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내가 발 디딘 현실과 연결된다고 믿습니다. 마침표로 끝나는 OTT 시청 말고, 물음표로 이어내고자 합니다.[편집자말]
"엄마, 만약 대리모로 500억을 벌 수 있다면 할 것 같아요?"
"절대 안 하지! 그 돈 없어도 잘 사는데."


학부 졸업논문으로 대리모 법제화에 대한 반론을 공부하던 때였다. 나는 대리모가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감각만 있었지, 실제 임신과 출산에 대해 체험한 바가 없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경험자인 엄마에게 의견을 물었다. 엄마는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도 대리모 산업이 굴러간다. 지난해 3월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에서 대리모를 구하려면 약 13만 달러(약 1억 6000만 원)를 지불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대리모 산업으로 유명한 우크라이나는 4만 3000달러(약 5300만 원) 수준에 그친다. 알선업체가 가져가는 수수료를 제외하면 대리모 여성에게 실제로 지급되는 비용은 이보다 훨씬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니 대리모란 500억 없어도 잘 사는 사람은 하지 않지만, 5000만 원이 없어서 못 사는 사람은 하는 일이다. 그것을 '일'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생명이 위험해도 임신을 중단할 수 없는 이유
 
 대리모를 통해 첫 아이를 가진 패리스 힐튼과 그의 남편.

대리모를 통해 첫 아이를 가진 패리스 힐튼과 그의 남편. ⓒ parishilton.com

 
지난 1월 24일, 힐튼호텔 상속자이자 유명 사업가 패리스 힐튼이 대리모 출산으로 첫아들을 얻었다고 밝혔다. 힐튼의 친구 킴 카다시안의 셋째, 넷째 아이도 대리모를 통했다. 이렇게 자녀를 얻은 유명인사로는 제시카 차스테인, 니콜 키드먼, 엘튼 존, 리키 마틴, 일론 머스크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아기를 원하는 부부가 대가를 지불하면, 대리모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대리한다. 부부의 난자와 정자를 체외수정해 대리모 여성의 자궁에 착상시키는 식이다. 태어난 아이는 생물학적 부모에게 귀속된다. 매끄럽게 압축된 거래 과정은 꽤 합리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대리모 여성은 수입을 얻고, 고객은 원하는 아이를 갖는다니. 서로 '윈윈'하는 거래 같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편하지 않다. 국내 OTT 서비스 웨이브(Wavve)에서 볼 수 있는 미국 의학 드라마 <시카고 메드(Chicago MED)> 시즌1의 15화는 대리모 산업의 불편한 현실을 꺼내 보인다.

응급실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에서 임신한 여성 닐라는 거동이 어려워 휠체어에 탄 채 어린 두 아들과 함께 내원한다. 진단명은 임신중독증. 응급수술로 분만하지 않으면 태아와 닐라가 모두 위험한 상황이다. 그러나 닐라는 완강하게 수술을 거부한다.

"당장 제왕절개로 출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환자분과 태아의 목숨이 위험해요."
"지금 아이를 낳을 순 없어요! 저는 대리모고, 아이가 미숙아로 태어나면 돈을 못 받아요."

 
 드라마 <시카고 메드> 시즌1 제15화 스틸컷

드라마 <시카고 메드> 시즌1 제15화 스틸컷 ⓒ NBC

 
얼마 전까지 닐라는 두 아들과 노숙인 쉼터를 전전하며 살았다고 말한다. 대리모를 하면서 받은 생활비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상황. 닐라는 아이들을 시카고의 혹독한 겨울 동안 거리에서 지내게 할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을 들은 의료진이 대리모 중개업체 측과 이야기한다. 하지만 중개인은 "우리 고객은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를 수령하지 않을 것"이라 잘라 말한다. 아무도 아기를 책임지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에 병원장 샤론은 분노한다.

"이 계약은 모든 사람을 보호하고 있군요. 닐라와 아기만 빼고요."

의료진은 "아이들은 거리에서 보내는 겨울보다 엄마 없이 보내는 겨울을 더 힘들어할 것"이라며 닐라를 설득한다. 고민 끝에 제왕절개를 결정한 닐라,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고 건강에도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생물학적 부모는 아기를 키우지 않겠다고 통보한다. 혹시 모를 미숙아의 후유증을 감당하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당신이 하는 일이 법적인 문제는 없을지 몰라도 절대 옳은 일은 아니죠. 이 일을 똑바로 봐요. 인신매매라고."

샤론은 중개인을 비난하지만 해결책은 없었다. 닐라와 두 아들,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에겐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 않을 자유' 없다면, 선택이라 말할 수 있을까
 
 미국 NBC에서 방송된 의학드라마 <시카고 메드>

미국 NBC에서 방송된 의학드라마 <시카고 메드> ⓒ NBC

 
시카고는 미국에서 상업적 대리모를 합법화한 4개 주(州) 가운데 하나인 일리노이주에 속해있다. 대리모 중개인은 "그녀가 다 합의한 것"이란 말만 반복한다. 모든 건 닐라가 동의했으니 그에 따른 책임도 있다는 입장이다.

'계약자유의 원칙'은 대리모 산업을 옹호하는 논리로 곧잘 이용된다. 개인 간 자유로운 의사의 합치로 이루어진 계약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하지만 대리모 계약에서 양쪽에 동등하게 보장된 자유란 없다. 의뢰인 부부는 미숙아를 키울지 말지도 결정하고, 언제든 돈만 있다면 다른 대리모를 구할 수도 있다. 반면 닐라에겐 '동의합니다'와 '동의하지 않습니다'의 선택지만 존재했다. 동의하지 않으면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없는 계약이었다.

우리는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하지 않을 자유'는 쉽게 잊는다. 신체의 자유는 소극적 권리다. 풀어 말하자면 '내 몸을 타인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의미다. '내 몸은 내가 스스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가 아니다.

두 아들을 데리고 노숙하던 닐라에게 "대리모를 안 하겠다"고 말할 힘이 얼마나 있었을까? 출산은 여러 신체적 변화를 수반하고 임신중독증, 출혈 등의 증상이 발생할 시 사망의 위험도 적지 않지만 닐라에겐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의뢰인 부부는 다른 여성의 몸을 빌리면 그만이겠지만 닐라는 "안 하면 그만"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닐라뿐만 아니라 실제 대리모 여성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적으로 대리모 산업은 공급 국가와 수요 국가가 나누어져 있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콜롬비아, 멕시코는 대리모 공급 산업이 성행하는 대표적인 나라들이다. 아이들의 생물학적 부모는 대부분 해외 국적이다. 자궁의 제공자는 닐라처럼 '아니요'라 말할 자유가 적은 저소득, 취약계층 여성들이다. 반대로 대리모 산업의 수요자들이 많은 국가는 대개 미국 등 선진국이다.

상업적 대리모를 옹호하는 측은 여성들이 난임부부에게 새 생명을 낳아주는 걸 기쁘게 여긴다고 홍보한다. 대리모 여성들이 모두 사회적 약자는 아니란 주장이다. 

하지만 그들의 선전이 사실이든 아니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대리모 계약은 여성의 신체와 자기결정권을 재화로 한다. 그리고 이 거래는 건강한 아기를 수령해야만 종결된다. 어쩌면 공장형 번식장 문제를 알리기 위한 반려동물 캠페인 구호를 이젠 인간에게 써야할지도 모르겠다.

"아기를 사지 마세요. 입양하세요."
시카고메드 대리모 의학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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