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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중 부실한 의료체계로 목숨을 잃은 고 홍정기 일병의 어머니 박미숙씨가 지난 14일 아들의 순직 유형 재심의를 요청하기 위해 국방부를 찾았다.
 군 복무 중 부실한 의료체계로 목숨을 잃은 고 홍정기 일병의 어머니 박미숙씨가 지난 14일 아들의 순직 유형 재심의를 요청하기 위해 국방부를 찾았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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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중 부실한 의료체계로 인해 목숨을 잃은 고 홍정기 일병에 대해 법원이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내용으로 화해를 권고했다. 특히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뿐만 아니라 유족에 대한 애도와 위로, 재발방지 노력 등의 내용도 화해권고결정문에 담겼다. 원고(유족)가 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상황에서 피고(대한민국)의 법률상 대표자인 한동훈 법무부장관의 판단만 남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1단독(부장판사 김태균)은 홍 일병 유족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화해권고결정문을 지난 10일 양측에 전달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피고 대한민국은 망인의 사망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며 유족인 원고에게 깊은 애도와 위로를 전한다. 대한민국은 향후 망인의 사망과 같은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원고에게 약속한다.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인 유족에게 2500만 원을 2023년 3월 31일까지 지급한다. 

법원은 '소송 청구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사건의 공평한 해결을 위해(민사소송법 225조)' 화해권고를 결정할 수 있다. 법원이 쓴 화해권고결정문에 대해 양측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재판상 화해(합의로 재판 종결) 및 확정판결의 효력을 갖는다.

'유족 고통' 고려해 판결 대신 화해 택한 법원

법원의 이번 화해권고결정문은 손해배상 책임뿐만 아니라 '국가의 책임과 역할'에 대한 내용까지 담겼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당초 유족이 요구한 손해배상 책임에서 법원이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법원이 판결 대신 화해권고를 이끌었다는 점 또한 의미가 깊다. 판결의 경우 항소·상고의 가능성 때문에 소송이 매우 길어질 수 있는 데 반해, 화해권고는 양측이 받아들이는 즉시 소송이 마무리된다.

때문에 공판 과정에서 재판부는 '소송이 장기간 이어질 경우 배가될 유족의 고통'을 언급하기도 했다. 화해가 성립되더라도 이미 홍 일병이 숨진 때(2016년 3월)로부터 7년, 유족의 소송 제기 시점(2019년 3월)으로부터 4년이 지난 상황이다.

지난 13일 화해권고결정문을 받아든 원고(유족)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피고(대한민국) 측엔 지난 21일 화해권고결정문이 도달했다. 피고 측이 3월 7일까지 이의를 신청하지 않으면 화해가 성립된다(이의 신청 가능 기간 2주). 피고 측 법률상 대표자는 한동훈 법무부장관이다.

홍 일병은 2015년 8월 입대해 2016년 3월 24일 급성 뇌출혈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건강한 상태로 입대했을 뿐만 아니라 2015년 11월 체력검정에서 '특급'을 받을 정도로 신체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던 중 홍 일병은 구토, 두통, 어지럼증, 목과 입안의 통증, 몸의 멍과 반점 등 급성 골수성 백혈병 증세를 보였다. 하지만 각급 의무대는 응급 후송은커녕 병실이 없다는 이유로 홍 일병을 부대로 돌려보내거나 두통약만 처방하는 등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민간 병원에서의 '혈액암 가능성' 소견에도 홍 일병은 별다른 조치를 받지 못했다.

고통을 호소하던 중에도 단독군장을 한 채 부대에서 사단작계전술훈련에 임하던 홍 일병은 결국 상태가 심각해져 인근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치료의 때를 놓쳐버렸다. 유족은 홍 일병이 2016년 3월 6일 처음으로 이상 증세를 호소한 점과 급성 골수성 백혈병 특성을 고려해 같은해 1~2월을 발병 시점으로 보고 있다. 사망 날짜가 3월 22일이니 홍 일병은 짧게는 2~3주(증세 호소 날 기준), 길게는 1~2개월(발병 시점 기준) 동안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목숨을 잃고 말았다.

홍 일병 사망 후 유족은 군 의료시스템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왔고 '국방개혁 2.0'에 담긴 민간병원 이용 절차 간소화 등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끝나지 않는 싸움... '홍 일병 예우' 두고 버티는 군
 
고 홍정기 일병의 군번줄.
 고 홍정기 일병의 군번줄.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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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 외에도 홍 일병 예우를 위한 싸움을 7년째 이어오고 있다.

2016년 9월 육군(보통전공사상심사위원회)은 홍 일병의 사망을 '순직3형'으로 분류했다. '군인사법'은 순직3형을 "국가의 수호·안전보장 또는 국민의 생명·재산 보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직무수행이나 교육훈련 중 사망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 유족은 홍 일병 사망이 '순직2형(국가의 수호·안전보장 또는 국민의 생명·재산 보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직무수행이나 교육훈련 중 사망한 사람)'에 해당한다고 반박해왔다. 사단작계전술훈련, 진단 및 치료 부실 등 부대 상황으로 인해 홍 일병이 사망했다는 판단 때문이다.

유족뿐만 아니라 1년 7개월 간 이 사건을 조사한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대통령 소속)도 2020년 9월 홍 일병 사망을 순직2형으로 변경하도록 군에 권고했다.

그러나 국방부(중앙전공사상심의위원회)는 2021년 3월 유족의 재심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발병이 군 복무와 직접적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다른 백혈병 사망 군인들도 모두 순직3형으로 결정됐다' 등이 주된 논리였다.

군인권센터(소장 임태훈)는 당시 "모든 백혈병 환자가 급성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하지 않는다. 백혈병인 것을 알고 치료를 받다 사망한 것과 백혈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사망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라며 "때문에 이 사건을 단순한 질병 사망으로 볼 수 없다. 군은 고인의 사망 사유를 비틀어 고인과 유족을 우롱하며 모든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홍 일병의 어머니 박미숙씨는 지난 14일 국방부를 찾아 다시 한 번 순직 유형 심의를 요청했다.

박씨는 재심사 요청 전 <오마이뉴스>와 만나 "우리 아이가 떠난 지 벌써 7년이다. 그동안 제가 요구한 것은 '우리 아이를 명예롭게 보내고 싶다'는 것 하나뿐이었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싸우고 있다"라며 "군이 스스로 나서 예우를 다한다 해도 유족은 가족을 잃은 마음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 왜 자꾸 군이 유족을 사지로 몰아넣는지 원통할 뿐"이라고 호소했다.

이어 "나라 지키러 군대에 간 아이들, 국가를 믿고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들이 최소한 억울한 일은 겪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데려갈 땐 '대한의 아들'이라면서 죽고 나면 내팽개치는 게 지금의 군대"라며 "이런 상황인데 누가 군대에 가고 싶겠나. 어쩌면 군이 스스로 병역비리를 양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지적했다.

태그:#홍정기, #일병, #군인, #의료과실, #법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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