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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나 역사철학적 밑바탕이 없이 기교만 배우는 서예는 알맹이 없는 쭉정이에 불과하죠. 글씨 배우겠다고 오면 글을 먼저 공부하라고 해요. 저도 평생 한(동양)학을 배우며 글쓰기를 했거든요. 제 작품을 보고 서당글씨라 깎아내리는 이가 있는데, 언짢지 않아요. 추사도 기득권사회 조선의 이단아였거든요. 비주류 삶을 살아보니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진보 문예운동에 빠져들었고, 그 속에서 상생의 도를 깨달았죠."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열 번째 주인공 전기중 서예가(64·남)의 말이다. 8일 오후 여주박물관(강좌 현장)과 그의 집·작업실을 오가며 만난 전 작가는 서예의 근본은 학문(한문 또는 한글)의 깊이라고 단언했다. 잔기술(기교)과 가짜 서화(書畵)를 경계하라고 했다.

서예의 정의를 묻자 전통의 시(詩)·서(書)·화(畵)에서 일제강점기 때 서를 서도(書道)라 가르쳤고, 해방 뒤 일제잔재 청산 과정에서 서예(書藝)로 바뀐 것이라 했다. 일본의 서도나 중국의 서법(書法)에 비해 그 의미가 축소(강등)된 것이란 설명이다.
 
서예가 전기중.
 서예가 전기중.
ⓒ 최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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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를 보면 고대부터 6대 학문의 하나로 서가 이어져왔죠. 고려 때도 서는 매우 중시됐죠. 조선 들어 달라졌어요. '큰 글씨는 추하지 않으면 되고, 작은 글씨는 지방 쓸 줄 알면 된다'고 했어요."

한학자 집안 서당에서 글 배워

그는 조선시대 풍미한 송설체(원나라 조맹부가 시초, 개성 중시하는 송(宋)대 서풍과 달리 복고 필법) 문제도 지적했다. 고려 때 흐름인 구양순·안진경체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는 것. 추사도 송설체를 썼지만 금석학 등을 공부하며 새 글씨풍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고향 울진 유학자 할아버지 서당에서 글(한자)을 배우며 서예 인생이 시작됐다. 할아버지는 그가 8살 때 여주로 이주해 다시 서당을 열었다. 10살 때 이미 수준급이었고, 초·중 때는 학교 선수였다. 고교는 포기하고 할아버지 동문 제자가 충청도에서 운영하는 서당에 들어가 군입대 전까지 공부했다.

그 뒤 위기가 찾아왔다. 군복무시절 서예 특기병(행정)으로 가려했지만 중졸 학력 때문에 좌절됐는데, 사회에 진출하며 위기감이 커진 것. 공장 노가다, 외판원, 농사 등을 전전하며 돈벌이를 했다. 그 때를 그는 '엇배기'라 표현했다. 한학도 최고가 아니고, 남들 한 신학문도 못하던 때다.

"아버지(역시 한학자)가 이천에 서예학원을 낸 거에요. 제대하고 2년쯤 지난 때죠. 학원생 하나를 꼬여 저와 결혼시켰죠. 아내와 궁리 끝에 아버지 밑이 아닌 딴 곳에 서예학원을 내기로 했어요. 하나밖에 없는 여주에 내기로 하고 1988년 서른에 시작했죠."
 
토끼 주제 서화.
 토끼 주제 서화.
ⓒ 최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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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4년여. 컴퓨터가 별로 없었고 직장인도 글씨를 못 쓰면 대접받지 못하던 시절, 배우려는 이들이 많았다. 정원을 40명으로 한정해 받았다. 그러다 IMF. 점수와 관련 없는 서예학원이 밀려나는 1순위. 2010년 이후 수묵화, 민화 등 무료강좌도 늘었다. '신도 없다고 법당 문 닫나'라며 버텼지만, 경영악화로 2012년 학원 문을 내렸다.

"그 뒤 강사를 시작했는데, 박물관·문화원·도서관 등에서 요청이 늘었어요. 하루에 12번 강의를 할 정도였죠. 8년여 바빴죠. 하지만 코로나19로 또 중대 위기를 맞았죠. 줌(ZOOM, 온라인 강의) 수업을 해보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전 아니라고 생각해 포기했죠."

코로나 3년은 개인전에 집중했다. 연 2~3회씩 7번을 치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21년 한글날 전후 가진 '나랏글 오칠사'(한글창제 574년 기념). 574개 천에 한글 서예작품을 써 영릉 옆 세종대왕면 번도5리(구능촌) 논두렁 7백여미터에 사흘간 전시했다. 바우가마(최창석 도예)에서 연 '시를 굽다', 흥천면 상백리에서 개최한 '찬우물 하하하' 등 축제를 기획하기도 했다.

