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의 고유 권한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총 66번 발동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회와 갈등을 빚으며 45회나 거부권을 남발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후 11명의 대통령을 더 거치면서 21번 발동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대통령 거부권은 집권 정부의 이념적 지향성보다는 국회 내 여야 구도에 따라 그 빈도가 결정됐다. 전임 대통령인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한 번도 쓰지 않았고, 보수 정권이었던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도 각 1번과 2번 썼을 뿐이다. 반면, 여소야대 국면에서 행정부를 이끌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6차례, 전직 대통령 노태우씨는 7차례 썼다.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것 역시, 지금의 여소야대 국면 탓이다. 야당이 안건조정심의 같은 숙의 제도를 무력화하면서까지 여당을 '패싱'하고 추진한 데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고유 권한을 쓰는 것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그러나 본회의 상정은커녕 상임위원회에 법안이 머물러 있는 단계에서부터 '거부권'을 시사하는 건 대단히 이례적이다. 사실상 '해볼 테면 해봐라' 수준의 선전포고다.

야당은 야당 나름대로 할 말이 많다. 간호법은 지난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여야 공통의 공약이었다. 양곡관리법은 농민 단체의 숙원 중 하나일뿐더러, 노란봉투법을 논의하는 과정에는 애초에 국민의힘이 제대로 참여하지도 않았다. 언제까지 여당의 '지연 전술'에 민생과 관련된 법안들을 발목 잡힐 수는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국민의 손으로 선출되어 다수 의석을 점한 원내 제1당의 권한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권과 야권의 대치가 계속되면서 토론과 타협의 정치는 사라지고 정쟁만 남게 됐다. 여기에 대통령실 역시 여야 협상의 물꼬를 트는 대신, 힘으로 입법부를 맞상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의사당 내 갈등이 용산과 여의도의 갈등으로까지 번져나가고 있다. '민생을 챙기겠다'라며 임시국회를 계속 열고 있지만, 이러한 대결 구도 탓에 정작 국회는 개점휴업 상태이다.

여당 "칼은 칼집에 있을 때 위력"이라더니... "사실상 국회 무시 처사"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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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대통령실이 '거부권' 언급을 남발할수록, 거부권의 중량감은 떨어지고 정치적 함의는 옅어진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해 9월, "칼은 칼집에 있을 때 위력이 있고, 칼을 꺼내서 휘두르면 효과가 떨어진다"라며 민주당의 장관 해임 건의안 발의를 비판한 바 있다. "해임건의안을 전가보도처럼 휘두르면 국민들의 피로감만 높아지고 자칫 잘못하면 해임 건의가 희화화가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라는 것. 국회의 고유 권한인 해임건의안에 대해서 '남용하면 안 된다'라고 지적했던 여당의 논리가 '대통령 거부권'에는 적용되지 않는 셈이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국회로 되돌려 보낸 법안이, 국회에서 재의를 거쳐 가결된 사례는 헌정사상 아직 한 번도 없다. 재적의원 과반 출석에 3분의 2 이상 찬성표가 나와야만 통과된다는 '조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행정부의 견제 권한을 입법부가 그간 존중해 온 영향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거부권이 '희화화'된다면, 헌정 사상 첫 사례가 이번 국회에서 생기지 말란 법이 없다.

169석의 민주당이 무소속 친민주당 성향 의원들, 기본소득당 같은 위성정당 소속 의원들, 그리고 정의당과 손잡는다면 '3분의 2' 벽을 넘을 수 있다. 국회가 재의한 법안은 대통령이 거부할 수 없다. 15일 이내에 대통령이 공포하지 않으면, 국회의장이 직권으로 공포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일단락되는 게 아니다. 다음 총선까지 쟁점 법안들마다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며 국민의 피로감이 커지고, 정치가 실종된 자리를 혐오가 채우게 되는 게 더 큰 문제이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소장은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양극화되면서 퇴행하는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라며 "양측이 자신들의 지지층만 바라보는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가시화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국민의힘과 협상을 진행할 생각이 없고,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의 '친정 체제'가 강화되면서 용산과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는 특히 "과거 DJ나 YS 같은 전임 대통령들 같은 경우, 여야 경색 국면에서 타협안을 만들어 내거나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런 모습이 실종됐다"라며 "국무회의에 안건이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재의 요구를 운운하고, 거부권 행사를 시사하는 뉘앙스를 계속 풍기는 건 사실상 국민의 대표인 국회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태그:#윤석열, #대통령, #거부권, #국회, #재의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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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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