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8 11:01최종 업데이트 23.02.1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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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독도 침탈 역사를 설명하는 EBS <독도, 러일전쟁의 서막> 중에서 ⓒ EBS

 
1905년 2월 22일 독도가 일본 시마네현에 편입되도록 만든 사건이 러일전쟁이다. 일본은 전년도 2월 8일에 발발한 이 전쟁의 승리를 확정짓고자 독도를 강점했고,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면서 독도 강점을 굳혔다.

일본이 영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인 러시아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해 5월 29일 대마도 해전(쓰시마 해전)에서 발트(발틱) 함대를 격파해 동해 제해권을 차지한 결과였다. 독도 강점은 그 얼마 전에 일어났다.


정태상 독도연구포럼 대표의 <독도 문제의 진실>은 "러일전쟁의 승기를 잡고 한반도를 무력으로 점령·지배하고 있었지만 러시아와 동해에서 마지막 결전을 남겨두고 승리를 장담할 수만은 없던 시대 상황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서술한다.

2011년에 <대구사학> 제103집에 실린 김화경 영남대 교수의 논문 '동해 해전과 독도의 전략적 가치'는 독도 강점을 부추긴 인물 중 하나인 야마자 엔지로 외무성 정무국장이 "(지금) 시국이야말로 그 영토 편입을 급하게 요청한다"면서 "망루를 세우고 무선 혹은 해저 전신을 설치하면 적함 감시상 대단히 그 형편이 좋아지지 않겠느냐"고 역설한 상황을 소개한다. 더불어, 이런 설명도 제시한다.
 
실제로, 독도가 동해해전에서 전략상으로 대단히 긴요한 곳이었다는 사실은 발틱 함대의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 중장이 의식을 잃은 채 포로로 잡힌 곳이 울릉도 부근이었고, 그를 대신하여 함대의 지휘권을 장악한 네보가토프 소장이 모든 주력 잔함을 이끌고 일본에 투항한 곳이 독도 동남방 18마일 해상이었다는 점을 통해서도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발트 함대의 잔여 함정들이 독도 인근에서 투항한 사실로도 나타나듯이, 일본의 독도 강점은 전쟁 승리와 동해 제해권 확립에 영향을 끼쳤다. 일본의 독도 강점이 러일전쟁 승부에 영향을 주고, 전쟁 결과가 일본의 독도 강점을 고착하는 이 과정에서 친일파들도 적지 않게 힘을 보탰다. 이들은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도왔고, 결과적으로 독도 강점의 조연 역할을 수행했다.

동학군에서 친일파로 

그런 인물들 속에 일진회장으로 유명한 이용구가 있었다. 그는 1905년 9월 5일의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기 3개월 전부터 군수물자 지원으로 일본군을 응원했다. 경비 부족으로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느끼던 일본군이 막판까지 버틸 수 있게 도와줬던 것이다. 1911년에 이인섭이 저술한 <원(元)한국일진회역사>에서 그 상황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3권에 인용된 <원한국일진회역사>는 이용구가 일본군을 도운 방식이 단순히 국방헌금 내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음을 보여준다.

일진회가 해체된 이듬해에 발간돼 구(舊)한국일진회라는 의미로 원한국일진회라는 표현이 제목에 들어간 이 책은 이용구가 1905년 6월 10일부터 10월 24일까지 만주 주둔 일본군에 군수물자를 지원했다고 알려준다. 포츠머스 강화조약 후로도 1개월 보름 넘게 일본군을 도왔던 것이다. 이 책은 이용구가 1천 명 규모의 북진수송대를 조직했으며, 군수물자 전달뿐 아니라 러시아군 정탐 활동도 병행했다고 설명한다.

이 일에 대해 일본은 감사 표시를 잊지 않았다. 1907년에 이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 일에 관해 1910년 5월 8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일진회장 이용구는 일본 병졸이 북진할 때에 특별한 공효가 있다 하여 일본으로서 훈삼등 서보장(원문에는 동화장으로 잘못 표기)을 주었다더라"라고 보도했다. 이 훈장 수여는 일본이 러시아를 꺾고 독도 강점을 굳히기하는 과정에서 친일파들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러일전쟁 얼마 전만 해도 이용구는 일본제국주의와 대립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반외세·반봉건을 외친 동학군의 일원이었다. 1868년 경상도 상주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2세 때인 1890년 동학에 입교해 제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런 뒤 1894년 동학전쟁 때 충청도 청주에서 참전했다.

