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6 11:14최종 업데이트 23.02.28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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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교 위에서 내려다 본 임진강. ⓒ 성낙선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마지리에 아침부터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다. 자전거여행을 계속 해야 할지 말지 망설여진다. 어제 5코스 여행을 마친 데 이어, 바로 6코스를 여행할 예정이었다. 일기예보를 보고 눈이 올 줄은 알았지만, 함박눈이 내릴 줄은 몰랐다. 일기예보를 보면, 적설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일기예보를 보고 눈이 잠깐 내리다 말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눈이 내릴지 알 수 없다. 창밖을 내다보니, 세상이 온통 뽀얗다. 이 눈이 언제 그칠지도 알 수 없다. 시간이 자꾸 흐른다. 눈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는 너무 늦을 수도 있다. 오늘 가야 할 길이 결코 만만치 않다. 임진강을 따라서, 장남교에서 군남댐까지 약 40km를 달려야 한다. 결국 자전거를 끌고 눈이 내리는 길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선다.

그나마 날이 따듯한 편이어서 다행이다. 도로 위로 눈이 쌓이지는 않는다. 천천히만 달리면, 눈 위에서 미끄러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6코스에서는 자전거도로가 주로 임진강이나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지천의 제방 위를 지나간다. 자전거도로가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곧게 뻗어 있다. 이것만 보면, 길이 꽤 편안해 보인다.
 

하천 제방 위를 지나가는 평화누리 자전거길 6코스. ⓒ 성낙선

 
하지만 6코스는 이게 전부가 아니다. 6코스는 동쪽으로 가까워질수록 고갯길이 자주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이곳에서부터 동고서저 지형이 뚜렷해지는 걸 볼 수 있다. 고개들이 비교적 길고 높은 편이다.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험한 고갯길 같은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웬만해서는 쉽게 오르내릴 수 없다. 미리 각오를 하는 게 좋다.

이들 고갯길에도 자전거도로가 개설돼 있다. 평화누리 자전거길은 설계가 매우 잘 되어 있는 편이다. 고갯길 한쪽으로 자전거들이 오갈 수 있는 도로가 따로 있다. 그러니 무작정 찻길로 들어서서 위험을 불사할 필요가 없다. 언제 어디서든 '안전'이 우선이다. 이날 종일 눈이 내렸다면, 중간에 여행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다행히 오전 9시가 좀 넘었을 무렵, 눈발이 잦아들기 시작한다.
 

왼편으로 고갯길을 오르는 자전거도로가 보인다. ⓒ 성낙선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선사시대 유적들

장남교 위에서 내려다보는 임진강이 매우 고요하다. 강변으로 인간이 만든 구조물 같은 것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의 손때가 묻은 흔적이 거의 없다. 한강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풍경이다. 파주시에서 줄곧 보았던 철조망도 이곳에서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강변이 온통 하얗다. 강변을 잠식한 잡다한 풀들과 나무들 위로 눈이 내려서 한결 더 평온해 보이는 풍경이다.


임진강이 폭이 제법 긴 편이다. 장남교 위를 자전거를 끌고 걸어서 건너는데 꽤 시간이 걸린다. 다리 길이가 500m가 넘는다. 장남교는 2012년 9월 다리를 건설할 당시 마지리 쪽에 접한 상판 한 개가 무너져 내리면서 작업 중이던 노동자 십수 명이 사망하거나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던 곳이다.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장남교를 넘으면 바로 연천군이다. 연천군은 선사시대 유물을 많이 접할 수 있는 지역이다. 전곡리에 가면 한탄강변에 선사유적지가 있다. 통현리 등에는 고인돌 여러 기가 산재해 있다. 우리나라는 원래 고인돌이 많기로 유명하다. 전 세계 고인돌 중 약 40%가 한반도 곳곳에 분포해 있다. 고창군, 화순군, 강화군 등이 고인돌이 많은 지역으로 꼽힌다. 연천도 그들 지역 못지않다.
 

연천 학곡리 고인돌. ⓒ 성낙선


연천에만 총 13곳에 모두 31기의 고인돌이 분포해 있다. 그중 고인돌이 가장 많은 통현리에 '고인돌 공원'이 조성돼 있다. 지역 내 고인돌을 보존하고 관리할 목적으로 만든 공원이다. 이 공원에서만 모두 16기의 고인돌을 볼 수 있다. 나머지는 여전히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다. 연천에 있는 31기의 고인돌 중 하나가 자전거길이 지나가는 학곡리, 임진강변의 작은 마을 안에 있다.

아담한 크기의 고인돌이 길가 주택들 사이 잔디밭 안쪽에 얌전히 앉아 있다. 덮개돌의 길이가 2.8미터, 너비가 2.7미터다. 실상 그렇게 작은 건 아니다.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이라서, 얼핏 보면 그냥 돌로 만든 작은 탁자처럼 보인다. 그 앞에 세워 놓은 고인돌 표지판을 보지 못하면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 고인돌은 예전엔 어느 집 뒷마당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 집을 헐어내고 마당에 고인돌만 남겨 놓은 상태다. 마당 둘레에는 여전히 다른 주택들이 남아 있다.
 

연천 학곡리 적석총. ⓒ 성낙선

 
숭의전 새소리... 길조인가, 흉조인가?

