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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대취타 공연 모습
 국립국악원 대취타 공연 모습
ⓒ 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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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취타(大吹打)의 령이 나렸다. 포부도 당당한 대취타를 앞장세우고 좌우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수백 필의 말을 탄 호위병들이 일렬 횡대를 지으며 출궁하면 장안이 발칵 뒤집혔다. 위장한 그 대열을 보기 위해 임금의 행렬이 지나가는 길거리에 구름 같이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울이 온통 사람바다를 이룬다. 구경 온 사람들이 다시 행렬을 이루어 따라가면 정말 어마어마한 대열을 만들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대열을 이끌고 가는 대취타가 있다. 대취타는 대취대타(大吹大打)의 준말이다. 

대취타! 그것은 어느 서양인이 느낀 그대로 우주의 신비와 인간사의 애원이 담긴 소리일 것이다. 인간사의 애원을 담은 태평소가 하늘 높이 메아리치며 노래를 부르고, 광대한 우주가 포효하는 것 같은 기상을 담은 나각과 나발이 어울려 제각각 마음 내키는 대로 그러나 아주 규칙적으로 야단스럽게 호령한다.

자바라와 용고 그리고 장고 같은 타악기들도 저절로 신이나서 난리를 피우는 것을 보면 천지인이 하나가 돼 개벽의 새세상을 만들고 난 후 신나는 잔치를 벌이는 것 같다. 대취타는 그렇게 위엄 있고 장대하고 신나는 소리이다.

대취타는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제46호로 1971년 6월 10일 지정됐고 1998년 6월 5일 대취타에서 피리정악 및 대취타로 명칭이 변경돼 보존되고 있다. 오늘날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취타는 대한제국 대취타의 마지막 명맥이었던 당시 겸내취(兼內吹) 임원식(林元植)에 이어 최인서(崔仁瑞)가 겸내취의 법통을 이어 왔으며, 현재는 정재국(鄭在國)으로 이어오고 있다.

대취타에 대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취타란 부는 악기(취악기)와 치는 악기(타악기)를 함께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대취타는 왕의 행차나 군대의 행진 또는 개선 등에 취타와 세악(비교적 음량이 적고 실내에 알맞은 악기들로 연주하는 국악 합주)을 대규모로 연주하는 것으로, '무령지곡'이라고도 한다. (...) 취타수들은 황색 옷을 입고 남색 띠를 두르며 머리에는 초립을 쓰고, 악기는 징, 장구, 북, 나발, 소라, 태평소 등으로 편성된다.

(...) 한말 일본에 의해 군대가 해산된 후 형식을 갖추어 연주한 적은 없으며, 민간의 광고악대나 사찰의 의식에 사용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지금은 거의 절멸상태에 있다. 대취타는 우리 선조들의 기개를 한층 더 느끼게 해주는 고귀한 음악으로 그 가치가 큰 소중한 문화재다.
 
우리 선조들의 기개를 느끼게 해주는 대취타. 지금은 일부만 남아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지만 왕의 거둥이나 귀인의 행차, 그리고 군대행진에서 선전관청(宣傳官廳)과 영문(營門)에 소속된 취타수(吹打手)에 의해 연주되던 행진곡 풍 군례악(軍禮樂)이며, 아명(雅名)으로는 무령지곡(武寧之曲), 속명으로는 대취타, 세칭 구군악(舊軍樂)으로 칭했다. 

그리고 취타를 달리 고취(鼓吹)·고취악(鼓吹樂)이라고도 하는데, 이 또한 치는 악기와 부는 악기의 연주라는 뜻으로 취타와 같은 말이다. 곧 불고 치는 군악기에 북·장구·피리·젓대·해금이 취타에 합쳐진 것을 대취타라 했고, 순수한 군악기 만의 취주(吹奏)를 취타라 하고, 피리·젓대·해금 같은 일반악기의 취주를 세악(細樂)이라 하였다. 취타의 주자(奏者)를 취고수(吹鼓手) 또는 취악내취(吹樂內吹)라 하며, 세악의 주자는 세악수(細樂手) 또는 세악내취(細樂內吹)라 하였다. 

