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6 18:08최종 업데이트 23.02.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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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안장식이 2020년 7월 15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렸다. ⓒ 공동취재사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돼 있는 백선엽은 한민족과 아시아를 위험에 빠트린 인물이다. 일제 침략전쟁에 가담해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아시아·태평양인들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7권에서 "백선엽은 1942년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이래 1945년 일제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만주국군 장교로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라면서 그의 전쟁범죄를 이렇게 열거한다.
 
1943년 2월부터 만주 지역 항일 무장독립세력을 무력으로 탄압하던 간도특설대에서 이들에 대한 탄압 활동을 전개하였고, 또 1944년부터 1945년에 걸쳐 간도특설대원으로서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의 일환으로 열하성으로 들어가 기동(冀東) 지역에서 중국군 팔로군을 토벌하는 작전에 종사하였다. 또 1945년 봄부터 일제의 패전 당시까지 연길 지역 국경수비 임무에 종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함경북도 이북의 간도성에서 항일운동세력을 탄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륙타통(打通)작전에 참가해 베이징 근처의 열하성에 들어가고 베이징 동쪽에서 팔로군 토벌전에도 가담했다. 중국 북부와 만주를 무대로 침략전쟁에 가세했던 것이다. 한민족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그 위기를 가중하는 쪽에 서 있었다.

항일의 고장에서 태어났지만

백선엽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10월 11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했다. 물산장려운동으로 유명한 조만식(1883~1950)과 흥사단으로 유명한 안창호(1878~1938)가 태어난 고장이다.

3·1운동 때 이곳에서는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들이 있었다.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펴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9권은 수천 명이 참여한 1919년 3월 4일 사천장터 시위와 관련해 "사천에서는 유혈 투쟁이 일어났는데, 이는 수원 제암리 투쟁과 함께 3·1운동의 2대 유혈 참극 중 하나"라고 한 뒤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시위 행렬의 선두가 사천시장 초입에 당도하자 발포가 시작되었다. 이에 흥분한 군중은 돌을 던졌다. 총탄과 투석의 대결이었다. 삽시간에 사천시장은 전쟁터가 되었다. 성난 군중은 좌등(佐藤) 헌병과 헌병 보조원 2명을 살해했다. 결국 구금된 사람들은 구했지만, 이날 16명이 죽고 40여 명이 다쳤다.
 
3월 8일 강서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서는 일본을 정면으로 자극하는 상징적 이벤트가 벌어졌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는 "의사와 잡화상 등이 주동이 되어 그곳 강서공립보통학교 교정에 역시 500여 명의 군중을 모아 놓고 일장기 게양대에다가 대형 태극기를 달은 뒤 독립선포식을 거행했다"라고 전한다.

이런 역사가 있는 고장에서 태어난 백선엽은 19세 때인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부터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과 운명을 함께했다. 1940년에 만주국 사관학교인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1941년에 견습사관이 되고 뒤이어 소위로 임관했다. 그런 다음,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에 들어가 항일운동을 탄압하다가 해방 뒤 대한민국 국군의 지도적 위치에 올랐다.


만주국 소위로 복무할 당시 그의 야심이 대단했다는 느낌을 갖게 는 일이 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그는 장제스(장개석)가 중국 대륙 지배권을 차지한 과정을 연구했다. 이 문제에 관해 "사료를 읽고 나름대로 연구"했다고 회고록에서 말했다.

