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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의 전쟁관/평화관은 기로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이완 문제 등으로 중국의 군사적 위협이 엄습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가운데, 북한이 동해상으로 발사하는 미사일이 언제 일본 열도에 낙하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팽배하다. 한편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북방영토'(쿠릴열도) 문제로 러시아와의 관계 역시 위태롭기 그지없다(관련 기사 : 살얼음판 중국-일본... 일본인 전쟁연구가의 따끔한 진단 https://omn.kr/1vqnl).

대외위협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를 원하는 이들의 목소리, 일본이 극동전력을 적극적으로 보조해주기를 원하는 미국의 이해타산이 맞물리면서, 패전 후 현대일본의 질서를 구성해왔던 이른바 평화헌법에도 변화의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관련 기사 : 한미일연합훈련이 '극단적 친일'? 이젠 질문을 바꿔야 https://omn.kr/214co).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시민들과 정당들이 평화헌법 수호를 강변하고 있는 것은, 온 국토가 불타고 310만의 국민이 처참하게 쓰러진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관한 기억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전쟁을 실제로 체험했던 이들이 완전히 역사의 저편으로 저물고 있는 2023년의 시점에서, 전쟁의 기억을 후세대로 이어 나가 평화의 가치를 지키는 작업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진다.

2월 14일부터 22일까지 교토부 카메오카시에서 열린 <전쟁의 기억을 잇다-카메오카시 오이마치 출신 카이텐특별공격대원 사노 하지메>라는 제하의 사진전에는, 풍화되어 가는 전쟁 기억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고민이 단적으로 드러났다.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입대한 중학생 소년 
    
하지메의 요카렌 합격은 학교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자랑으로 여겨졌다.
▲ 요카렌 제복을 입고 군도를 쥔 하지메 하지메의 요카렌 합격은 학교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자랑으로 여겨졌다.
ⓒ 지역자원을 발굴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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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2월 25일에 태어난 사노 하지메(佐野元)는 의사를 꿈꾸던 명석한 학생이었다. 그는 근면하게 면학정진하여 가족들을 기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시 쓰기와 검도에도 두각을 드러내어 주변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다른 시대를 살았다면 그에게 무수한 가능성이 주어졌겠지만, 때는 전란의 시대였다. 하지메가 중학교에 입학했던 1939년, 제국 일본은 이미 2년 가까이 중국에서 전면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제2차세계대전의 포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학교의 기능은 이미 잠재적 병정의 양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어린 학생들은 천황과 황통의 신성성을 내면화하는 각종 행사, 전쟁에 보탬이 될 '근로봉사' 등에 동원되었다. 군사교련, 고급장교들의 강연회도 학교에서 실시되었는데, 특히 하지메가 다니던 중학교는 마이즈루 해군진수부와 가까웠던 탓에 해군의 존재감이 무척이나 강했다.

징병되었다가 유골로 돌아오는 선생님들의 운구를 맞이하는 것은, 어쩌면 하지메를 비롯한 소년들에게 들이닥칠 운명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1943년, 제국 일본이 사활을 걸었던 과달카날 전역은 대패로 끝이 났고, 주요 전쟁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전사했으며, 에투섬 수비대가 미군의 공격에 의해 '옥쇄'했다.

전황이 악화되는 가운데, 일본 해군은 '해군비행예과연습생'(약칭 '요카렌')의 대량모집을 결정하고 지원자격과 교육기간도 대폭 하향 조정했다. 뿐만 아니라, 단기간 모집의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도록 각 지자체와 학교들을 채근하기까지 했다. 군의 요구에 대해 민간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혹자는 이를 기회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메가 다니던 중학교의 교장 역시 그런 어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학교가 다른 학교들보다 다수의 요카렌 지원자를 배출할 수 있게 열성적으로 공을 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각 학교의 요카렌 지원자 수는 그대로 평가지표가 되었던 까닭이다.
  
