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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을 이용해 인터뷰 중인 정귀자씨.
 점심시간을 이용해 인터뷰 중인 정귀자씨.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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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운호 선원 고 정덕봉씨의 딸 정귀자씨는 강원도 고성 아야진이 고향이다. 그녀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71년, 선원이었던 부친이 납북된 적이 있는 납북귀환어부 가족이다. 8남매의 중 둘째였던 그녀는 가난한 집안 살림 때문에 어려서부터 동생들을 돌보며 살아야 했다고 한다. 부친의 납북으로 생계를 위해 고생했던 어머니가 최근 병을 앓으면서 그녀는 요양보호사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인터뷰도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던 중 점심시간을 이용해 진행했다.

정씨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배를 탔다고 한다. 포항이 고향이었던 부친은 아야진에 먼저 이사와 뱃일을 하던 작은 집을 따라 이사 오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결혼해 납북되던 때까지 쉬지 않고 뱃일을 하던 성실한 선원이었다. 그러던 아버지는 1971년 여름 승운호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납북되어 1년이 넘도록 억류되어 있다가 1972년 9월 7일 속초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납북된 뒤 할머니와 어머니가 경제활동을 책임져야 했다고 한다. 명태나 오징어를 배에서 사 와 리어카에 싣고 집에 오면, 온 식구가 달려들어 명태와 오징어를 널고 말려야 했다고 한다. 나이 많은 할머니도 그렇게 1년 동안 고생을 하시다가 아버지가 귀환하기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납북된 뒤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빨갱이 가족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언제 돌아올지 모를 기약 없는 아들의 생환 소식이었다.

1년 넘게 돌아오지 않는 아들의 생환이 어려워질 것 같은 절망감이 들자 희망을 잃어버린 할머니의 몸과 마음이 약해진 것이라고 정씨는 말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초상을 모두 치르자 곧이어 아버지가 돌아왔다고 한다. 나중에 할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아버지 역시 자신 때문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에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연락을 어디선가 받았어요. 선원들이 돌아온다고 하니 아야진 동네 전체가 어수선했지요. 당시에 우리 집이 언덕이라 바다에 배들이 다 보였어요. 귀환하던 날 보니 함대 하나에 승운호를 비롯해 납북되었던 배들이 전부 따라오더라고요. 그때 아야진에 사람들이 엄청 많이 살았거든요. 이북에서 납북된 배가 넘어온다고 하니까 아야진 언덕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어요.

그런데 승운호 배가 아야진으로 안 오고 속초로 가더라고요. 그래서 엄마랑 버스를 타고 속초항으로 갔지요. 속초항으로 가서 보니 사람들이 가득해서 선원들 있는 곳으로 가지도 못하겠더라고요. 내 기억에 경찰들이 양쪽에서 선원들을 끼고 가더라고요. 그리고는 선원들을 버스에 태워서 갔던 것 같아요. 지금 시청 옆에 있는 민원실이 검찰청 건물이었거든요. 내가 그 앞에서 아버지 얼굴 한 번 보려고 엄청 서성거렸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다가 아버지를 결국 못 보고 집으로 돌아왔죠.

그리고 얼마 있다가 속초에 어디 검찰청에 갇혀있다고 소문이 듣고, 그 어린 나이에 혼자 속초 검찰청을 가봤어요. 처음에는 그 골목이 너무 조용했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때리는 소리, 뭔가 부딪히면서 맞는 소리 같은 것이 나더라고요. 그런 소리가 나는데도 사람 한 명 없이 너무 한적한 거예요. 그렇게 조용한데 '아!, 아!'하는 소리가 계속 나더라고요. 방음이 안 되었던 거죠. 거기서는 도저히 아버지를 볼 수도 없을 것 같고 너무 무서워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40대 초반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는 수개월에 걸쳐 조사를 받고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정씨는 아버지가 귀환한 뒤에도 한동안 집에 오지 않는 이유를 묻자,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조사를 받느라 집에 오지 못한다는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렇게 보고 싶던 아버지가 집에 왔지만 예전의 아버지 모습이 아니라고 했다. 귀환할 당시 반팔차림이었던 아버지는 긴 옷차림에 잠바까지 걸치고 있는 모습을 집에 왔다고 한다. 그리고 몰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수척해졌다고 한다.

