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03 11:09최종 업데이트 23.02.0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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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신전이 쿠시에게 맥주 재료로 곡물을 빌려준 기록 해설 ⓒ 윤한샘

 
"인생의 행복, 그 이름은 맥주, 인생의 불행, 그 이름은 원정"

기원전 3000년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신전은 쿠심에게 맥아와 곡물을 빌려주며 무른 점토 위에 이름과 곡물의 양을 적었다. 그가 구매한 451리터의 보리 낱알과 405리터의 맥아는 맥주 재료를 위한 것이었다. 

맥주 양조에 사용되는 빵도 있었다. 기원전 2500년 경 수메르 신전은 맥주 양조를 위해 두 번 구운 빵, 바피르를 대여하고 이자, 마쉬를 수령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바피르(bappir)는 '마신다'라는 의미의 카슈(kas)와 '빵'을 의미하는 닌다(ninda)를 합친 단어로 포르투칼어 빵(pão) 또는 맥주(bier)의 어원이다. 이렇게 빵과 맥주에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은 단군 할아버지가 내려오시기 전, 인류가 남긴 기록만 봐도 알 수 있다. 
 

맥주용 빵, 바피르를 기록한 점토 ⓒ 윤한샘

 
지금부터 약 8천 년 전 수렵 생활을 하던 인류는 지금의 이라크와 시리아가 있는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한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범람하며 형성한 비옥한 옥토는 농사를 위한 천혜의 조건이었다. 한 개의 씨앗을 심으면 무려 8개의 낱알이 달릴 정도로 땅은 기름졌다. 

농경이 시작되고 식량이 늘어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이 세운 도시는 수메르라고 불렸다. 수메르인들은 빈번한 홍수를 막기 위해 관계시설을 구축하고 댐을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기하학, 수학, 천문학뿐만 아니라 토목술이 발전했으며 바퀴와 벽돌 같은 기술도 발명됐다. 가장 중요한 건 문자의 등장이었다. 잉여 곡물을 기록하기 위한 단순한 표기가 문자로 진화했다. 문자는 인류의 역사를 선사시대와 문명시대로 구분 짓는 중요한 잣대였다. 수메르는 인류 최초의 문명을 품은 도시 국가였다. 


수메르인들이 경작한 곡물은 적은 강수량에 적합한 밀과 보리였다. 건조한 곡물을 빻아 물에 섞으면 곡물 죽이었고 구우면 빵이 됐다. 특히 보관이 용이한 빵은 주식으로 사랑받았다. 맥주는 빵과 이를 호시탐탐 노리던 미생물의 조우에서 시작됐다. 우연한 기회에 빵이 물에 젖었고 이때 생긴 틈을 이 작은 녀석들은 놓치지 않았다. 인간에게 해로운 결과가 대부분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이 녀석들이 생성한 결과물은 시큼하고 꿈꿈한 향미가 났다. 이것을 먹은 누군가의 건강에 이상 없다는 게 알려지자 마법이 일어났다. 이 음료는 물보다 안전했고 갈증해소에 탁월했으며 때로는 힘을 북돋아주기도 했다. 심지어 마시면 마실수록 기분도 좋아졌다. 

수메르인들은 물과 빵을 통해 생성되는 이 신비의 음료를 의도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과학이 없던 시절 양조는 신의 마술과 인간의 예술이 절실한 과정이었다. 맥주에 마법을 일으키는 신의 이름은 닌카시였고 그녀의 가호로 탄생한 태곳적 맥주는 시카루라고 불렸다. 
 

기원전 3000년 경 수메르인들이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기록한 자료 ⓒ 위키피디아

 
시카루는 식수와 식량을 대신했고 노동주로 제공됐으며 신에게 바치기도 했다.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음료였다. 수메르인들은 항아리에서 발효된 시카루를 갈대로 만든 빨대로 마시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맥주에서 나는 신맛과 쿰쿰한 향은 당연한 것이었고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이 향미를 즐겼다. 

멀고도 가까운 맥주 속 신맛

불과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신맛이 나지 않는 맥주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신맛은 오미 중 가장 애매한 맛이다. 당과 단백질을 의미하는 단맛과 감칠맛, 독을 알려주는 쓴맛, 필수 미네랄인 나트륨을 감지하는 짠맛과 달리 음식의 부패나 덜 익은 과일 정도를 가르쳐줄 뿐이었다. 경험에 따라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며 선천적으로 선호되지도 않았다. 

이런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신맛은 생명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감각이다. 신맛의 정도는 산에 의해 결정된다. 산은 유기체 활동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에너지를 대사하기 위한 이온 간 전환이나 몸 안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장 속 유산균이 만드는 젖산이 유해균 증식을 막아준다는 사실이 비근한 예다. 

맥주가 물보다 안전했던 이유도 바로 젖산균에서 나오는 젖산과 야생효모가 배출하는 알코올 때문이었다. 산소가 없는 조건에서 효모가 당을 먹고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젖산균이 젖산을 생성한다는 발효 기작이 밝혀진 건 불과 19세기말이었다. 효모가 체계적으로 배양되고 발효조가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되고 나서야 쿰쿰한 향과 신맛은 맥주 세계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더구나 황금색 라거의 등장은 맥주의 기준을 깔끔함과 청량함으로 바꿔놓았다. 20세기 인류는 맥주에 약간의 신맛을 허락했을 뿐, 입 안을 짜르르 울리는 불경은 허용하지 않았다. 