'꼰대글씨' 투박한 예스러움 품격

그 전에도 개인전을 3번 가졌다. 첫째는 2005년 신륵사문화원에서 연 '반야의 품에 안겨'. 어느 음식점 주인의 도움(어느 독지가의 행사비 지원 알선)으로 성사됐다. 두 번째는 2014년 강천보문학관에서 개최한 '동행'. 이천, 동탄 등을 순회했다. 세 번째(초대전)는 2016년 40일간 여주박물관에서 개최한 '이것저것 차이없이'. 세종실록에서 뽑아 쓴 작품 3백점을 전시했다.

글씨 사회봉사(일부는 출연료 받기도)도 1995년 이후 계속 하고 있다. 여주박물관, 여주도자기축제, 한국민속촌, 화성행궁, 과천정부청사, 세종정부청사, 국회헌정기념관, 여러 사찰 등에서 가훈 또는 소원 써주기 등을 했다.

"제 글씨는 투박하고 토속적이라거나 독특하다는 평을 받죠. 2020년 영덕에서 '순풍에 돛달고'(나옹스님 탄신 7백돌 기념전)을 하는데 한 서예가가 '서당글씨'라고 하는 걸 엿들었죠. 꼰대글씨라는 뜻인 셈이죠. 상관없어요. 그게 제 글씨니까요."
 
574개 한글 서예작품을 논두렁 7백여미터에 사흘간 전시한 ‘나랏글 오칠사’전.(2021년)
 574개 한글 서예작품을 논두렁 7백여미터에 사흘간 전시한 ‘나랏글 오칠사’전.(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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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를 극찬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게 단순함이다. 현란함의 극치를 넘어 돌아온 순수. 장자는 음률을 파기하고 악기를 태우고 음악달인 사광(師矌)의 귀를 막아야 사람들의 귀가 트인다고 했다(장자 거협(胠篋)편). 노자는 '큰 솜씨는 서툰 것처럼 보인다'(大巧若拙, 도덕경)고 모순어법(변증법)을 동원했다. 기교를 뺀 졸렬함의 극치에서 만나는 미학이랄까.

그는 고집스럽게 예스러움을 지킨다. 컴퓨터 서체(폰트)를 개발해 팔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글씨를 파는 건 사기라며 일축했다. 여러 전시회를 열며 도록을 한 번도 만들지 않았다. 전액 지원받아 쓰는데 40% 거금을 거기 쏟아붓는 게 아까워 그랬다.

"가장 아픈 추궁은 왜 학위를 따지 않았냐는 것이죠. 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가장 큰 문턱이 학위였거든요. 한결같은 제 대답은 그럴 가치를 못 느꼈다는 겁니다. 자전거를 잘 고치기만 하면 되지, 수리공이 공학박사여야 할 이유가 없듯이요."

왜 그리 서예가 좋냐는 물음에는 예스러운 게 익숙하다고 했다. 탄허 스님(사서삼경과 노장 등 한학에 밝은,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열심히 공부해라고 당부하기도)같은 훌륭한 분들, 그리고 그들의 철학을 배울수록 빠져들었고, 그런 공부를 하다보니 역지사지와 이타심을 배웠다고 했다.

'반야의 품' 등 10번 개인전 '묵직'

서예하려는 이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기교만 배우려는 건 알맹이 없는 쭉정이를 얻으려는 것'이란다. 포기하기 일쑤고 진척도 없다고. 뒷받침이 없으니 흔들림에 떨어져 나갔다는 것. '글씨는 나중에, 글을 먼저'를 강조하는 까닭이다.

그는 여주민예총 지부장을 두 번(2001~2002년, 2018~2019년) 역임했다. 그 뒤 시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문학분과 일꾼(분과장을 그리 표현)을 맡고 있다. 가족은 아내와 두 아들. 첫째는 미술사를 공부했고 둘째는 국문학을 전공했다. 아빠 닮아 서에 능하다. 특히 아들로부터 "존경한다"는 말도 들었다고 뿌듯해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축구. 여주시 대표선수(생활체육)를 하고 있다. 황금돼지축구회 감독도 맡고 있다. 복잡한 글쓰기에 단순한 축구로 스트레스를 날려 좋다고 했다.
 
여주박물관 강당에서 서예강좌 중인 전기중씨.
 여주박물관 강당에서 서예강좌 중인 전기중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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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도 '아름다운 글씨'(그리스어원)를 뜻하는 캘리그라피가 있다. 10세기경부터 이어졌다. 캘리그람(캘리그라피와 같은 뜻 프랑스어)을 본격 사용한 예는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대표적이다. 1918년 시집 '캘리그람'을 출간했는데, 독창적 활자 배열(모자 쓴 여인, 춤사위 등 글자(시구)로 그림 도안)로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이 때문에 그는 초현실주의 시 선구자가 됐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저널 게재


태그:#여주양평, #문화예술인, #전기중, #서예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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