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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가 담긴 시어머니가 쓰시던 그릇을 그림으로 남김.
 막걸리가 담긴 시어머니가 쓰시던 그릇을 그림으로 남김.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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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꼼짝없이 늙어가네."

그녀의 표현이 그렇다. 가끔 통화할 때마다 늘 걱정 반 푸념 반이다. 사는 일의 고달픔과 미래의 불투명함이 발목을 잡는다고. 그래도 건강만 하다면 그럭저럭 벌어먹을 현실이 괜찮은데, 나이가 있다 보니 어깨며 무릎, 치아까지 말썽이라고 한다.

70년 대 온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향할 때는 큰 꿈이 있었다. 보란 듯이 잘 살아내서 서울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고향에 있는 피붙이들에게 뭔가 희망을 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서울살이가 그리 만만하던가. 잘 나갈 때도 있었고 좌절의 시간도 있었다. 누구나 겪었던 IMF, 얼마나 많은 삶의 부침(浮沈)이 있었나. 그래도 건강하게 잘 헤쳐왔는데 세월은 때로 느닷없는 한파를 때려 봄날을 기약할 수 없게 만들곤 했다. 

2000년까지만 해도 그녀가 고향에 내려올 때는 온 집안이 떠들썩했다. 소소하지만 가족들 선물도 일일이 챙겼고, 떠들썩하게 서울살이를 얘기할 때는 듣기만 해도 설렜다. 어찌나 살아가는 얘기를 실감 나고 맛깔나게 하는지 가족들은 서울에 대한 동경도 품었다.

서울 체험하라며 나 역시 그녀의 집에 두 아이를 보름 동안 올려보낸 적도 있다. 그녀는 누구라도 꿈을 펼치며 살고 싶도록 희망으로 이끄는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다. 세상사에 거침없었다. 사람과 정을 낼 줄 알았으며 작은 것이라도 챙기며 마음도 넉넉하게 쓸 줄 알았다. 상담사가 되어 줄 만큼 여기 저기서 형수님, 언니, 하며 정을 내는 이웃이 많았음은 물론이다. 그녀는 서울에서도 많은 사람에게 인생 맏이 역할을 하며 살았다.
  
막걸리에 어울리는 채소와 파, 새우를 다져 넣은 파전
 막걸리에 어울리는 채소와 파, 새우를 다져 넣은 파전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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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피지 않는 살림, 노력이 통하지 않는 팍팍한 현실에 저당 잡힌 그녀의 몸과 마음이 이제는 지쳤는가 보다. 먼저 전화해 안부를 묻곤 하던 그녀가 연락마저 뜸하다. 작년 겨울 때쯤 통화에서 요즘은 좀 어떠냐고 물으니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요즘 트로트 프로그램을 보다가 가수 강진이 부르는 '막걸리 한 잔'을 듣는데 왜 내 얘기만 같은지 그 노래만 몇 번이나 찾아들었어. 내 맘 같아 위로되고 틀린 말 하나 없더라. 어째 막걸리 한 잔에 내 생이 다 들었다니."

나 역시 '막걸리 한 잔' 노래를 들으면 부모님 생각이 난다. 삶이라는 게 어디 서울살이만 힘들까. 내 부모 역시 고단한 삶을 사셨다. 성실함 하나 믿고 인생이라는 터전에 몸을 담갔으나 해도 해도 피지 않는 살림과 나아질 기미 없는 현실은 서울이나 지방 시골이나 어촌 할 것 없이 다 마찬가지다.

'황소처럼 일만 하셔도 살림살이는 마냥 그 자리'란 가사를 들으면 까닭 없이 뭉클하며 그 대목에서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부모를 비롯해 세상 사람들의 삶의 애환과 고달픈 현실을 떠올리며 잔잔하게 눈물 한 줄기 흐르게 하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를 듣는 이유도 제각각이고 노래를 받아들이는 일도 다 제 처지와 상황에 따라 듣는 것 같다.

그녀 나이 70이 훌쩍 넘었다. 아직 얼마든지 인생을 누릴 나이다. 다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마음이라도 편히 살면 안 되겠냐고 말을 하지 못한다. 평생을 서울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이 이곳에서 산다고 별 뾰족할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고 그녀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떠난 시골이 뭐 더 나을까 싶기도 하고, 타인의 삶에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거니와 결정은 본인이 하는 것이다.

지금껏 아니 평생을 산 서울살이가 다 나쁘기만 했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좋았던 날이 더 많았을 것이고, 정서적으로는 서울이 그녀에게 훨씬 나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청춘과 삶을 고스란히 바친 곳, 기쁨과 눈물, 한숨과 뿌듯함, 온갖 삶의 이유가 뒤섞인 곳, 그곳이 곧 그녀가 살아내야 할 공간이며 존재 이유가 될 수 있으니.

학교 선배이기 전에 그녀는 내게 강인한 의지와 그 어떤 상황이 와도 좌절하지 않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르쳐준 인생 선배이다. 항상 소리 내어 웃는 웃음을 가지고 사는 그녀의 밝음에 고단한 얼룩이 져 있으나 그래도 상관없다고, 어디 밝음만 있는 게 삶인 거냐고, 굴곡진 그녀의 삶이기에 더 멋지고 아름답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얼굴 못 본 지 한참이다. 언젠가 만나면 거친 손 한 번 잡아주고 싶다. 이제는 자신만을 위해서 좀 살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도 잊지 않고 해야겠다.
  
언젠가 그녀와 마주앉아 함께 마시고 싶은 막걸리
 언젠가 그녀와 마주앉아 함께 마시고 싶은 막걸리
ⓒ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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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엄마 같은 사람, 건강한 육신 부대껴 일하는 것은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말하던 사람, 언제나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사는 사람인 그녀가 온 가족을 이끌고 처음 서울 땅을 밟았을 때를 돌아보며 한바탕 크게 웃어제끼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나 괜찮아. 이만하면 됐지 뭐. 후회 같은 건 없어."

'막걸리 한 잔'이라는 노래가 그녀를 눈물짓게 하는 노래가 아니라 여한이 없이 살아낸 자가 부르는 삶의 송가(頌歌) 같기를 바라는 바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서울살이, #애환, #트로트, #막걸리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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