현대판 시카루, 람빅

온 세상이 황금색 라거로 물 들었지만 자연의 힘으로 탄생하는 맥주는 사라지지 않았다. 벨기에 한 구석, 허름한 양조장 내부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고 듬성듬성 거미줄도 있었다. 사방이 뚫려있는 통 안에는 엿기름 냄새가 가득했다. 맥즙이었다. 창문으로 바람을 타고 넘어온 미생물들은 맥즙 속 당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지금부터는 작은 미물들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를 바랄 뿐이다. 

람빅은 야생 효모와 젖산균으로 양조되는 벨기에 전통 맥주다. 최초의 람빅 양조장은 1702년 팀머만스로 알려졌지만 그 역사는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70% 보리 맥아와 30% 밀로 추출한 당물, 즉 맥즙을 자연 속 미생물에 맡긴다는 점에서 람빅은 태곳적 맥주, 시카루와 같다. 수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맥주 항아리처럼 양조장에 기생하는 야생 효모와 젖산균은 쿨십이라고 불리는 개방된 통에서 천천히 맥즙을 발효한다. 이후 맥주는 오크통에서 적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정도 추가적인 발효와 숙성을 거치며 다채로운 향을 입는다. 낮은 알코올을 가진 시카루와 달리 람빅의 알코올 도수는 4~8% 정도로 다양하다. 

야생 효모와 젖산균은 일반 맥주에서 사용되는 배양 효모와 달리 당을 깨끗이 먹어치운 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향미를 뱉어낸다. 외양간에서 맡을 수 있는 퀴퀴한 냄새와 땀이 흠뻑 밴 셔츠에서 나오는 꼬릿한 향이 코끝을 찌른다. 단맛은 절제되어 있으며 바디감은 깔끔하고 드라이하다. 쓴맛은 낮지만 혀끝을 짜르르 울리는 시큼한 맛은 기절초풍할 정도로 세다. 그래서 람빅 양조사들은 오래 숙성된 람빅과 젊은 람빅을 혼합한 괴즈나 설탕을 넣어 단맛을 높인 파로, 체리와 라즈베리 같은 과일을 넣은 프룻 람빅으로 음용성을 높였다.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가장 혁신적인 람빅, 깐띠용 괴즈

브뤼셀에 설립된 깐띠용은 살아있는 람빅 박물관이다. 1900년 폴 깐띠용과 아내 마리는 람빅 블랜더로 사업을 시작했다. 가장 전통적이고 원형에 가까운 람빅을 만들어 온 깐띠용은 120년 넘도록 양조 장비를 바꾸지 않았다. 그 안에는 양조장의 정체성을 지켜온 미생물들이 살아 숨 쉰다. 

깐띠용의 모든 람빅은 1년 이상 오크통에 숙성되며 서로 다른 오크통의 람빅들과 블랜딩을 거쳐 세상에 나온다. 괴즈라고 불리는 이 카테고리는 오리지널 람빅의 거친 향미를 다듬기 위해 태어났다. 람빅 양조사들은 18세기 수도사 돔 페리뇽이 만든 샴페인에서 괴즈를 착안했다. 18개월 이상 람빅과 6개월 정도 람빅을 혼합한 깐띠용 괴즈는 이 양조장의 아이콘이다.  
 

깐띠용 괴즈 ⓒ 윤한샘

 
깐띠용 괴즈 라벨에는 그 유명한 브뤼셀 오줌싸개 동상을 볼 수 있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12세기 브라반트 공국을 물려받은 고드프리다. 그가 젖먹이에 불과했던 시절 반란군과의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때 유모가 젖을 불리기 위해 마셨던 맥주가 람빅이었다. 전투 전 잠을 자던 고드프리가 깨어 반란군을 향해 힘껏 오줌을 쌌고 이에 고무된 병사들은 승리를 거두게 된다. 사람들은 고드프리의 영웅적 행동을 기념하기 위해 참나무 요람을 브뤼셀 한 복판에 전시했고, 나무가 썩자 오줌싸개 동상을 세웠다. 라벨 속 오줌 싸는 아이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누가 봐도 람빅이다. 

병에는 일반 맥주와 달리 빈티지가 보인다. 람빅은 배치마다 향미가 다르기 때문에 와인처럼 빈티지가 있다. 깐띠용 괴즈를 즐기기 위해서는 와인 오프너도 필요하다. 병뚜껑 속에는 와인처럼 코르크가 보인다. 

코르크가 열리자 야생 효모의 흔적인 마구간 향이 올라온다. 잔에 담긴 깐띠용 괴즈는 불투명한 황금색이다. 시큼하고 쿰쿰한 향을 기대했지만 의외로 신선한 살구와 자두 같은 핵과류의 향이 물씬거린다. 강할 거라고 예상했던 신맛은 부드럽고 우아하다. 마우스필은 미네랄 가득한 암반수처럼 쨍하고 깔끔하다. 섬세한 단맛은 신맛과 균형감을 이루며 몇 잔을 더 마실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는다. 5.5% 알코올도 이런 용기에 한몫한다. 야생 효모와 젖산균이 만든 거칠음은 인간의 손에 의해 유려한 조각처럼 다듬어져 있었다. 

람빅은 맥주의 태곳적 흔적을 가지고 있다. 그 속에는 자연과 맞서며 문명을 이뤄낸 인류의 피, 땀, 눈물이 담겨있다. 그리고 전쟁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는 일상을 행복으로 여긴 수메르인들의 애환도 느낄 수 있다. 하물며 우리라고 그들과 다르겠는가. 시카루와 람빅 속 미물들이 만드는 교훈은 한결같다. 제발,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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