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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끝난 3일 후 박정희 정권은 민중당 대표 서민호를 반공법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문제된 발언은 북한을 현실적으로 국가로 인정해야 된다는 것과 국방비를 줄이기 위해 남북군축을 제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국가보안법과 쌍벽을 이루며 민주인사·통일운동가들을 옥죄는 것이 반공법이다. 

박정희 정권은 서민호가 야권후보 단일화를 명목으로 후보를 사퇴하고 신민당과 함께 공명선거투쟁기구의 책임을 맡아 매섭게 활동한 것에 '괘씸죄'를 찍고 구속한 것이다. 북한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유엔에서 제기되고, 군축문제는 공식 제의한 것도 아닌 '제의하겠다'는 예고편이었다. 그럼에도 박정권은 그를 다시 구속한 것이다. 박정권에서만 네 번째 구속이다.

재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같은 해 6월 8일로 다가온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전력투구했다. 공화당은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된 여세를 몰아 집권당의 입장에서 행정조직의 측면지원을 받은 데다 풍부한 자금을 동원해 유리한 조건 아래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여전히 분열상태의 야당은 자금·조직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5월 15일 후보등록이 마감되자 전국 131개 선거구와 전국구에 출마한 입후보자는 모두 821명으로 평균 5.4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선거전이 시작되면서 공공연한 관권의 개입과 금품수수, 각종 선심공세와 향응 제공, 유령유권자의 조작과 대리투표·공개투표·폭력행위 등 온갖 부정과 타락이 공화당측에 의해 자행되어 선거분위기가 극도로 흐려졌다.

공화당은 득표를 위해 들놀이·친목회·동창회·화수회·부인계 등을 벌이게 하고 타월·비누·수저·돈봉투를 돌리는 등 3·15부정선거를 뺨치는 광범위한 부패선거를 거침없이 자행하였다. 

여당과 야당은 '안전세력 확보'와 '공화당 독재 견제'를 선거구호로 내세웠으나, 정책이나 선거구호는 이미 관심권 밖이고 선심공세와 각종 탈법·폭력행위가 공공연하게 난무하는 타락상을 보였다. 

6·8총선이 이렇게 타락선거로 시종하게 된 것은 공화당이 71년 이후를 내다보고 원내에서 개헌선을 확보하려는 속셈이 있었고, 야당은 결코 개헌선을 허용할 수 없다는 데서 과열경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때 이미 장기집권을 구상하면서 재선의 임기가 끝나는 7대 국회에서 개헌을 강행해서라도 계속 집권할 생각에서 6.8총선을 무리하게 끌고간 것이다. 

6.8선거는 5.3선거 때보다 불과 한 달 만에 유권자 수가 78만여 명이 증가하는 등 유령유권자 조작과 온갖 부정 속에서 공화당의 일방적인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공화당은 당초 목표한 대로 개헌선(117명)을 훨씬 넘는 130석(전국구 27명, 지역구 103명)을 차지했으며, 신민당은 44석(전국구 17명, 지역구 27명), 대중당이 1석(서민호)을 차지했을 뿐 나머지 군소정당은 단 1석도 얻지 못했다. 

서민호는 구속된 상태에서 전라남도 고흥에서 대중당 후보로 출마하여 옥중 당선되었다. 군소정당 후보 중 유일한 당선자이고 옥중 출마자는 '밀수왕초는 박정희' 발언으로 구속된 장준하가 서울 동대문에서 당선되어 2명이다. 서민호는 이제 4선의원이 되었다. 당선 후 5월 27일 석방되었다.

국회는 6.8부정선거 후유증으로 장기간 개원하지 못했다. 신민당이 유례없는 관권·부정선거를 이유로 전면 재선거를 주장했으나 이를 수용할 정부·여당이 아니었다. 야권으로서도 공공연한 관권선거를 용납할 수 없었다. 정국은 여러 달 째 얼어붙고 국회는 공전되었다.

이때 유일한 제3당 당선자 서민호가 나섰다. 7월 25일 시국수습 4개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앞서 이효상 국회의장이 7개 수습방안을 제시했으나 공화당 소속 국회의장의 방안은 민심이나 야당의 주장을 반영하지 못하였다. 

서민호는 6.8선거는 전면 부정이나, 전면 재선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전제, 현 시국을 수습할 수 있는 차선의 방안으로서 여야 간의 토론의 길을 터놓게 할 수 있는 선행 2개 조건과  협상내용 2개 조건을 제시했다.

① 공화당의 총책임자인 박정희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가 아니라 공화당의 총재 자격으로 6.8부정선거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사과를 할 것.

② 선거 당시의 내각은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는 동시에 부정선거 관련 공무원을 엄중 처단할 것.

이상 두 가지 조건이 이루어지면 곧 여야 영수 또는 중진회담을 열어 다음 ③ 및 ④항을 논의할 것.

③ 여야 동수로 공동조사단을 구성, 선거부정이 현저한 부정지구(적어도 15개 지구)에 대하여 조속히 재선거를 실시토록 정치적 조정을 할 것.

④ 부정선거의 재발을 막기 위한 제도적 보장책을 강구할 것이며 헌법·정당법 등을 개정하여 무소속 출마를 가능케 할 것. (주석 1)

공화당은 서민호의 수습방안 중 박정희 대통령의 사과 부분 등을 들어 반대하고, 신민당은 전면 재선거의 당론을 들어 역시 비판적이었다. 그는 이에 멈추지 않았다. 교착된 정국을 풀기 위해 유진오 신민당 대표위원과 만나는 등 조정역할에 나섰다. 박정희·유진오 영수회담이나 자신을 포함 3자회담을 제의하였다.


주석
1> <경향신문>, 1967년 7월 26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서민호, #월파_서민호평전, #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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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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