취타와 세악으로 구성된 대취타와 악수 중 황의초립(黃衣草笠) 차림의 취악내취는 호적·나발·나각·대각·발라(鈸鑼)·장고·용고(龍鼓)·징(鉦)·나(鑼) 등의 악기로 한 조(組)를 이루어 군중(軍中)의 행진곡·승전곡의 취타를 주로 연주하고 세악수 연주에도 합주했다.

오늘날 전하는  대취타의 악기 구성은 다음과 같다.

태평소는 나무로 된 원추형의 긴 관 끝에는 금속성의 나팔꽃모양의 동팔랑(銅八郞)이 있어 음색이 강하고 화려하며 높다. 태평소는 국악기 중 가장 음량이 큰 선율 악기인데, 소리는 거칠지만 장쾌하고, 때로는 애처로운 느낌마저 들게 한다.  부는 방법에 따라 배음연주가 가능하나, 대취타에서는 한음만 길게 끌어 연주한다.
                                     
자바라는 바라 혹은 제금이라하는데, 중동지방의 '찰바라'라는 말의 한자 표기를 우리식 발음으로 읽은 것이라 한다. 대취타는 물론 불교의식이나 굿에서도 많이 쓰이는 자바라는 절에서 쓰는 동발, 궁중무용에 쓰는 향발 등이 있다.

용고는 북통에 용그림이 그려져 있는 북이다. 보통 북을 매는 방식과는 달리, 용고는 배에 수평이 되도록 하여 북면이 위, 아래를 보도록 매는 게 특이하다. 북통에 세 개의 고리가 있고 여기에 끈을 매어 허리와 어깨에 돌려 묶은 다음 양손에 북채를 들고 북의 윗면을 두드린다. 
                                         
나각은 '나(螺)' 또는 '소라'라고도 한다.  바다에서 사는 큰 소라를 잡아 살을 꺼내고, 꽁무니 뾰족한 끝부분을 갈아 취구(吹口)를 만들어 끼운다. 일정한 크기는 없으며 소라의 원형 그대로 쓰기도 하고, 천으로 거죽을 씌우기도 하며 속에 붉은 칠(朱螺)을 하여 모양을 내어 치레하기도 한다.

이 악기는 낮은 외마디 소리이지만 웅장하고 우렁찬 지속음을 낸다. 연주법은 나발과 같이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로 김을 불어넣어 입술의 진동으로 소리 내는데, 음높이는 소라의 크기에 따라 다르다.

나발은 놋쇠로 긴 대롱같이 만드는데, 부는 쪽은 가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굵어지면서 끝이 퍼져있다. 길이는 약 115cm이고, 금속성의 우렁찬 음색을 가지며, 보통은 낮은 음 하나만 길게 냄. 군중(軍中)에서 신호하는 데 쓰였고, 대취타·농악 등에도 사용됐다.

징은 놋쇠를 녹여 둥근 그릇 모양의 거푸집에 부어 만든 주물악기다. 크기는 지름이 대략 21㎝부터 50㎝까지 비교적 다양하다. 지름이 크고 재질이 두꺼울수록 울림이 깊다. 징채는 긴 나무막대 위에 헝겊을 감아서 만들거나, 짚을 사용해서 통으로 끝이 뭉툭하게 만들어 쓰기도 한다. 징 외에도 금金, 금징(金鉦), 대금大金, 고취징(鼓吹鉦), 대양 등으로 다양하다. 

그리고 장구 등으로 현재 구성돼 있다. 그리고 악기 외에 시작과 끝을 알리는 집사(執事)는 지휘봉이라 할 수 있는 등채를 들고 "명금일하대취타(鳴金一下大吹打) 하랍신다"하고 호령하면 연주가 시작된다.
 
