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5 19:59최종 업데이트 23.02.25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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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를 비롯한 라틴어에서 카페(Café)는 커피를 의미하는 동시에 커피와 음식을 파는 장소도 뜻한다. 반면 영어권에서 커피는 coffee라는 별도의 용어를 얻었고, 카페는 커피를 파는 장소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는 미국을 따라 커피와 카페를 구분하여 쓴다.

최근 우리나라의 카페 숫자가 10만 개를 넘어섰고, 커피 시장 규모가 10조 원을 돌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 1인당 커피전문점에서의 커피 소비액이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것은 이미 5년 전이다. 커피공화국이고 카페 천국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


음식을 주문하지 않고 커피만을 마시면서 몇 시간을 머무를 수 있는 안전하고 편안한 카페가 즐비한 것이 우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서양인들이 보기에는 진기하고 부러운 장면이다. 서울은 휴대전화나 가방 혹은 옷으로 자리를 맡아 놓고 커피를 주문하러 가거나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이 불안하지 않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대도시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의 카페 문화는 이렇듯 매우 활발하고 독특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이런 한국의 카페 문화는 인터넷을 통해, 유튜브를 통해 세계인들에게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한국의 다양한 카페를 방문하고 체험하는 것은 하나의 통과 의례가 되었다. 외국인이 한국을 유학이나 장기 체류의 대상 국가로 선정하는 데 나름 기여하는 것 중 하나가 편안하고 아늑한 카페의 존재다.

일제강점기 카페 전성 시대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카페는 언제 등장했고, 어떻게 하나의 문화로 성장하기 시작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카페라는 명칭의 업소가 처음 등장한 것은 나라가 망한 이듬해인 1911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12년 전이다. 압록강 철교가 개통되어 반도가 대륙과 연결되던 해였다. 퀴리 부인이 노벨화학상을 받아 세상을 놀라게 한 것도 이 해였다.

이 해에 일본 도쿄에 카페라는 명칭의 업소가 처음 등장하였다. 음식을 먹으며 커피를 즐기던 끽다점과는 다른 업소였다. 카페에는 깍다점과 달리 커피와 음식뿐 아니라 술과 여자 종업원이 있었다.

1911년 봄에 등장한 일본 최초의 카페는 '카페 프랭탕'과 '카페 라이온'이었다. 흥미롭게도 같은 해 가을 우리나라의 남대문통 3정목(남대문로3가)에도 카페가 등장했다. '카페 타이거'였다. 첫 카페의 이름에 일본은 저들이 좋아하는 동물 사자를, 조선은 우리가 좋아하는 호랑이를 붙였다는 것이 흥미롭다. 조선 최초의 카페 '카페 타이거'가 문을 열었다는 역사를 기록한 것은 일본인으로 당시 본정(명동과 충무로 일대) 경찰서장이었던 고마츠였다. 경찰 잡지인 <경무휘보>에 기고한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라는 망했고, 의사 안중근이 사형을 당하고, 주미 공사와 주러시아 공사를 지냈던 이범진이 러시아 땅에서 수치심을 못이겨 자결했어도 카페는 여기저기에 나타났고 나름 흥했다. 당시 카페 풍경은 신문 지상에 자주 보도되었다.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탑동 카페'가 문을 열었다는 기사가 <매일신보> 1914년 6월 7일 자에 큼직한 사진과 함께 실렸다. 당시 30만 명의 경성 시민을 잠재적 고객으로 생각해서 이 카페를 열었다는 것이 명동 청목당 요리사 출신 사장의 개업 취지였다.

당시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요리점에서 조선인 고객에게 불친절한 점을 통한하게 여긴 주인이 '값은 저렴하게, 조선인에게 친절하게'를 구호로 내걸고 문을 열었다. 본인 뜻대로 조선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는지, 이 카페의 성패는 알려진 바가 없다. 주인이 조선인이었는지 일본인이었는지도 알려지지는 않았다.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불친절을 말한 것을 보면 용기 있는 조선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강점기 건물을 카페로 만든 군산의 '미즈 커피' ⓒ 이준호


카페가 많아지고, 일하는 여급(女給)이 증가하며 이런저런 사건이 자주 신문에 보도되었다. 1925년 7월 6일 <매일신보>는 서울의 앵정정(현재의 인현동)에서 자정이 넘은 시각에 여급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경찰이 출동하고, 결국 두 명의 여급 모두에게 3원씩의 과태료를 부과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 기사는 당시 시내 카페에서 너무 문란한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음을 개탄하였다. 카페 여급이 정부와 도주하는 사건도 끊이지 않았다.

