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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을 피해 남쪽 나라인 태국 치앙마이에 가서 지내다 며칠 전에 돌아왔다. 최저 기온이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던 한국과 달리 치앙마이는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하고 한낮에는 최고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려 지내기에 좋았다. 비행기로 6시간 거리 밖에 되지 않는데도 우리나라와 태국 치앙마이는 이렇게 천양지차로 완전 딴 세상이었다.

치앙마이(Chiang Mai)는 태국 북부에 있는 도시로 과거 13세기에 란나 타이(LanNa Thai) 왕국의 수도였다.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가 어울린 관광지로, 오래 된 성벽과 사원 등을 볼 수 있어 찾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구시가지는 아직도 성곽과 해자가 둘러싸고 있어 그윽한 역사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해안 방어 위한 강화 외성

치앙마이 구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과 해자(垓字,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를 보자니 강화도 외성이 떠올랐다. 강화외성은 고려 23대 고종이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1233년(고종 20) 해안 방어를 위해 23km에 걸쳐 쌓은 성이다.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바닷가에 있는 '오두돈대'의 위용.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바닷가에 있는 '오두돈대'의 위용.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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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성은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는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중요한 방어시설이었다. 강화도 자체가 이미 바다라는 천연의 해자가 보호해주고 있고 거기에 더해 외성까지 쌓았으니 강화도는 가히 금성탕지(金城湯池)였다.

강화 외성은 강화 동북쪽 바닷가에 있는 적북돈대에서부터 시작되어 강화 남단 초입에 있는 초지돈대까지 총 23km에 달한다. 외성 구간에는 돈대도 18개소나 있다. 돈대(墩臺)는 주변 관측이 용이하도록 평지보다 높은 평평한 땅에 설치한 조선시대의 소규모 군사 기지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강화도 해안에 54개가 있다. 그중 18개나 되는 돈대가 외성 구간에 있는 걸로 봐서 이 구간이 강화도 방어에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다.

강화해협을 지킨 18개의 돈대들

치앙마이에서 돌아온 뒤인 지난 2월 14일, 오두돈대에 갔다. 작년 8월 하순에 가보고 처음이다. 그때는 늦더위로 땀을 훔쳤는데 이번에는 추워서 목을 옷깃 속에 파묻고 자라목을 한 채 오두돈대를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오두돈대의 이름에도 자라가 들어 있다. 돈대가 들어선 곳이 마치 자라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오두(鰲頭) 돈대다.

오두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에 위치한 이 오두돈대는 덕정산이 동쪽으로 뻗어 내려오다 해안으로 툭 튀어나온 곶의 정상에 위치한다. 자라 머리 모양의 이 작은 동산은 돈대를 축조하던 당시에는 섬이었을 것이다. 강화의 넓은 들판은 대부분 간척으로 만들어진 땅이고 보면 오두돈대 앞의 들판 역시 바다를 메워 만들어진 농토다. 오두돈대가 있는 동산도 원래는 섬이었으나 간척으로 본 섬과 하나가 되었으리라.
 
오두돈대의 북쪽 성벽은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오두돈대의 북쪽 성벽은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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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돈대의 생긴 모양새는 원형이다. 돈대의 둘레는 107m에 달하며 지름은 35m다. 2000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복원한 성벽의 높이는 3.5m이다. 복원 이전인 1999년 육군박물관 조사에 따르면 원래 6~7단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특히 바다 쪽과 접한 성벽은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복원을 하면서 원래 있던 성벽 위에 새로 석재를 쌓아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그런데 원래의 성벽 돌과 새로 쌓은 돌이 확연하게 구분된다. 잔존했던 성벽 돌은 세월의 흔적이 남아 검은빛을 띠는 반면 복원한 성벽 돌은 화강암 본연의 색 그대로 흰 빛으로 깨끗하다. 복원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새로 쌓은 부분은 표가 난다.

오두돈대가 축조되었던 1679년 그때 성벽이 이랬을 것이다. 바다와 닿아 있는 작은 섬 꼭대기에 우뚝 솟은 이 흰 성채는 얼마나 장엄했을까. 한양으로 오가던 배들은 오두돈대를 보며 절로 오금이 저렸을 것 같다.

옛 것과 새 것의 간극

복원 할 때 새로 쌓은 성벽 돌은 백설기에 쑥을 삶아 찧어서 섞어 놓은 듯 거뭇거뭇한 게 보인다. 화강암을 '쑥돌'이라 한다더니 과연 그러하다. 성벽 돌들은 마치 정으로 쪼은 것처럼 표면에 정 자국이 많이 나있다. 현대는 기계로 돌 작업을 하는 시대인데도 일부러 옛날 돌처럼 정 자국을 내었다. 옛날 돌 위에 새 돌을 얹어 쌓으니 색깔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기에, 정을 쪼은 것처럼 자국을 내어 옛 것과 새 것의 간극을 메우려 했다. 돈대를 복원할 때 이런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살핀 그 마음이 보이는 듯했다. 
 
오두 돈대는 숙종 5년(1679)년에 쌓았다. 2000년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오두 돈대는 숙종 5년(1679)년에 쌓았다. 2000년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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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 그런지 오두돈대 주변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작년 여름에는 여럿이 돈대를 보러 왔었는데 이번에는 친구와 나, 달랑 둘 뿐이다.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돈대를 둘러보던 친구가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양 소리를 지른다.  

"여기 좀 봐. 성벽의 배가 좀 볼록하지 않아? 경주 첨성대 같아."

