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8 17:24최종 업데이트 23.02.18 17:24
  • 본문듣기

평화누리 자전거길 5코스 길안내 표지판. ⓒ 성낙선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평화누리 자전거길'은 길 표시가 상당히 잘 되어 있다. 시시때때로 감탄이 나온다. 길이 헷갈릴 때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자전거길을 표시하는 표지판이 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삼거리나 사거리에서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신기하게도 그 길 어디에선가 이쪽으로 혹은 저쪽으로 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표지판은 자전거도로는 물론이고, 자동차가 주로 다니는 복잡한 일반도로와 농기계가 우선인 한적한 농로에서도 어김없이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자전거길을 달려 봤지만, 평화누리 자전거길만큼이나 세심하게 여행자들을 배려한 길은 보지 못했다. 길 표시가 잘 되어 있어 여행하는 데도 마음이 한결 가볍다.
 

평화누리 자전거길 5코스 쉼터. ⓒ 성낙선


쉼터도 비교적 관리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쉼터만 놓고 봐도 한강 자전거도로가 부럽지 않다. 쉼터 같은 경우, 지자체에서 설치만 해 놓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평화누리 자전거길에서는 그런 시설물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문제는 노후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시설들이 점점 더 낡아가고 있다.

자전거길 바닥에 그려진 자전거도로 표시가 지워져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일면 관리가 잘 안되고 있는 부분도 있다. 이런 문제는 어쩌면 자전거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들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평화누리 자전거길 5코스를 여행하면서, 길을 제대로 관리하고 유지하는 게 꼭 그 길을 만든 사람들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본다.
 

자전거도로, 흔적만 남은 자전거 표시. ⓒ 성낙선

 
농한기, 자전거 타기 좋은 한적한 농로

평화누리 자전거길 5코스는 원래 반구정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임진각에서부터 시작한다. 지난 4코스 여행에서 나도 모르는 새 반구정을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바로 임진각까지 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임진각을 떠나면서, 바로 농기계 우선도로로 들어선다. 그렇게 해서 한동안 흙먼지가 뽀얗게 뒤덮인 농로 위를 달린다. 들판이 넓어서, 농로도 생각 외로 길다.

이런 길을 가다 보면, 중간에 한 번쯤 농기계와 마주칠 법도 한데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길이 한적해 자전거 타기 좋다. 하지만 농번기에 이 길을 가려면, 조금 애를 먹을 수도 있겠다 싶다. 농로가 폭이 좁은 편이어서 도중에 농기계라도 만나게 되면 자전거가 물러설 곳이 마땅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은 농한기다.
 

평화누리 자전거길 5코스를 지나가는 농로. ⓒ 성낙선

 
햇볕이 맑은 날, 한겨울에 텅 빈 농로 위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데 가슴이 한여름에 얼음물을 들이켜는 것처럼 시원하다. 이런 길이라면, 하루 100km를 달린다 해도 힘들지 않을 것 같다. 농로를 벗어나면서 임진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후로 임진강 하얀 강줄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다시 벗어나기를 반복한다.

이 길 주변에는 텅 빈 논이나 오래된 농가가 대부분이어서 풍경이 조금 단조롭다. 그나마 임진강을 바라다볼 수 있어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꽤 답답하고 지루한 여행이 되었을 것 같다. 입춘이 지나서 그런지, 강가에 늘어선 나무들이 잿빛을 벗기 시작했다. 살짝 물이 오른 듯, 나뭇가지에 연둣빛이 비친다. 봄기운이 느껴진다.
 

임진강변,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나무들. ⓒ 성낙선

 
자동차가 다니는 길가에 웬 약수터?

금파2리 마을회관 앞을 지나가다 '약수터'를 발견한다. 평범한 시골 마을을 지나가는 길이라 아무 생각이 없던 때였다. 그러다 코앞에 갑자기 '약수터'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이 나타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약수터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이런 풍경은 또 생전 처음이라 어리둥절하다.

약수는 또 왜 그렇게 세차게 흘러나오는지 꼭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 같다. 약수터라고 쓰여 있으니 약수터인 줄은 알겠는데, 거기에서 솟아나는 물이 진짜 약수인지는 살짝 의심이 간다. 한편으로는 신기하다. 약수터 위로 차양까지 씌우고 기둥 한쪽에 플라스틱 바가지까지 걸어둔 걸로 봐서 명색이 약수터인 건 분명해 보인다.
 