고인돌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적석총이 누워 있다. 강변 언덕에 검은 돌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적석총은 "백제의 건국과 관련된 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길가에서 흔히 보는 돌무더기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단순히 돌을 모아다 쌓아놓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흔한 돌무더기가 아니다.

물에 씻겨 둥글게 모가 깎인 강돌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 검게 변색이 되어 있다. 그 세월이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적석총 앞 안내문에 따르면, 이 적석총은 "원래 크기는 25x10m 정도로 추정되나 잦은 강물의 침범과 주변 개발로 파괴되면서 무덤의 상당 부분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긴 타원형으로 만들어졌고, 크기도 결코 작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그 절반도 안 되는 크기로 남아 있는 셈이다.

숭의전지를 향해 가는 길에 고개를 하나 넘는다. 가파른 고개다. 고개 중간에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올라간다. 다행히 고개 왼편에 따로 자전거도로가 조성돼 있다. 고갯길을 느린 속도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자전거들의 안전을 고려한 도로다. 이런 자전거도로는 여기서 처음 본다. 덕분에 사납게 뒤쫓아 오는 자동차들에 쫓기는 일 없이 쉬엄쉬엄 천천히 고개를 넘을 수 있다.
 

숭의전지 앞, 절벽 위에 서 있는 느티나무 두 그루. ⓒ 성낙선

       
숭의전지는 "고려의 태조 왕건을 비롯하여 나라를 부흥시킨 4명의 왕들과 고려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사당"이다. 사당이 건립된 건 조선 초기다. 조선 초기에 고려 왕들과 충신들을 위한 사당을 지은 게 의아하다. 사라진 왕조의 지도층을 회유할 목적으로 사당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 왕조의 비극이 이 사당에 서려 있다. 사당이 궁벽진 마을, 임진강 높은 절벽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도 쓸쓸한 정경을 더한다.

숭의전 앞에 수령이 600년인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게 보인다. 그 모습이 능히 숭의전을 지킬 만하다. 안내문을 보니 "이 나무에 까치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나며, 까마귀가 모여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고 한다. 그 대목을 읽고 있을 때 문득 어디선가 새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까치 같기도 하고 까마귀 같기도 하다. 아직도 갈 길이 먼데, 이건 과연 길조인가 흉조인가?

온몸으로 체감하는 역사 속 흥망성쇠

숭의전을 나서자마자 또 언덕을 오른다. 숭의전 앞에서 내가 들은 새소리가 그저 까치이기를 바랄 뿐이다. 가는 길에 당포성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당포성이 자전거길에서 살짝 비켜난 곳에 있어 들렀다 갈지 말지 살짝 갈등이 인다. 당포성이 위치한 곳이 평지면 별 고민이 되지 않을 텐데, 아쉽게도 언덕 위다. 오는 길에 언덕 위에서 잔뜩 힘을 뺀 뒤라 마음을 정하는 게 쉽지 않다.
 

당포성. ⓒ 성낙선

 
당포성은 임진강과 당개 샛강이 만나는 수직 절벽 위에 올라서 있는 고구려성이다. 절벽의 높이가 20여m에 달해 강 쪽에서는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다. 임진강과 샛강 쪽이 모두 절벽이라 그쪽으로는 따로 성을 쌓지 않았다. 원당리에 있는 호로고루성도 비슷한 입지를 갖추고 있다. 연천 일대 고구려성이 가진 특징 중에 하나라고 한다. 성은 비슷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당포성이 호로고루성보다 훼손이 더 심하다.

성 밑 여기저기에 참호가 들어서 있다. 삼국시대에 개성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성이었다고 하니까, 현대에 와서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던 게 아닌가 싶다. 성 뒤로 송전탑이 지나가는 것도 눈에 거슬린다. 당포성이나 호로고루성이나 성 자체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도 비슷하다. 그러나 호로고루성이 유명 관광지로 급부상하는 동안에 당포성은 제 자리를 걸었다.
 

연천 삼거리 유적. 너른 들판에 낡은 안내판과 송전탑만 눈에 들어온다. ⓒ 성낙선

 
6코스 종착지인 군남댐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또 다른 유적지 앞을 지나간다. '연천 삼거리 유적'지다. 그런데 낡고 퇴색한 안내판뿐, 어디서 유적지를 찾아봐야 할지 알 수 없다. 근처 둔덕 위에 고인돌인 듯싶은 넓적한 돌이 하나 얹혀 있다. 하지만 고인돌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안내판에는 이곳에서 "1999년에 긴급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신석기시대 및 청동기,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유적이 확인"되었다는 글이 적혀 있다.

연천군에 유적지들이 차고 넘친다. 학곡리 고인돌과 적석총, 당포성 등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DMZ 접경지역으로 군사도시인 줄만 알았던 연천이 원래 이런 곳인지는 미처 몰랐다. 6코스를 여행하는 동안,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나라가 세워졌다 무너지고, 얼마나 많은 마을이 생겨났다 흩어졌을지 알 수 없다. 평화누리 자전거길 6코스에서, 역사 속 흥망성쇠를 온몸으로 체감한다. 멀리 군남댐이 어느 고대국가에서 세운 거대한 성곽처럼 보인다. 목적지가 코앞이다. 남은 힘을 다해 달린다.
 

군남댐.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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