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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이면 방콕 인근의 역사 도시인 아유타야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있어 당일치기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지만, 저는 방콕을 떠나 아유타야에서 이틀 밤을 묵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수코타이로 가 이틀을 묵었죠.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이동해 태국 제2의 도시 치앙마이에까지 도착했습니다. 

방콕에서 아유타야, 수코타이, 치앙마이까지 계속 북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아유타야나 수코타이나 태국의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도시이지만, 사실 저는 태국 역사의 방향과는 반대로 이동한 셈입니다. 태국의 역사는 남진의 역사에 가까웠거든요.

남진한 태국의 역사
 
아유타야의 왓 프라스리산펫
 아유타야의 왓 프라스리산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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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지금의 태국 땅은 주로 크메르인이 살던 곳이었고, 태국인은 지금의 중국 영토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운남성 인근에서 거주하던 태국인은 8-10세기 무렵부터 서서히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넘어왔죠. 1253년 운남성에 있던 왕국인 대리국이 몽골에 의해 멸망하면서 태국인은 대거 동남아시아로 이주합니다.

그렇게 남하해 태국인이 자리잡은 중심지가 수코타이였습니다. 여기서 수코타이 왕국을 개창했죠. 이것이 1238년의 일이었습니다. 수코타이는 곧 람캄행 왕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지금의 태국 중북부 지역을 대부분 장악했습니다. 태국 문자의 원형도 이 시기에 확립됩니다. 중국 측 기록에서는 태국을 '섬라(暹羅)'라고 칭하는데, 이 가운데 '섬(暹)'이 수코타이를 의미한다고 하죠.

물론 여기서 '장악'이나 '지배'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수코타이 왕국이 직할 통치하는 범위는 수코타이라는 도시 뿐이었습니다. 다른 도시와는 해당 도시의 지배자와 후원-피후원 관계를 맺어 간접적으로 통치했죠. 이 관계는 상당히 유동적이고, 때로 중첩적이기도 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전통적 국가체제인 '만달라적 정치체제'의 전형입니다.

이러한 '만달라적 정치체제'는 도시와 도시 사이의 정치적 관계보다는, 수코타이라는 도시의 지배자와 다른 도시의 지배자 사이 개인적 관계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사라지면 쉽게 붕괴하는 경향이 있지요. 수코타이도 그랬습니다. 람캄행 왕이 사망한 뒤 수코타이 왕국도 빠르게 몰락했습니다.
 
수코타이의 왓 마하탓.
 수코타이의 왓 마하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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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코타이 왕국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바로 아유타야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아유타야 왕국입니다. 수코타이 왕국에서 이탈한 도시들을 하나둘 규합했고, 결국 1378년에는 수코타이가 아유타야의 속국이 되면서 아유타야 중심의 체제가 완성되죠. 아유타야 역시 오랜 기간 만달라적 정치체제를 유지했고, 그 아래에서 수코타이 역시 상당한 힘을 유지했습니다.

특히나 아유타야 왕국은 하나의 단일한 왕조가 계속해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 차례 반란으로 왕통이 단절되고 다른 가문의 사람이 왕이 되었죠. 다만 여전히 중심지를 아유타야에 두고 있었고, 국가 체제가 유사했기 때문에 '아유타야 왕국'으로 통칭하는 것 뿐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반란 가운데에는 수코타이의 출신의 귀족이 반란을 일으켜 아유타야의 왕이 된 사례도 있습니다.

아무튼 아유타야 역시 수코타이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강력한 국력을 발휘했습니다. 불교와 힌두교를 중심으로 국왕에 대한 신격화도 이어졌습니다. 애초에 '아유타야'라는 이름부터 인도의 종교 성지인 '아요디야'에서 따온 것입니다. 물론 신화일 뿐이지만, 아요디야는 우리에게는 가야 허왕후 전설에 등장하는 곳으로 익숙하기도 하지요.
 
아유타야의 왓 마하탓
 아유타야의 왓 마하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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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야는 남쪽으로도 영토를 확장하며 믈라카 술탄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남진의 과정에서 16세기 초반부터 자연스럽게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의 서구 국가와 접촉하기도 했죠. 미얀마와도 엎치락뒤치락 전쟁을 계속했죠.

그 과정에서도 국력은 확장되었습니다. 전성기를 이끈 나레수안 왕 시기에는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돕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겠다고 중국에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17세기에 아유타야는 인구 1백만을 넘는,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죠.

서구 국가들은 한때 태국을 인도, 중국과 함께 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인식하기도 했습니다. 언급한 '섬라(暹羅)'에서 '라(羅)'가 아유타야를 의미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물론 전성기가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미얀마와 이어진 끝없는 전쟁은 결국 아유타야의 쇠락을 가져왔습니다.

1765년 미얀마의 군대가 아유타야를 침입했고, 결국 2년 만에 아유타야는 미얀마에 점령당했습니다. 아유타야는 파괴되었고, 아유타야와 관계를 맺고 있던 도시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아유타야 왕궁 터
 아유타야 왕궁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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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태가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미얀마는 이 시기 청과도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태국에 군대를 오래 주둔시킬 수 없었습니다. 결국 군대가 빠져나간 틈을 타 다시 국가를 일으킨 사람이 탁신 장군이었습니다.

탁신은 미얀마의 지배에 반란을 일으킨 뒤 곧 아유타야를 차지했고, 흩어진 도시들을 다시 규합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철저히 파괴된 아유타야에 자리를 잡을 수는 없었죠. 탁신은 결국 톤부리를 기반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톤부리 왕조가 한 대만에 몰락하고 라마 1세가 톤부리의 강 건너편에 건설한 도시가 바로 지금의 방콕입니다.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수코타이의 왓 소라삭
 수코타이의 왓 소라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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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저는 이런 태국의 역사를 거슬러, 방콕에서 아유타야로, 또 아유타야에서 수코타이에 닿았습니다. 그저 체감일 뿐일 수도 있겠지만, 방콕에서 멀어질수록 도시의 규모는 작아지고 도로 사정도 나빠집니다. 버스의 흔들림도 더해지고, 방콕에서 잘 사용하던 인터넷이나 택시 앱은 아예 사용하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정말 무언가를 거슬러 간다는 느낌이 확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차와 버스에서 내리고 나면, 폐허가 되어버린 유적을 안고 있는 도시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도심지 한가운데에 무너진 사원과 불상이 서 있습니다. 벽돌 몇 장으로 남은 사원을 로터리 삼아 도로의 차들은 무심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언급했듯 수코타이도 아유타야도 전쟁과 파괴를 거치며 무너졌습니다. 도시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유적은 무너지고 때로 흔적만 남아 널따란 잔디밭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때 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손꼽힌 역사가 이제는 초라하게 작아져 버린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수코타이의 왓 프라파이 루앙
 수코타이의 왓 프라파이 루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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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편의점에 갔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 부서진 사원 위로 지는 석양을 보는 것은 다른 도시에서는 하기 힘든 경험이겠지요. 어디를 둘러봐도 높은 기둥과 불상의 평화로운 얼굴만이 보이는 수코타이의 사원 안에서, 저는 무너져버린 제국의 흔적이 그리 쓸쓸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긴 시간 역사를 거슬러,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시에 온 보람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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