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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연극으로 데뷔해 영화와 연극, 드라마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 김지성의 사는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영화 <우수> 촬영 때의 일이다. 모처럼 가진 회식자리에서 마주 앉아 있던 오세현 감독님이 갑자기 옆자리의 여자분을 검지손가락으로 툭 가리키며 사촌누나라고 소개했다.

촬영지 춘천이 옆동네도 아니고, 나는 이제 길가다 사촌 얼굴도 못 알아보겠는데, 단지 사촌동생의 영화 응원차 지방까지 왔다고? 심지어 아까 조문객으로 잠깐 출연도 했단다.

여리디 고운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넨 감독님 사촌누나의 첫인상은 누가 봐도 전형적인 사촌누나의 모습 그대로였다. 서로 닮은 얼굴을 마주하고 사촌간의 티키타카식 대화가 사촌누나의 이미지를 더 찰떡같이 달라붙게 했고, 각 잡힌 데 없는 헐렁한 아우터 차림은 프로페셔널한 커리어우먼이기보다 전업주부에 가까워 보였다.

단역 출연에 대본까지 수정?
 
영화 <우수> 현장사진
 영화 <우수> 현장사진
ⓒ 김지성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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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초면은 낯가림을 좀 타시는지 대화중에도 연신 쑥쓰러워 하시길래, "말씀 편하게 하세요~!" 하던 차에 감독님이, "이번에 사촌누나가 우리 영화 대본 수정해 줬어요"라고 말했다.

순간 당황해서 커진 동공이 상대에게 결례가 되진 않았는지. 저기, 전업주부 아니셨어요...? 아, 그건 오로지 내 생각이었지. 근데, 영화에서 회자된 무심하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내뱉던 개성있는 대사들을 지금 여기, 누가 봐도 코스모스 소녀 같으신 사촌누나가 손보셨다고요...?

벌어진 입을 여즉 다물지 못하자, 감독님도 살짝 수습이 필요했는지 사촌누나 전공이 교육학이라고 했다. 혹시 맞춤법을 수정해 주셨나? 좀전에 감독님이 자기 한국말이 서툴러서 부탁했다잖아. 근데, 감독님 한국분이신데?

이미 초반에 '사촌누나표 선입견 콘크리트'를 머리 속에 잔뜩 부어버린 터라 도중에 첨가된 캐릭터 소재가 섞일 리 만무했다. 이미 고정틀에 견고하게 굳어버려 갈라질 틈은 보이지 않았다. 중장비용 드릴 정도면 모를까.

이때 빠지직, 저절로 균열이 생길 사촌누나의 다음 얘기. "저도 사실은... 소설 써요." 이젠 듣지만 말고 물어야 할 때다. 책을 어디서, 어떻게 쓰셨는지, 단순히 취미로 쓰시는 건지, 등단을 하신 건지.

책 제목이 뭐냐고 물어보자, 금세 홍조된 볼과 부끄럼 타는 듯한 음성으로 "<개 다섯 마리의 밤>이요...!"라고 하신다. 역시 제목에서 연상되듯, 개 다섯 마리가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 떠나는 따뜻하고 순수한 작품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글은 사람을 닮는다 하지 않았는가.

쓸쓸한 한숨을 쉬게 되는 소설
 
책 <개 다섯 마리의 밤>에는 개 다섯 마리가 나오지 않는다.
 책 <개 다섯 마리의 밤>에는 개 다섯 마리가 나오지 않는다.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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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읽어보겠다던 약속은 해를 넘기고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즈음에야 지켜졌다. 첫 장을 넘긴 순간, 1라운드 땡! 소리와 함께 링 위의 복서가 상대에게 설렁설렁 다가갔다가 순식간에 어퍼컷 한 방 맞고 바닥에 뒹굴만한 충격이 글 위에 펼쳐졌다. 이어 쉴새없이 날아든 잽 융단 폭격에 혼비백산 넉다운 되듯, 작가는 선입견을 잣대 삼아 자신을 판단했던 독자의 멱살을 잡고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거침없이 질주했다.

소설에 개 다섯 마리는 나오지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추운 밤이면 개를 끌어안고 잤대. 좀 더 추우면 두마리, 세마리... 엄청 추운 밤을 '개 다섯 마리의 밤'이라 불렀대."

