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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한 살 터울의 언니가 있다. 우리는 별로 인지하지 못하지만 평생에 걸쳐 꼭 빼닮았다는 말을 들었으니, 닮긴 닮은 모양이다. 하지만 성격은 극과 극이라고 할 만큼 달라서 비슷한 점을 찾기 힘들다.

코로나가 지금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던 때, 언니는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보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갔고 공손하지만 단호하게 말하곤 했다. "선생님! 마스크 써 주세요!"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공익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믿지만 그때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마음을 졸이는 쫄보가 나인 것이다. 

언니와 내 웨딩드레스 

하지만 언제나 내가 뒷전에 서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쯤, 언니는 동네 오빠에게도 할 말을 하다가 험악한 순간을 맞이했다. 급기야 오빠가 주먹을 치켜들었던 때, 상황을 종료시킨 것은 나였다. 나는 한걸음에 달려 나가 우리 언니 때리지 말라고, 절대 안 된다고 울며불며 소리를 질렀다. 

겁에 질려 눈도 똑바로 뜨지 못한 채 언니를 감싸는 나를 보고는, 오빠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되어 돌아갔다. 언니는 반은 농담처럼, 반은 진담처럼, 그때부터 날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말하곤 한다. 쪼끄만 게 자꾸 따라다니니 좀 귀찮지만, 잘 챙겨 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며 말이다.

그 덕분일까. 평생 언니가 있는 혜택을 톡톡히 누리며 살았다. 나는 패션에 관심도 없는 데다가 재능도 없어서 소위 패션테러리스트가 되기 딱 좋았지만, 이미 엄격한 기준에 의해 선별된 언니의 옷을 입을 수 있어서 흉한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옷을 잘 입는다는 소리도 몇 번쯤 들었으니, 언니가 아니었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분명하다.

학창 시절은 물론,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초년생일 때도 언니는 많지 않은 월급을 쪼개 옷을 사곤 했고 나도 실컷 입을 수 있게 했다. 어쩌다 다툰 날에는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대체로 언니는 너그러웠다. 

언니에 비해 현저히 적었지만 나도 가끔 쇼핑을 했다. 그때도 언니가 함께 가는 것은 우리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대학시절, 몇 번인가 내가 혼자 옷을 사 왔을 때는 언니의 타박을 들어야 했다. "정말 그걸 돈 주고 사 온 거야?" 

그 후 나는 혼자 하는 쇼핑을 완전히 접었다. 애초에 관심도 없었으니 내겐 좋은 일이었다. 나는 언니 덕분에 오랫동안 호사를 누렸고 옷에 관해서만큼은 철저히 언니에게 의지했다.

하지만 잊을 수 없는 하루가 있다. 언니보다 먼저 결혼하게 된 내가 웨딩드레스를 고르러 가는 날이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언니는 그쯤 여러모로 심기가 편치 않아 보여 마음이 쓰였는데, 그날도 바쁜 와중에 어렵게 시간을 냈다고 해 더욱 미안할 뿐이었다. 

그날 나는 언니 앞에서 여러 벌의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그리고 계속해 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게 가장 낫냐고 말이다. 언니는 끝내, 단 한 마디도 답하지 않았다. 내 질문이 반복되자 언니는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내 시선을 외면했다. 어영부영 드레스는 결정되었지만 그녀의 의견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으로 기억되는 날이지만 한 번도 그날의 일을 꺼낸 적이 없다. 언니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 독립을 실감하며 그 또한 독립의 일환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 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사소할 수도 있는 그 일을, 조금은 더 기억할 것 같다.

언니 없이 지금의 나도 없다
 
<시스터스 우린 자매니까> 책표지
 <시스터스 우린 자매니까> 책표지
ⓒ 에이치비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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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이나 지난 그날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시스터스: 우린 자매니까>라는 사진집 덕분이었다. 인물사진에 짤막한 인터뷰가 더해진 책인데, 서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책에서 작가 소피 해리스-테일러는 뿌리 깊은 질투심, 그리고 내면에 공존하는 두려움과 사랑 등을 (인물사진과 인터뷰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자매라는 관계의 바로 그런 매혹적인 요소를 명민하게 포착했다. 또한 그녀에게 이번 작업은 단순히 창의적인 실험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에겐 훨씬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소피 본인의 자매 관계는 항상 순탄치 않았고, 그러다 결국은 서로 멀어지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작품을 통해 자매라는 밀접한 사이의 비밀을 찾아내려 했던 것이다." (4쪽)

어떤 페이지를 펼치든 고유한 분위기를 풍기는 자매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을 설명하는 문장들이 이어지는데, 예를 들면 이렇다. 앨리스와 플로 자매가 인위적인 웃음기 없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더해지는 말은 이렇다.
 
"앨리스: 플로는 내게 세상을 보는 시각을 갖게 해요. 플로가 없었다면 삶이 훨씬 더 힘들었을 거예요. 가끔은 내 속도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드는데, 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플로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알 때가 많아요."

이것은 예일 뿐, 복잡미묘한 자매 사이를 보여주는 사진과 글들이 수두룩하다. 글자 수로만 치면 얼마 되지 않는 이 책을, 나는 꽤 오래 보았다. 책 속에 등장하는 자매는 물론 우리 자매가 보내온 많은 날들을 떠올려야 했기 때문에.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자매가 있는 사람뿐 아니라 자매가 없다 해도, 그와 비슷한 관계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겁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때로는 아슬아슬하지만, 퍽 달콤한 나머지 끈적이는 그 관계 말이다. 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울고 웃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그들이 이어온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밀물과 썰물처럼 채우고 비우는 것은 믿음, 질투, 추억, 상실, 토라짐,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작가노트> 중에서

시스터스 : 우린 자매니까

소피 해리스-테일러 (지은이), 강수정 (옮긴이), 에이치비프레스(2019)


태그:#시스터스우린자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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