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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은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50분께 '유신체제'의 서막을 알린 3선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사진은 당시 3선개헌안 통과 사실을 보도한 <동아>.
 박정희 정권은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50분께 '유신체제'의 서막을 알린 3선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사진은 당시 3선개헌안 통과 사실을 보도한 <동아>.
ⓒ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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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길 건너편 제3별관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9월 14일 새벽 2시 30분, 공화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이효상 의장의 사회로 단 6분 만에 개헌안을 변칙처리한 것이다. 국회주변 반경 5백m는 1천 2백여 명의 기동경찰이 엄중하게 통행을 차단하고 있는 가운데 개헌지지 의원들만으로 개헌안을 처리한 것이다. 그야말로 신종 쿠데타적 수법이며 역대 개헌사에서 가장 비도덕적인 개헌안의 처리였다. 부산 5·25정치파동, 4사5입 개헌파동에 이은 세 번째의 변칙 개헌이었다. 박정희 집단은 합법적인 절차도 밟지 않고 국민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권력욕만 충만했다. 

공화당이 본회의장을 옮겨가면서까지 변칙적으로 개헌안을 처리한 것은 형식상은 야당의 단상점거 때문이라고 내세웠지만, 실상은 내부의 이탈표가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김종필계열 일부에서는 3선개헌을 반대하고 있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 중에 있던 신민당 의원들은 뒤늦게 변칙처리된 사실을 알고 현장으로 뛰어가서 가구와 집기 등을 마구 때려 부쉈다. 하지만 기차 떠난 뒤의 돌던지기였다. 개헌안을 변칙처리한 이효상 의장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의장직 사퇴서를 제출하는 등, 여권은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냈지만 야당의 분노를 쉽게 달래기는 어려웠다.

개헌안이 변칙처리된 다음날인 15일 서민호는 역시 대중당 대표최고위원의 명의로 성명을 통해 개헌안 무효화의 투쟁에 앞장 설 것을 천명했다.

이제 한국의 민주주의는 엄청난 살인적인 수법에 의해 장송이 되고 말았다. 음흉스러운 늑대 무리들은 야음을 틈타 국헌을 짓밟고 그 예리한 송곳니로 연약한 민주의 심장을 깎아내는 데 서슴치 않았음을 만천하에 드러내놓고 말았다. 

소위 국회의원들을 권력과 금력과 협박으로서 정당한 의사를 막아버리는데, 하물며 국민투표에 있어서는 그 수법이 가일층 악랄하리라는 것 쯤 예측할 수 있지 않은가. 

이에 대비하여 신민당은 종전과 같이 잘 싸워 주어야 할 것이며, 민주주의를 되찾는 길이라면 의원직을 걸고서라도 개헌안 표결 무효화에 투쟁할 각오로서 범야세력을 일치 단합하여 정예개편을 구현하는데 문호를 개방하여 국민의 기대를 저바라지 않길 바란다. 

본인은 민주헌정을 위해 모든 애국지사들과 더불어 과감하게 싸워나갈 것을 다짐하는 동시에 개헌안을 국회에서 저지시키지 못했음을 국민들에게 깊이 사죄드리며 민주의 죽음 앞에 통곡하는 바이다. (주석 2)

서민호는 개헌안의 국민투표 자체를 반대하였다. 국회의원들까지 강압·매수·변절시켜 찬성케 하는 집권세력에게 국민투표는 다시 한 번 개헌안을 합리화시켜주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국민투표를 앞둔 10월 6일 특별 성명서를 통해 이를 지적, 신랄히 비판했다. 주요 대목이다.

왜냐하면 국민투표의 과정에서 반대의 태도를 취한다는 것 조차 자가당착일 뿐 아니라 그들의 방대한 조직력과 금권 내지 관권의 불법작용으로서 그 결과는 뻔한 일이므로 다시 한 번 합리화시키는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이를 재확인한 결과가 되므로 국회처리의 무효를 선언하여 동시에 여기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국민들에게 다같이 국민투표를 보이콧 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따라서 신민당에서도 이점이 있어서 의원직을 걸고서라도 다시 한 번 재고 있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또한 국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여 마지 않으며 앞으로 대중당은 국민투표 자체의 무효화 투쟁에 앞장 설 것을 굳게 다짐한다. 

끝으로 언론인들에게 부탁코저 하는 것은 만성화된 패배주의를 청산하고 과감한 반독재 민주화의 투쟁 대열에 굳건히 서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주석 3)

개헌안의 국민투표를 앞두고 공화당의 지지유세와 신민당의 반대유세가 전국적으로 진행돼 국민적인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공화당은 "안정이냐 혼란이냐, 양자택일을 하자"고 내세우고, 신민당은 "개헌안 부결로써 공화당정권 몰아내자"면서 국민의 지지를 호소했다.

종교계·재야 등이 참여하는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어 개헌저지 투쟁에 나서고 전국의 대학생들이 궐기하는 가운데 10월 17일 개헌안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투표율 77.1%, 최종집계 결과 총투표자 1,160만 4,038명 중 찬성 755만 3,655표, 반대 363만 6,369표, 무효 41만 4,014표로써 개헌은 확정되었다.

개헌안 국민투표 과정에서 정부·여당에 의한 각종 부정과 관권동원이 자행되고 투·개표과정에서도 무더기표 등이 발견되는 등 부정이 나타났다. 국민투표는 부정으로 일관된 하나의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개헌반대 투쟁을 일선에서 지휘해오던 유진오 신민당 총재는 9월 10일 뇌동맥경련증으로 몸져누우면서 국민투표를 이틀 앞두고 10월 15일 특별성명을 통해 "부정과 불법을 막아 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민권투쟁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개헌안이 통과되자 10월 19일 국민투표 결과에 대한 책임과 신병을 이유로 신민당 총재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히고 신병치료차 일본으로 떠났다. 

이로써 박정희는 종신집권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이후의 역사가 보여준 대로 유신쿠데타와 긴급조치 등 더욱 무도한 헌정유린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자신이 만든 헌법을 장식물로 취급하였다. 


주석
2> 앞과 같음.
3>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서민호, #월파_서민호평전, #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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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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