친구는 돈대의 성벽을 끌어안다시피 하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돈대 성벽이 일직선으로 위로 올라가 있지 않고 허리춤 정도 높이쯤부터 살짝 볼록했다. 어찌 보면 항아리의 배 부분 같기도 하고 완만한 산의 능선 같기도 하였다. 친구를 따라 팔을 양 옆으로 활짝 벌려 성벽을 안아 보았다. 무생물인 성벽 돌이 생명이 있는 것처럼 다정하게 느껴졌다. 

돈대의 성벽을 쌓을 때는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뒤로 물려서 쌓는 퇴물림 방식으로 쌓는다. 아래쪽에 크고 긴 돌을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얹어 차차 안쪽으로 들어가게 쌓는 방법이다. 오두돈대에서는 그런 방식을 잘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성벽의 중간 부분이 약간 앞으로 나온 듯이 보였다. 왜 이렇게 쌓았을까? 둥근 형태의 돈대라서 성벽을 그렇게 쌓은 것일까? 돈대 건축에 관해 문외한인 우리는 알 길이 없었다. 
 
지름 35m, 둘레 107m인 오두돈대
 지름 35m, 둘레 107m인 오두돈대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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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돈대는 광성보의 관할 아래 있었다. 광성보는 강화 12진보 중 하나로 강화해협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종3품의 첨절제사와 종4품의 만호, 종9품의 별장이 장수로 배치되었으며 그 아래 250명 가까운 병사가 배속돼 있었다. 

광성보의 관할 아래 있던 오두돈대에는 평상시에는 약간 명의 병사가 주둔하며 돈대를 관리하고 해안을 방비했다. 약 2km 거리에 있는 광성보가 신미양요 때 처절한 전장이 되었던 것에 비해 오두돈대는 그런 참화는 겪지 않았던 듯 돈대 성벽이 많이 남아 있었다. 

1999년도에 지표 조사를 할 때 성벽 아랫 부분이 6~7단 남아 있음을 확인하였고 바다 쪽으로 향해 4개의 포좌도 있음을 확인했다. 돈대 안으로 들어가는 문지는 훼손이 심하여 위치는 알 수 있었지만 형태는 알아볼 수 없었다. 2000년에 전면 복원하면서 돈문과 성벽 윗부분의 여장까지 다 되살려 축조했다. 그러나 지표조사만 했지 발굴 조사를 하지 않고 복원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오두돈대에서 바라본 강화해협.
 오두돈대에서 바라본 강화해협.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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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돈대는 강화 외성과 연결되어 있다. 강화 동쪽 바닷가에 있는 돈대들이 모두 외성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처럼 오두돈대 역시 마찬가지다. 돈대 북쪽 성벽과 남쪽 성벽에는 외성과 이어졌던 흔적도 남아 있다.

벽돌로 쌓은 성벽, 강화 전성

오두돈대와 연결되어 있던 외성을 찾아 나섰다. 돈대 아래 바닷가에는 외성의 전성(塼城) 구간이 일부 남아 있다. 전성은 벽돌로 쌓은 성벽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강화도 전성과 수원의 화성에서 볼 수 있다.

강화 전성은 수원의 화성에 비교해서 봤을 때 빈약하기 짝이 없다. 길이도 고작 270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다 남아 있는 성벽이라고 해봐야 초라하기만 하다. 원래의 전성은 잔존하는 부분이 얼마 안 된다. 영조 때 쌓은 벽돌들이 남아 있지만 오랜 세월 속에 허물어지고 부서져서 형태를 알아보기도 어렵다. 그나마 남아 있는 벽돌들 중 일부는 나무 뿌리가 잠식해 있을 정도다.  
 
강화 외성의 전성 구간. 조선 영조 때 축조했다.
 강화 외성의 전성 구간. 조선 영조 때 축조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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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 벽돌로 쌓은 강화 전성. 오래 되어 허물어지고 깨져서 흔적만 남아 있다.
 구운 벽돌로 쌓은 강화 전성. 오래 되어 허물어지고 깨져서 흔적만 남아 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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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성벽은 그리 우습게 봐 넘길 곳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전성은 조선 영조 시대 때 쌓은 것이다. 원래 외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해안가에 쌓은 성이다 보니 자꾸 허물어지고 유실되었다. 오두돈대 아래 부분은 특히 더 그러했던가 보다. 

당시 강화유수는 왕에게 건의를 했다. 토성이라 자꾸만 무너져 내려 백성들이 다시 성을 쌓느라 고충이 크니 석축과 벽돌을 이용해서 축조할 것을 주청했다. 왕의 윤허를 받고 중국 북경의 벽돌로 쌓은 성처럼 강화 외성의 전성 구간도 그렇게 쌓아 올렸다.   

강화 전성은 수원의 화성보다 52년 앞서서 쌓은 성이다. 강화 외성의 전성 구간을 쌓은 기술력으로 수원 화성을 보완해서 더 잘 쌓았을 것이다. 강화 전성은 길이가 단 270m에 불과하지만 지니고 있는 의미는 보여지는 것보다 훨씬 크다. 강화 외성은 사적 45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오두돈대와 전성을 둘러보고 화도돈대와 용당돈대를 향해 길을 나섰다. 오두돈대에서 화도돈대까지는 1km도 채 되지 않는다. 화도돈대에서 용당돈대까지도 얼마 떨어져 있지 않으니 두 돈대를 둘러보고 다시 차를 세워둔 오두돈대로 돌아와도 왕복 5km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걸음이다. 산책 삼아 걷기에는 부담없는 거리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화도돈대를 향해 길을 나섰다.   

덧붙이는 글 | '강화뉴스'에도 게재합니다.


태그:#강화도여행, #강화 전성, #돈대, #강화외성, #오두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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