숭례문 밖 나오시니, 계라차지(啓螺差知) 선전관이
자주 걸어 예까지 와서
취타를 청한 후에, 겸내취 패두(牌頭) 불러
취타령을 내리오니, 겸내취 거동 보소.
초립(草笠) 위에 작우(雀羽) 꽂고, 누런 천익(天翼) 남전대(藍纏帶)에
명금삼성(鳴金三聲)한 연후에, 고동이 세 번 울며,
군악이 일어나니, 엄위한 나발이며,
애원한 호적이라.
정기(旌旗)는 표표(飄飄)하고, 금고(金鼓)는 당당하다.
한가운데 취고수는, 흰 한삼(汗杉) 두 북채를
일시에 수십 명이, 행고(行鼓)를 같이 치니 
듣기도 졸거니와, 보기에도 엄위하다. '한양가(漢陽歌)', 1844, 헌종11년

오늘날 대취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한양가다. 겸내취는(兼內吹)는 조선후기에 선전관청에 속해 군영의 훈련·왕의 거둥·상참(常參)·조참(朝參) 등의 의례, 진연(進宴)·진찬(進饌) 등의 연향에 참여해 연주한 악대다. 겸내취는 황철릭(黃天翼을 착용했는데, 현재 대취타 연주의 복식으로 전승되고 있다.

겸내취의 악기 편성은 대개 나발(喇叭)·나각(囉角)·자바라(啫哱囉)·호적(胡笛)·용고(龍鼓)·정(鉦)·라(鑼) 등이고, 규모는 의례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전좌시위(殿座侍衛)에서는 23명, 동가시위(動駕侍衛)에는 6명에서 77명, 궁중연향에서는 10명 내외로 구성됐다.  겸내취는 왕의 거동이나 궁중의례, 그리고 궁중잔치 등 다양한 쓰임세를 가진 편성이며, 겸내취가 바로 오늘날 대취타의 원형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대취타의 시작과 다르게 명금삼성 즉 징을 세 번 치고 고동 즉 나각이 세 번 울며 군악이 일어남을 알 수 있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대취타곡은 장(章)은 7장으로 구성됐으며, 1장단은 12박(拍)으로 소삼(小三)·대삼(大三)이 모여 이루어졌다.

이 곡은 모두 19각 반각(제1각 제1박에서부터 제20각의 제6박까지)으로 돼 있는데, 제7장 끝에서 제1장 제3박으로 반복하는 도드리형식(還入形式)으로 돼 있으며, 각 장은 장단의 처음 또는 중간에서 시작하고 끝맺는 부정형(不定型)으로 분장(分章)돼 있는 것이 다른 곡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점이다.
 
1961년 대취타 복원 당시 사용된 무령지곡 악보다. 이 악보는 현행과 다르게 7장으로 분장돼 있고, 악보의 오른쪽 하단에 이병성(李炳星)이라는 이름과 날짜(1939.3.24)가 기록돼 있다. 이때 최인서가 불러 주는 음악을 이병성이 기보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소장자 최인서, 기증자 정재국.
 1961년 대취타 복원 당시 사용된 무령지곡 악보다. 이 악보는 현행과 다르게 7장으로 분장돼 있고, 악보의 오른쪽 하단에 이병성(李炳星)이라는 이름과 날짜(1939.3.24)가 기록돼 있다. 이때 최인서가 불러 주는 음악을 이병성이 기보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소장자 최인서, 기증자 정재국.
ⓒ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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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행진음악을 대표하는 대취타의 역사적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멀리 고구려의 안악3호분 벽화에 보이는 고취악이다. 커다란 징을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행진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각(角), 북, 요(鐃) 등 위장한 대열을 이루며 고구려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벽화만 보아도 어머 어마한 행진을 상상할 수 있다. 대략 4세기 중반 이 벽화가 그려진 시기이므로, 고구려고취악의 위용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 시기 문무왕조의 기록 중 '664년 성천 구일 등 28명을 부성에 보내 당악을 배우게 했다'는 걸 보아, 이때 당악 중 고취 계통의 음악을 처음 배워 수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고려조에 위장(衛丈)과 노부의식(蓾簿)으로 고취악이 정비된다. 국왕이 행차를 하고 거동할 때 일정한 의식을 갖추는 것을 위장과 노부의식이다. 위장은 가장 큰 규모의 의식을 법가위장이라 했고, 연등위장·팔관위장 등 있었다. 노부도 의식에 따라 법가노부·팔관노부·선사노부·연등노부 등으로 구분됐다.  