사노 하지메 씨의 출정을 축하하는 일장기 '롤링페이퍼'가 눈에 띈다. 지인들이 적어준 문구에는 "나도 뒤따라 간다", "무사도 정신으로 살아라", "워싱턴과 런던을 박살내버려" 등의 내용들이 적혀있다.
▲ 사노 하지메 씨의 유품  사노 하지메 씨의 출정을 축하하는 일장기 '롤링페이퍼'가 눈에 띈다. 지인들이 적어준 문구에는 "나도 뒤따라 간다", "무사도 정신으로 살아라", "워싱턴과 런던을 박살내버려" 등의 내용들이 적혀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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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나라를 구하라'라며 소년들을 압박했다. 애국주의/군사주의적 풍토 아래서 자랐던 소년들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숭고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메 역시 이러한 선전에 매료되어 요카렌 지원을 결심했다. 결국 그는 학기가 끝나지도 않은 1943년 12월 1일 입대하게 되었다.

하지메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그를 충군애국의 모범으로 치켜세우며 그의 가족에게 대신 졸업장을 전달했고, 학교에 남은 학우들은 먼저 '천황폐하의 군대'에 들어간 하지메를 선망의 대상으로 여겼다고 한다. 부대에서는 "군신(軍神, 전사한 군인들을 신격화한 명칭)의 뒤를 이어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기 위해 집을 나선 하지메군"을 높이 칭찬하며 그에 대한 좋은 대우를 약속하는 엽서를 하지메의 가족들에게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수많은 격려와 응원을 뒤로 하고 군문에 들어간 하지메는 곧바로 가혹한 폭력의 굴레를 마주해야 했다. '연대책임'이라는 명목하에 온갖 구실로 구타와 가혹행위가 이루어졌다. 하사관들은 '군인정신주입봉'으로 폭력을 쓰며 어린 학생들의 '사회물'을 빼고자 했다(관련 기사: '가미카제'의 최후를 본 96세 일본 노인의 증언 https://omn.kr/1ru2e).
  
야구 베트 형태의 '빠따'로 하급자를 구타하는 악습은 한국의 군대와 학교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 요카렌 출신자가 그린 당시 구타/가혹행위의 모습 야구 베트 형태의 '빠따'로 하급자를 구타하는 악습은 한국의 군대와 학교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 국서간행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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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려운 환경에서, 명석하고 끈기 있던 하지메는 빠르게 군 생활에 적응하고 그토록 원했던 '조종' 병과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비행기를 타본 사람조차 소수이던 시대에, 비행기를 직접 조종하게 된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으로 여겨졌다. 가족들과 고향 사람들에게 하지메는 그야말로 자랑거리였고, 하지메 역시 조종 병과에 합격한 것을 긍지로 여겼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치명적인 패배와 보충 불가능한 손실이 반복되던 가운데, 해군군령부에서는 급기야 전황을 타개할 대책으로 '필생필살의 전법', 즉 탑승원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특공 작전을 입안하기에 이르렀다(관련 기사: "충성 빛나리"... 자국민 죽음 내몬 일본의 끔찍 '신화' https://omn.kr/1vg2j). 인간어뢰 카이텐(回天)은 이 특공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기획된 여러 병기들 중 하나였다.

상부에서는 '국가존망이 달린 신병기가 개발되었다'며 장병들에게 지원을 독려했다. 하지메와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오기노(荻野)씨는 2019년 8월 9일자 단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특공대원 모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44년) 8월 초의 어느 날, 부대동기생 250명과 함께 무도장에 집합하게 되었다. 분견대장의 훈시가 이어졌다. "너희들은 비행기를 타고 싶어 요카렌에 지원해 들어온 것이지만, 비행기는 포기하고 신병기에 지원하라. (중략) 이름을 쓰고, 간절히 희망하는 자는 이중 동그라미, 희망자는 동그라미, 희망하지 않는 자는 X 표시를 해서 제출해라."
 