전쟁 중에 일선에 배치된 젊은 장교가 상대 진영 국가지도자의 성공 비결을 연구하고자 역사 기록을 찾아서 읽고 연구까지 했다, 일제 치하에서 그가 상당한 야심을 품었으리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는 자신이 만주로 간 것은 일본에 유학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작년 4월 <만주연구> 제33집에 수록된 고한빈 전쟁기념관 학예연구사의 논문 '조선인의 만주국군 입대 배경과 동기'는 백선엽의 또 다른 회고록인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을 인용해 '조선에는 대학이 경성제국대학 한 곳뿐이었고 일본 사립대학에 유학 갈 여유는 없어서 만주군관학교에 진학하게 됐다'라고 설명한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일본의 대륙침략이 가속화되던 1940년 시점에 만주군관학교에 진학했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조해 야심을 이루려 했던 내면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3·1운동이 강렬했던 그의 고향 역사와 무관한 내면세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만주에 간 그는 5년간 일본제국의 울타리에서 살았다. 일본의 밥을 먹고 그 봉급을 받으며 그들의 총을 들고 싸웠다. 그렇게 해서 축적된 친일재산이 많지 않을지라도, 20대 초중반의 백선엽은 그렇게 얻은 친일재산을 토대로 군인 경력을 쌓아 나갔다. 그것이 해방 뒤 그의 국군 경력에도 결정적 밑바탕이 됐다. 그의 화려한 군사 경력 저변에 5년간의 친일재산 축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간도특설대 초기 지휘부 '간도특설대'는 일제강점기 만주국이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및 팔로군 등 항일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한 부대다. 이들은 독립군은 물론 만주에 이주한 선량한 조선인을 주로 탄압한 악명 높은 부대였다. 백선엽, 김백일 등이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 서해문집

 
이런 데서 장교로 있었다니

그 과정에서 그가 식민지들의 아픔에 별 공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점은 항일세력 진압 부대인 간도토벌대에서 활약한 사실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주로 한국인들로 구성된 이 부대의 군가를 살펴보면, 이런 데서 장교로 있었다는 것 자체가 영락없는 전쟁범죄자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이 부대 군가에는 "야마토 혼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는 대목들이 있다. 괴뢰국 군대이지만 일본 혼으로 무장하고 일왕의 사랑을 받는 부대라는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군가였다.

야마토 혼으로 무장한 간도특설대는 항일세력뿐 아니라 민간인들을 상대로 전쟁범죄를 많이 저질렀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백선엽 편은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라고 설명한다.

이 부대에서 백선엽은 한국인 독립투사들을 색출하는 일에 앞장섰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1993년 일본에서 펴낸 <대(對)게릴라전, 아메리카는 왜 졌는가>라는 회고록에서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는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라며 "우리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많은 조선인을 추격했다'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추격하는 대상 속에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 그는 자신이 한국인들을 추격한 일을 두고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라고 서술했다. 자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의식해 반성의 뜻을 약간 내비쳤다고 볼 수 있는 이 문장은 그가 주로 쫓던 대상이 한국인들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이 그에게 부여한 사명이 주로 중국인 토벌이라면 '이이제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주로 한국인들로 구성된 간도특설대가 일본의 명령에 따라 주로 한국인 독립투사들을 진압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튀어나왔으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중국인 토벌이 주 임무였고 그 와중에 어쩌다가 한국인들이 붙들렸다면 '이이제이 책략에 완전히 빠져들었다'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을 이용해 한국인을 잡는 간도특설대의 취지를 그가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간도특설대가 성과를 거둔 일들을 설명하다가 '이이제이에 빠져들었다'며 은근히 일본을 탓한 그는 바로 뒤 문장에서 스스로를 또 한 번 변호했다.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자신의 친일행위가 한국 역사에 해악을 끼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1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장(왼쪽)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 세번째)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신고를 받는 장면.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반성 같기도 하지만 절대 반성이 아닌 그의 회고는, 이런 인물을 대한민국 최초의 4성 장군으로 치켜세우고 그를 위대한 명장으로 떠받들었던 대한민국을 서글픈 나라로 만든다. 간도특설대의 성과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면서도 자신의 친일 경력이 어떻게 비칠까를 염려하며 횡설수설하는 모습은 한국인들 앞에서 떳떳할 수 없는 그의 내면을 드러낸다.

그가 만약 한국이 내세울 만한 진정한 군사 지도자였다면, 적어도 한국인들 앞에서는 자신의 행적을 떳떳하게 기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떳떳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인생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을 2020년부터 국립묘지에 안치해놓은 것은 후세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권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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