법가위장의 경우 임금의 수레 앞에 취각군사 20명이 따랐고, 수레 뒤에는 취라군사 24명이 따랐다. 행차에 따라 고취군사의 수가 틀렸고, 이들 군사는 행악 계통의 고취악을 연주했을 것이다. 법가노부에서는 놋쇠로 만든 징 종류인 금정, 둘러메고 가면서 치는 북 종류인 강고, 특수한 형태의 북인 도고 등 타악기들이 주심이었고, 팔관노부의 경우 이들 타악기를 포함 40여종의 타악기와 취각군사가 포함돼 있었다.

이들 위장과 노부위식에 타악기와 관악기에 의해 고취악기가 연주됐을 것이고, 임금의 수레 앞뒤를 따르던 취각군사나 취라군사의 전통이 조선조에 와서 전부고취와 후부고취로 계승된다.

조선조 성종때 편찬한 <악학궤범>을 보면 고취의 종류로 전정고취(殿庭鼓吹)·전후(殿後)고취·전부(前部)고취·후부고취로 나누고 있다. 한 부류는 궁궐의 뜰에서 하는 것과 한 부류는 임금의 수레 앞뒤를 따르는 고취다. 

조선 후기 세악과 내취가 등장한다. 현행 대취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 음악의 등장이다. 세악과 내취는 전부고치와 후부고취와 같은 고취악을 연주했을 것이다.

세악수와 취고수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숙종 21년인 1701년 일본통신사 행렬도에서다. 이때 사신 행렬의 앞에 가는 악대를 취고수라 했는데, 악대가 나발수, 나각수, 고타수, 삼혈수, 쟁수, 태평소, 자바라, 동고따위로 편성돼 있어 대략 대취타와 비슷한 편성을 보인다. 세악수는 해금, 북, 젓대, 장고, 피리, 동고, 전악 등으로 이루어졌다. 취고수의 악기편성은 곧 후대의 내취와 긴밀한 연관을 보여준다. 

그 뒤 영조 22년 편찬된 <속대전>을 보면 내취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겸내취와 원내취가 있어 임금이 거동 할 때 시위한다고 적고 있다. 이들 내취들은 병조에 속해 있는 군악재원으로 추측되고, 임금의 행차를 따르는 시위대의 일원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정조가 수원으로 능행하는 모습을 그린 능행도를 보면 어마어마한 행렬이 뒤따르고 있는데, 1844년 한양의 풍경을 읊은 '한양가'를 보면 그때 행진을 하던 내취 모습을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다. 

장쾌하고 씩씩하고 당당한 위풍을 가진 음악, 대취타는 그래서 고취악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여지가 있으면 고취악에 대해 자세히 검토해보겠지만 한 가지 덧붙일 사실은 행진음악에는 꼭 대취타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취타계열이 임금이 탄 어가 앞에 섰다면 어가 뒤를 따르는 해금 대금 피리 따위를 부는 세악수(細樂手)들이 있었다.

