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1 11:15최종 업데이트 23.02.1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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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웅> 스틸컷 ⓒ CJ ENM

 
'누가 죄인인가?'라는 가사가 묵직하게 들리는 뮤지컬 영화 <영웅>이 상영 중이다. 안중근 이후에도 한국 근현대사에는 '누가 죄인인가?' 묻고 싶은 많은 비극이 이어지고 있지만 일본이 답을 하지 않은 채 안중근에게 사형을 언도한 것과 똑같이 아무런 답도 없이 묻히는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

누가 죄인인가 묻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가해지는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영웅>을 보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저격 당일 아침 하얼빈역 끽다점에서 마신 차를 떠올렸다. 

개화 바람 타고 나타난 끽다점

끽(喫)이라는 한자는 매우 낯설다. 담배를 피운다는 뜻인 '끽연'에 가끔 사용되는 정도다. <조선왕조실록>에 '차를 마신다'라는 의미로 '끽다喫茶'라는 표현이 다섯 번(중종실록 1번, 선조실록 4번)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용어는 쓰기는 하였지만 흔한 표현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런데 갑자기 끽다점이라는 표현이 개화 바람을 타고 나타났다. 우리나라 문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를 마감하는 1900년의 3월 17일 자 <황성신문>이었다. 이날 <황성신문>은 영국의 만국박람회 소식을 이렇게 전하였다.
 
영국 글라스고우에서 1901년 여름에 개최할 만국박람회장에 끽다점을 설치한다.
 
이 기사에서 보듯이 영국은 20세기를 만국박람회로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미국에서는 그 전해에 있었던 선거에서 당선된 제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가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되고 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이 해에 시작된 노벨상 과학 부문에 일본 의학자로서 페스트균을 발견한 기타자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郞)가 후보로 올랐다.

우리나라는 대한제국을 선언한 지 5년, 고종이 즉위한 지 38년째를 맞아 휘청이고 있었다. 한성 내에서 첫 전등을 켜는 점등식 행사가 거행되었고, 경부선 기공식이 영등포에서 열렸다.


경부선 기공식 1년 전에 조선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현재의 서대문역에서 인천 제물포까지)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경인선은 당초 미국인 모스(James. R. Morse)에게 부설권이 주어졌으나, 1898년 자금 조달이 어려웠던 모스가 부설권을 일본에 넘겼고, 일본에 의해 1899년 9월에 노량진-제물포 구간이 완공 개통되었고, 이 해에 한강철교 완공과 함께 서대문역까지 전 구간이 완성되었다.

경인선 철도 부설은 제국주의에 의한 이권 침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기차는 전기와 함께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커피도 서구 문명과 함께 조선에 본격적으로 상륙하였다.

20세기 전반기 조선의 커피 문화를 상징하는 단어 중 하나로 등장한 것이 끽다점이다.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작지만 큰 물질인 커피가 조선 사람들 앞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조선에 주재하는 천주교 및 기독교 선교사, 외교관, 기타 사업을 위해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과 왕실 사람들이 마시던 커피가 서서히 일반 백성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사업을 위해 1901년에 조선에 온 프랑스인 폴 앙통 플레상(Paul Antoine Plaisant)이 무악재를 넘어오는 땔감 장수들에게 따뜻한 커피를 주며 흥정을 벌였다는 얘기도 있다. 세기가 전환될 즈음에 신상 커피는 벌써 조선인들의 환심을 사는 데 도움이 되는 음료였다.

1898년에 있었던 고종 커피 독살 기도 사건은 커피라는 낯선 음료의 존재를 조선 사람 대부분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커피를 즐기던 고종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 빌미가 되어 1907년 7월 20일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 자리에 커피 독살 기도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 순종이 즉위하였다.

순종이 즉위하던 해에 새로 문을 연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대학병원인 대한의원(지금의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이다. 1899년에 문을 열었던 서양식 병원인 광제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순종 즉위 이듬해인 1908년에 대한의원 본 건물이 준공되었다. 현재 대학로 서울대학교병원 내에 남아 있는 의학박물관 건물이다. 1907년 3월에 착공된 이 건물이 이듬해 1908년 10월 24일에 준공되었다. 이 건물 준공식에 끽다점이 차려졌다.

<황성신문> 1908년 10월 25일 자 보도에 따르면 대한의원 낙성식에 다양한 물품이 기증됐는데 그 명단에 '喫茶店 小澤愼太郞(끽다점 소택신태낭)'이 보인다. 낙성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커피나 차를 제공하기 위해 임시로 차려진 끽다점이었는지, 이 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끽다점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09년 1월 21일 자 <대한매일신보> 3면의 소설 '매국노-나라 팔아먹은 놈'에 '카피차'가 등장한다. 양기탁과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에 독일인 소덕몽의 소설이 '매국노'라는 제호로 번역되어 연재되었고, 제6회에 아래와 같은 장면이 나온다.
 
요셔가 매일 아침에 정면하수에 가서 목욕하고 돌아오면 상 위에 카피차 한잔과 면포 두서너 조각을 준비하여… (필자 주: 요셔는 주인공 이름)
 
당시 서양인들에게는 이미 일상적인 문화로 자리를 잡았던 아침에 빵(면포)과 함께 마시는 모닝커피의 모습이다.

1909년 7월 18일 자 <대한매일신보> 3면 '외보'에는 독일에서 커피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같은 해에 소설가 박태원의 숙부이자 의사였던 박용남이 찬술한 <가정구급법 家庭救急法>의 두통 편에는 "두부에 냉수 또는 얼음조각으로 찜질하거나 혹은 박하를 이마에 바르고 바로 뉘어 안정케 하며, 가비차 咖啡茶 또는 포도주를 조금 주고..."라는 내용이 나온다. 가정에서 취할 수 있는 두통 치료법의 하나로 커피 음용을 권장하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 커피는 이미 일반인들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음료였다.

문명의 이기는 번성하나 나라의 운명은 스러지고

이렇게 확산하던 커피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업소가 확실히 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기차역에 문을 연 끽다점이다. <황성신문> 1909년 11월 3일 자에 '다좌개설茶座開設'이라는 제목이 보이고 이런 기사가 실렸다.
 
남대문정거장에는 1일부터 끽다점을 개설하였다더라.
 
외국인에 의해 철도가 개설되고, 호텔이 지어지고, 전깃불이 밝혀지는 등 문명의 이기는 점차 조선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나라의 운명은 점차 스러져 가던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 남대문역 끽다점 개설 닷새 전인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안중근은 체포 이듬해인 1910년 2월 7일 열린 공판에서 이토를 저격하던 날 아침을 이렇게 진술하였다.
 
거사 당일 이른 아침 7시에 하얼빈 정거장에 도착하여 "모 끽다점에서 휴식을 하면서 차를 마시고 이또의 도착을 고대할…" 

안중근이 마지막으로 마신 차가 커피였는지 다른 차였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기차역 등에 커피와 차를 파는 끽다점이 생기고 여기에서 기차와 사람을 기다리는 문화는 이미 일본과 조선 그리고 중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보통 반가운 가족이나 친구였지만 안중근이 끽다점에서 기다린 것은 민족의 공적 이토 히로부미였다. 스스로 질문을 던졌던 '누가 죄인인가?'의 바로 그 죄인을 기다리며 안중근이 마지막 차를 마신 곳이 끽다점이었다.

(커피 인문학, 유튜브 '커피히스토리' 운영자)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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