출소해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납북의 두려움과 고문 후유증으로 한동안 배를 타지 못한 채 집에만 머물렀다고 한다. 항상 자녀들에게 살갑게 대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죽은 사람 마냥 늘 누워만 있었다. 납북되기 전에 건강했던 아버지는 찾아볼 수 없었고,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항상 수사기관의 감시과 연행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집에 있다가 갑자기 사라질 때가 있어요. 우리는 학교 갔다 오면 없어지는 거예요. 하루 정도 있다가 사라질 때도 있고, 한나절 없어지실 때도 있고. 그렇게 사자졌다가 집에 오면 방에 죽은 사람처럼 쫙 뻗어 있어요. 우리는 무서워서 아버지에게 어디 아프시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있었어요. '왜 아버지가 왜 저렇게 아파하시지? 왜 저럴까? 이상하다?'하고 생각만 했죠. 어릴 때였으니까. 누가 말해주지도 않으니까. 나중에 엄마 말을 들어보면 많이 맞고 왔다고 그러더라고요.

아버지가 어디 갔다 왔다는 말을 못 했어요. 그렇게 아버지는 늘 힘들어하셨어요. 여름에 반바지를 입으면 팔, 다리 같은데 멍이 많이 들어 있는 걸 봤어요. 어깨 쪽도 멍이 많이 들어 있었어요. 어린 나이에 나는 배를 타니까 배를 넘어져서 다쳤나 생각만 했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고문 후유증이었던 거예요."

그녀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방바닥에 시체처럼 누워있던 아버지'라고 했다. 납북되어서 돌아온 아버지는 경찰에 수시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그때마다 녹초가 되어 돌아온 아버지는 그저 시체마냥 방바닥에 누워만 있었다고 한다. 결국 건강했던 아버지는 납북되어 귀환한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귀환 후 사망할 때까지 2년간 아버지는 경찰들로부터 심한 사찰을 당했다고 한다. 그렇게 감옥 같은 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피를 토하며 사망했다고 한다. 사인이 심장마비라고 했지만 가족들은 고문과 경찰들의 감시로 인해 받은 후유증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믿고 있다. 사망 후 입관할 때 아버지의 온몸은 핏자국이었고, 새까맣게 변해버린 피부는 구타의 흔적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40대 초반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고 한다.

불안한 상상

그녀는 사는 동안 항상 불안감을 가지고 생활해야 했다고 한다. 납북어부 가족은 빨갱이 집안이라고 손가락질받아야 했고, 그래서 누군가 자신의 집을 불 지르거나 해코지하지 않을까, 심지어 폭탄이라도 터뜨리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를 간첩들이 와서 데려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상상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녀의 불안한 상상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집 밑에 사는 사람이 해군 첩보부대를 다녀온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항상 옆으로 가방을 메고 다녔거든요. 동네에서는 그 사람이 간첩하고 첩보한다, 내통한다는 소문이 났어요. 실제로 그 집에 경찰들 사찰이 심했어요. 그러던 중에 한번은 누가 우리 집 벽에 피로 낙서를 해 놓은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또 한번은 피로 물든 헝겊과 삐라를 마당에 뿌려놓고 가기도 했어요. 그러니 얼마나 무섭고 불안하겠어요."

아버지의 납북 전력은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정씨의 큰 남동생의 경우 군에 입대해 대대 작전과로 배치 받았지만 신원조회에서 문제가 되어 배치가 취소되는 일을 겪었다고 한다. 막내 남동생 역시 군 입대 후 용인에 있는 국군사령부로 차출이 되었지만 신원조회에서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국가보안법이 문제였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학교도 어렵게 다녀야 했어요. 큰 남동생의 경우 제대를 하고 나서 천진에 있는 지역농협에 들어갔어요. 농협에 들어갈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2~3년 근무하던 중에 아버지 이북에 다녀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농협에서 해고를 당해야 했어요. 그 뒤로는 어디 회사라는 곳에 들어갈 생각을 안 했어요.

우리 형제들은 항상 간첩이라는 누명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았어요. 그래서인지 형제들이 전부 기술을 배워서 자기 기술로 먹고살아요. 우리 대부분이 고등학교만 겨우 나왔지만 경제사정이 어려워서 대학은 꿈도 꾸지 않았어요."

정씨가 진실을 규명하려는 이유는 너무도 많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전과자'라는 빨간 줄을 없애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했다. 전과 서류는 자식들이 볼 서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자식들에게 붉은 글씨가 새겨진 서류를 물려줄 수는 없다는 심정이었다.
 
"너무너무 아픈 오점이 아니에요? 납북귀환어부 가족은 국가에서 너무 제재를 하니까요. 국가에서 뭔가 필요하면, 무슨 서류를 떼와라  할 때 '간첩 딸, 전과자 딸' 하면 뭔 소용이 되냐구요.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 나라가 정말 좋아졌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말도 못 꺼내죠. 그 피해를 말로 다 어떻게 하겠어요. 지금이라도 이런 말을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만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

정씨는 진실규명이 되어 가족 모두 명예가 회복되면 좋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 후유증으로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았던 그녀는,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태그:#FIGHTING CHANCE, #원곡, #평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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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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