조선 말기 서양 군악대를 설치한 뒤부터 전통 군악대를 구군악이라 불렀다. 구군악으로 궁중 선전관청(宣傳官廳)에 겸내취(兼內吹)가 있고, 오영문(五營門)에 취고수(吹鼓手)가 있었다. 대취타를 연주하는 악수를 '취고수', 혹은 '취타내취(吹打內吹)라 하고, 세악취타를 연주하는 악수를 '세악수(細樂手)' 혹은 '세악내취(細樂內吹)'라 하였다. 취타수는 누런 빛깔의 전복(胡服)에 초립(草笠)을 썼다.

또한 보통 취타에는 어가(御駕) 앞에서 연주하는 세악취타(細樂吹打)와 어가 뒤에서 연주하는 대취타(大吹打)가 있었다. 어가 앞에는 피리·대금·해금·장구·북 등의 삼현육각 편성으로, 음악도 취타(萬波停息之曲)·길군악(折花)·길타령·염불타령·별우조타령(金殿樂)·군악(별곡타령) 등을 연주한다.

그리고 어가 뒤에는 태평소·나발·소라·자바라·징·북 등 음량이 큰 악기들로 편성된 이른바 대취타이고, 그 음악도 대취타(일명 武寧之曲)·능계·취타굿거리 등을 연주한다. "군악"은 〈관악영산회상〉의 "군악"과 같은 곡이고, "별우조타령"도 그 계통의 음악으로 보인다. 오늘날 이들 세악취타 음악이 취타계통으로 전하고 있다. 조선조 마지막 명맥이었던 당시 겸내취(兼內吹) 임원식(林元植)에 의해 대취타가 오늘날 전하고 있다.

또 하나 특기할 점은, 현행 대취타는 궁중정재인 선유락을 반주하고 있다. 행차 때 사용된 내취와 함께 궁중에도 장악원 악공들로 이루어진 내취가 있었고 이들 연주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원식 또한 그 전통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기야 태평천하에 만사가 낙낙하니 기쁘기 한량없구나. 배 띄워라! 늘어진 버들가지에 세월이 놀고 있으니 나발 소리는 하늘의 평화를 부르고 소라의 고동 소리는 뱃고동 소리로다. 어기여차 뱃놀이 가자! 태평소가 목놓아 소리를 하니 자바라가 박수를 치고 용고와 징이 응수를 하는구나. 한강 유유한 강물 위에 채선을 띄우고 오색창연한 천을 매어 채선을 두고 돌면 강변을 따라 등불이 타오른다.
 
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의 봉수당진찬도 세부
 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의 봉수당진찬도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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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이전에 만들어진 선유락 정재는 순조 이후 고종 광무 2년까지 궁중에 큰 잔치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공연된 정재다. 아주 웅대하고 호화스러운 선유락은 순조 이후 가장 대표적인 궁중무용으로 등장하며 잔치를 대미로 장식한다. 그래서 궁중의 각종 의례를 담은 진찬의궤(進饌儀軌)에 선유락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이 순조 이후 나타난다.

대취타는 이렇게 임금의 행차나 군대의 행진에 쓰였음은 물론 궁중의 잔치 음악으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취타는 임진왜란 이후 나타난 취고수를 바탕으로 내취에서 그 모습이 비교적 확연히 드러나며 오늘의 대취타로 정립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당시의 대취타는 오늘과 같이 10명 내외의 편성이라기보다는 수백 명이 편성된 아주 장대한 악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의 영고성쇠와 더불어 대취타의 모습도 변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위엄이 일제에 의해 고스란히 무너진 것처럼 고취악의 위풍당당한 모습 또한 무너진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제 대취타가 큰소리로 호령하는 모습을 다시 살려내는 것은 나라의 자존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대취타의 령을 다시 내리자.

태그:#대취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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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평론가. 한국음악학 박사. 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음악평론 당선. 96년 한국음악사학보 신인논문상 수상. 전 국립전통고 기획실장 국립극장 기획위원 국립국악원 기획홍보팀장 삼청각예술감독, 대명리조트 레저문화연구기획실장 역임. 현 사)전통예술교육문화협회 한민족문화예술세계화포럼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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