금파2리 길가 약수터. ⓒ 성낙선

 
마침 마실 물이 떨어져 가던 차에 잘 됐다 싶어 생수병에 물을 담아 마셔본다. 맛은 그냥 깔끔하다. 약수인지는 잘 모르겠고, 생수인 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그래도 여전히 얼떨떨하다. 약수 맛까지 봤으니 이제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그런데 약수터에서 몇 미터 못 가 다시 브레이크를 잡는다. 이번엔 '구멍가게'다.

이 땅에서 오래전 '멸종'된 걸로 알았던 구멍가게가 길가에 떡하니 옛 모습 그대로 생존해 있는 걸 보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너무 반가운 나머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구멍가게 앞에 으레 서 있기 마련인 고목 한 그루까지, 예전에 시골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 그대로다.
 

금파2리, 구멍가게. ⓒ 성낙선

 
'옛날 일'이 돼 버린 장파리의 과거

가슴이 뭉클하다. 구멍가게를 못 본 지 오래다. 이제는 시골 마을에서도 대기업 편의점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많던 구멍가게들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시대가 바뀌면서 하나둘씩 소리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 구멍가게들이 지금은 대부분 대기업 편의점으로 교체되거나, 그와 비슷한 형태의 동네 마트로 탈바꿈했다.

금파2리 구멍가게도 시대의 흐름을 완전히 거스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가게 입구인 미닫이문에 '카', '드', '가', '능'이라고 적은 종이 네 장이 붙어 있다. 구멍가게에서 카드 결제가 가능해지다니... 시대가 바뀌면서 세태까지 바뀐 것이다. 자전거길에서 '멸종위기종'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게 신기하기도 하고, 그 '희귀종'이 또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알 수 없어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장파리 마을 안내 표지판. ⓒ 성낙선

 
금파2리를 지나면 바로 장파리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는 도로 초입에서 마을 안내판을 올려다본다. 변색을 넘어 이제는 탈색이 돼가는 안내판이다. 그 표지판이 장파리가 '매운탕'으로 유명한 마을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안내판을 세운 이후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그 위에 적힌 글자를 읽는 게 쉽지 않다. 그 안내판에서 최근에 마을 경제를 되살려 보려고 노력한 흔적을 읽는다.

장파리도 한때는 부유한 동네였다. 일제 강점기 때만 해도 개성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여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임진강 너머에 주둔한 미군을 상대로 '떼돈'을 벌었다. 마을 안내판에서 보는 것과 같은 어두운 그늘은 미군 철수 후에 찾아왔다. 그 뒤에 "강아지도 달러를 물고 다녔다", "한때는 땅값이 서울 명동보다 더 비쌌다"는 씁쓸한 옛 추억만 남았다.
 

지나가는 자전거를 보고 마구 짖는 개 한 마리. ⓒ 성낙선

 
봄이 오는 들판, 꽃필 날이 머지않았다

어느새 5코스 여행도 종점을 향해 간다. 4코스를 여행할 때까지만 해도 의식을 하지 못했는데, 5코스에서는 여기저기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정도가 좀 심하다. 가는 길마다 개들이 튀어나와 험상궂게 짖어댄다. 개들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짖을 때는 가슴이 철렁한다.

자동차들이 빈번하게 지나다니는 2차선 도로 곁에 개를 내놓고 키우는 경우를 본 적도 있다. 그 개가 길을 지나가는 자전거 여행자를 보고 맹렬하게 짖어댔다. 그 사이 그 개 앞으로 자동차 두세 대가 지나갔다. 아찔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5코스를 여행하다가 개들로부터 지나친 환대를 받는다고 해도 결코 놀라지 마시라.
 

평화누리 자전거길 5코스 종착지인 장남교. ⓒ 성낙선

 
5코스는 장남교에서 여행을 마친다. 이날 한낮의 기온이 영상 10도 가까이 올라갔다. 겨울치고 푸근한 날씨였다. 자전거여행을 하기 좋았다. 해가 높게 떠 있을 때는 땀이 너무 나 패딩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 바람막이 점퍼 하나만 걸쳤는데도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임진강변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나무들을 보면서 봄이 다가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길가에 꽃이 피는 걸 보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3월 초에는 매화가 개화할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에서는 이미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다. 평화누리 자전거길 5코스 구간인 반구정에서 장남교까지의 거리는 대략 29km다.
 

임진강. ⓒ 성낙선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