카페는 풍기 문란의 온상이었을 뿐 아니라 아편 밀매에도 관여하였다. 본정 3정목에 있던 '다란데라 카페'의 주인이 다량의 마약을 거래하다 적발되었는데 이 사건이 확대되어 가택을 수사하기에 이르렀다는 기사도 있다. 개인의 사생활 공간인 가택 수사는 죄가 엄중하고 명확함을 보여주는 증좌(證左)였다. 포악한 일제 강점기에도 명확한 증거 없이 죄를 만들기 위해 하는 일이 가택 수색은 아니었다. 아편 밀매의 주인공은 일본인이었다. 카페에서 일어난 아편 밀매 소식은 <중외일보> 1927년 7월 22일 자, 8월 4일 자에 연이어 보도되었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서울과 함께 부산은 이미 카페 도시였다. <부산일보>는 1916년 1월 15일 자에서 부산에 있던 '카페 에비스'의 밤 풍경을 매우 흥미롭게 묘사하였다. <부산일보> 1925년 5월 24일 자에는 부산에 있던 '카페 런던'이 확장 개업한 소식을 전하였는데, 연회장 규모가 60명을 수용할 정도였고 여급이라 불리던 웨이트리스를 12명이나 두었다고 한다.

100여 년 전 우리가 경험한 세상

<부산일보> 1927년 10월 10일 자 사회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근대인의 요구? 느낀 대로 행하는 것: 부산 카페의 신경향'이었다. 미카도 등 부산 지역 카페를 중심으로 보이는 새로운 밤 풍경을 소개하고 있다. 재즈 음악을 듣고, 자유를 만끽하는 신세대에게 점령당한 1920년대 후반 부산의 모습이다. 1927년 6월 8일 자 <부산일보>는 대구 시내 카페를 돌아다니며 절도 행각을 벌인 7인조 미남자(美男子)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훗날 7공자 사건을 떠올리는 장면이다.

카페는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에만 있지는 않았다. 새로 발전하는 천안, 남포, 군산, 마산 등에도 카페는 우후죽순 격으로 생겼다. 요즘과 다르지 않았다.

카페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막기 위해 단속이 심하게 벌어지고, 카페 업주를 상대로 한 교육도 이루어졌다. 1927년 6월 15일 자 <중외일보>를 보면 지금의 명동 일대인 본정을 관할하는 경찰서에서는 카페 영업자 53명을 모아 놓고 경찰서장이 두 가지 점을 엄중하게 당부했다. 첫째, 고녀(웨이트리스)로서 손님 좌석에서 가무음곡을 하지 못하게 할 것, 둘째, 고녀로서 손님의 음식 대금을 보증시키거나 그를 지불하는 책임을 지게 하지 못할 것이었다.

일본 카페 풍경도 당시 신문에 등장하는 단골 기사였다. 1923년 6월 12일 <매일신보>는 동경의 카페 문화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동경 시내는 말할 것도 없고, 시외라도 장소를 막론하고 카페 간판 없는 곳이 없다고 당시 분위기를 묘사하였다. 유명한 카페 라이온, 카페 아메리카를 상세하게 소개하는 기사도 실렸다.

1920년대는 세계적으로 광란의 시대, 재즈의 시대, 역동의 시대라 불린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경제 호황, 사회주의 혁명이 불고 온 자유의 물결이 넘치던 때였다. 카페를 보면 이런 모습은 당시 일본이나 조선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었다. 나라는 망해도, 카페는 융성했다. 100여 년 전 우리가 경험한 세상이었다.

(유튜브 '커피히스토리' 운영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매일신보, 부산일보, 중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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