백색증(알비노)을 앓고 있는 아이. 육손을 가진 남자. 소수자이자 약자가 서로의 고통을 꽉 부둥켜 안고 의지한 채, 개 다섯마리를 끌어안고도 모자랄 타인의 경멸, 집단 따돌림이란 혹한을 견딘다. 육손의 남자도 끝까지 아이 곁을 지켜주지 못하고, 지독히 외로운 세상에서 알비노인 아이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겨우 12살의 자존심 뿐이다.

절박하리만큼 안간힘을 써가며 버텨보지만, 정작 아이보다도 나약한 자격지심과 마주하기 뜨끔한 가해자들은 더 집요하고 잔혹하게 아이를 벼랑끝으로 내몬다. "너무 힘들 땐 엄마, 건너뛰기 버튼을 누르고 싶어." 아이는 점점 가중되어 오는 폭력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참아왔던 울음을 밖으로 솟구쳐 낸다.

그럼에도 작가는 가해자에 대한 복수도, 피해자에 대한 구원도 없이 아이에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면케 한다. 처절하리만큼 아픈 소재를 타협없이 정공법으로 직진, 치열하고도 묵직하게 전개를 끌고가는 저력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각 인물들의 빈틈없는 서사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입체적이고 치밀한 구성까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억겁의 내공없이 가능할 수 있을까.

작금의 혐오사회에서 나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내심 멸시하나, 차라리 외면하나, 어줍잖게 동정하나. 어떠한 답도, 위로도 함부로 꺼낼 수 없는 무거운 침묵만이 흐를 뿐이다.

최근 드라마 <더 글로리>로 인해 집단 따돌림에 대한 이슈가 한창인 가운데, 정작 드라마의 본질인 피해 당사자의 아픔을 공감하기 보단, 대중적 재미 요소에 더 현혹되었던 건 아닌지 자문해본다. 소외된 약자들과 냉대한 인간사회 가운데서 쓸쓸한 한숨이 내쉬어지는 소설이었다.

겉모습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옛말은 하나 틀린 것이 없구나. 타인에 대한 선입견으로 일관했던 시간들이 부끄러워 책을 덮자마자 꾸벅 절하고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VIP시사회 때 다시 만난 작가님
 
영화 <우수> VIP 시사회 당일
 영화 <우수> VIP 시사회 당일
ⓒ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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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께 전화를 걸어 영화 <우수>(2022년 11월 24일 개봉) VIP시사회 때 사촌누나 아니 채영신 작가님도 혹시 오시냐고 물었다. "아마 오실 걸요?" 가방에 소설 책과 네임펜을 미리 챙겨 넣어뒀다. <우수> VIP시사회 날, 공식 스케줄을 모두 소화한 후 뒷풀이 장소로 이동, 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주위를 둘러봤지만, 홀이 넓고 사람도 많아 작가님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감독님께 도움을 청하자 "아, 누나요? 저쪽 테이블 구석에 앉아 있을 걸요?" 하고 대각선 방향 구석 자리를 가리키니, 정말 그곳에 작가님이 후광을 등에 업고서 다소곳이 누군가와 얘기하고 계셨다. "근데 누나 곧 갈 거 같은데..." 다급히 감독님을 앞세우고 종종걸음으로 뒤따라가, 때마침 일어날 채비를 하시려는 작가님 앞을 재빨리 막아서고는, 어느새 수줍어진 볼과 음소거 될 듯한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작가님. 책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저...저... 사인 좀...!" 그러자 차분하면서도 우아한 손짓으로 "아, 네~!" 하시며 펜을 받아 책 앞면에 친히 일필휘지 해주시고는, 이내 트렌치코트 안에 바람을 일으키며 문 밖으로 홀연히 사라지셨다. 동경하는 소설가의 책을 가슴에 꼬옥 품은 문학 팬은 그녀가 떠난 뒷모습의 아우라를 느끼며 한동안 자리를 뜨질 못했다.
 
사인본
 사인본
ⓒ 김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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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채영신 작가 약력 : 이화여대 교육학과 졸업. 2010년 실천문학상 신인상 단편 <여보세요> 당선. 2014년 단편 <4인용식탁> "젊은 소설"(문학나무) 선정. 2016년 경기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지원사업 문학분야 선정. 장편 <필래요>(2020), 소설집 <소풍>(2020). 제7회 황산벌청년문학상수상작 <개 다섯마리의 밤>(2021)


개 다섯 마리의 밤 - 제7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채영신 (지은이), 은행나무(2021)


태그:#채영신, #개다섯마리의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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