1898년 관군에 체포됐다가 풀려난 그는 1901년 제3대 교주 손병희의 일본 망명 때 동행했다. 그런 뒤 1903년 손병희의 지시로 귀국해 포교에 나섰고, 1904년 9월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진보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동년 12월 엉뚱하게도 친일단체인 송병준의 일진회와 통합해 13도총회장을 맡았고, 이듬해 12월 일진회장이 되어 1910년 9월 해산 때까지 조직을 이끌었다.

이용구가 손병희의 의중을 벗어나 일진회와 손잡은 이유와 관련해, 성주현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의 <천도교에서 민족지도자의 길을 간 손병희>는 동학을 계승한 진보회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피할 목적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 책은 "진보회원들이 정부로부터 탄압받았을 때 일진회가 변호하거나 석방될 수 있도록 적지 않은 압력을 가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진회를 도피처로 삼아 정부 탄압을 피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 의식이 불철저했던 점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학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 유사시를 명분으로 임의로 파병한 일본은 조선을 무대로 전개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조선 관군 및 지주 민병대를 끌어들여 동학군을 진압했다. 이런 데서도 나타나듯이 동학 전쟁 당시 이용구는 조선 관군 및 일본군과 대립하는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이용구는 조선 정부와 일본 중에서 전자에 대해서는 적대적 태도를 계속 유지하는 한편 후자에 대해서는 태도를 바꿨다. 이런 변화가 러일전쟁 중의 친일 행위로 나타났다. 조선 정부의 박해와 더불어 일본에 유리한 전황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로부터 1906년에 출교 처분을 받았다. 이에 대한 반발로 시천교를 창립하고 교주가 됐다.

친일로 돌아선 이용구는 그 노선을 확고히 견지했다.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보름 전인 1905년 11월 5일에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돼야 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선언서에서 그는 분연히 궐기할 힘이 없다면 "우방의 지도에 순응하여 문명을 진척시키고 독립을 유지함이 가하다"라며 일본의 지도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그런 뒤 "그 지도 보호에 의지하여 국가의 독립과 안녕, 그리고 행복을 영원무궁하게 유지하고자 여기에 감히 선언한다"고 천명했다.

보호국이 되는 선에서 독립을 유지하자고 했던 그는 1909년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일로 인해 일본 여론이 험악해지자 이번에는 합방청원운동을 벌였다. 상황에 따라 일본의 의중을 살펴가며 친일적 입장을 선언했던 것이다. 얼마 뒤 일어날 한국의 운명을 마치 예언자처럼 선언하곤 했던 것이다.
  

이용구. ⓒ 위키백과


일본 극우의 칭송

군수물자 보급 등을 통해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돕고 1905년 을사늑약 및 1910년 한국강점 같은 결정적 순간마다 여론몰이에 나서준 그에게 일본은 물질적 보답을 해주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용구 편은 "합병 후 1910년 9월 일진회가 해산될 때 해산비 5000원과 은사금 10만 원을 받았다"라고 설명한다.

일왕(천황) 은사금은 물론이고 단체 해산비까지 받았다. 일본이 그의 공로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다. 1910년부터 1921년까지 평안도 중화군·숙천군·강서군 및 경기도 개성군·연천군에서 군수로 부역한 친일파 김연상(1878~1924)의 월급은 처음에는 50원, 나중에는 약 167원이었다. 1910년경에는 50원이었던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1910년에 이용구가 받은 5천 원과 10만 원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부역 행위는 그렇게 친일 재산 축적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완용보다 일찍 전향한 러일전쟁 시기의 친일파들은 일본이 한국 외교권을 강탈할 기반을 조성했을 뿐 아니라 독도를 빼앗고 이를 굳히기하는 데도 기여했다. 일본은 한국 본토와 독도를 각각 다른 시기에 강점한 이 시기 역사를 근거로, 이 둘을 분리하면서 지금까지도 독도만큼은 자국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러일전쟁 때 일본을 도운 친일파들이 한국 역사에 얼마나 부정적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일을 저지른 이용구에 대해 일본은 1907년에 훈3등 서보장을 서훈한 데 이어 1912년에 훈1등 서보장으로 올려 서훈했다. 또 생의 마지막을 마감하는 이용구를 자국의 품으로 감싸주었다. <친일인명사전>은 "1911년 5월부터 일본 스마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고 한 뒤 "(1912년) 5월 22일 요양지에서 사망했다"라고 기술한다. 일본 극우파들은 사후에도 그를 잊지 않고 칭송했다. 위 사전은 이렇게 서술한다.
 
1934년 11월 일본 우익단체 흑룡회가 도쿄의 메이지신궁교 옆에 세운 일한합방기념탑의 석실 안에 일한합방공로자로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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