오기노씨는 당시의 분위기상 도저히 이중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메가 남긴 일기에서는 당시의 정황이 드러나지 않지만, 카이텐 특공대 배속이 결정된 뒤 그는 깊은 실의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기대했던 조종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이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만이 그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예정된 죽음, 사라진 책임자들 
  
카이텐은 한번 출격할 시 공격의 성패와 관련없이 탑승원이 100퍼센트 사망하게 되는 구조의 인간어뢰였다.
▲ 잠수함에 탑재된 카이텐 카이텐은 한번 출격할 시 공격의 성패와 관련없이 탑승원이 100퍼센트 사망하게 되는 구조의 인간어뢰였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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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잃고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며 번뇌하는 와중에, 그는 자신이 인간어뢰로 죽게 되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모색하려 노력했다. 카이텐 기지 주변의 절경들을 그리며 물아일체를 논하는 시를 짓기도 하고, 부모님과 동생들에 대한 북받치는 심정에 대해 토로하기도 하면서도, 나라를 위한 순국의 다짐을 적으며 스스로를 다잡기도 했다. 카이텐 출격이 결정된 이후 가족들과 만나게 된 자리에서,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8월 1일, 하지메를 비롯한 5명의 카이텐 특공대원을 태운 잠수함이 야마구치현 히카리기지를 출항했다. 열흘간의 항해 뒤 1945년 8월 11일, 팔라우 북방 500해리 지점에서 미 해군 수송선단을 발견한 잠수함은 공격을 개시한다. 그때, 잠수함에 실린 카이텐 5정 중 2정이 고장으로 사용불능 상태에 놓이면서, 특공대원 5명 중 3명만이 출격하게 되었다. 출격할 3명의 특공대원 명단 마지막에는, 하지메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출격이 결정된 후, 하지메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17시 30분, 적 수송선단 발견. 스스로를 다잡고 육탄공격을 감행한다. 그저,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돌입할 뿐이다. 잘있거라, 신주(神州, 일본을 신의 땅으로 부르는 명칭)에 새벽이 찾아오길. 칠생보국의 두건을 풀고서 기도하는 것은 격침.

일기에 마침표를 찍은 하지메는 자신의 관이 될 인간어뢰에 들어가 해치를 닫았다. 이로서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분리되었다. 이제 함장의 구령이 떨어지면 스스로 레버를 당겨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야 했다.

굳은 각오를 남긴 그였지만, 결국 인간적인 동요와 고뇌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당시 잠수함에 함께 탑승하고 있던 전우의 회고에 따르면 하지메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이윽고 카이텐 조종석에 앉아 함장으로부터 출격명령을 듣게 되었을 때, 흐느끼던 그가 유선을 통해 남긴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천황 폐하 만세! 어머니, 안녕히!"
  
사노 하지메 씨의 특공출격 직후 소위 특진이 이루어졌으며, 전쟁 후 23년이 지나서는 천황 명의의 훈장 수여도 이루어졌다. 정작, 비극적 인명경시인 특공 추진에 대한 어떠한 사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 사후에 이루어진 소위 특진, 훈장 수여 사노 하지메 씨의 특공출격 직후 소위 특진이 이루어졌으며, 전쟁 후 23년이 지나서는 천황 명의의 훈장 수여도 이루어졌다. 정작, 비극적 인명경시인 특공 추진에 대한 어떠한 사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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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를 꿈꾸던 소년 하지메는 그렇게 인간어뢰가 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는 겨우 18세였다. 이날 하지메를 죽음으로 몰았던 특공출격은, 일본 해군에 의해 벌어진 마지막 카이텐 작전이었다. 그로부터 나흘 뒤, 천황은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 선언을 발표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나흘의 찰나를, 하지메는 끝내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못할쏘냐'며 카이텐과 같은 특공병기들을 입안했던 쿠로시마 카메토 소장과 같은 군령부 참모들은 법적 심판을 피했고, 죽어간 소년들에 대해 그 어떤 죄의식도 드러내지 않은 채 안락한 여생을 누렸다(관련 기사: '소년 자폭공격' 추진한 일본 군인의 기막힌 결말).

특공 작전의 최종승인권자였으며, 하지메가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와 더불어 부르짖었던 천황 역시, 전쟁과 특공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1989년까지 천수를 누렸다. 소년 하지메를 전쟁으로 끌어내고 그를 특공으로 몰아세웠던 어른들이 한 것이라고는, 하지메를 3계급 특진시켜 소위 계급을 주고 훈장을 수여해 나라를 위한 그의 순국을 모범으로 칭송한 것 뿐이었다.

당사자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현대를 사는 시민들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죽음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때의 폭력과 비극이 또다시 반복될 우려는 없는 것인지를 말이다.

태그:#카이텐, #일본군, #전쟁체험, #특공,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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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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