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레트로 열풍에 발맞춰 1990년대 대중가요가 다시금 조명받고 있습니다. 장르 및 시대를 아우르는 과거 명반을 현재 시각에서 재해석하며 오늘날 명반이 가지는 의의를 되짚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박미경 2집 < Jungle New Style > 앨범 이미지

박미경 2집 < Jungle New Style > 앨범 이미지 ⓒ 라인음향

 
1995년 여름, 전 해 '이유 같지 않은 이유'의 성공을 퍼레이드로 확산하기 위해 좀 더 기세를 몰아댄 박미경의 두 번째 앨범은 각 수록곡에 세부 댄스장르를 명기했을 만큼 당시 서구의 댄스음악계에서 유행하던 핫한 댄스음악을 전면화했다. '정글'을 내건 앨범 타이틀처럼 하드코어 테크노, 딥 하우스, 레이브 하우스, 유로댄스, 뉴 잭 스윙 그리고 정글 등 댄스리듬이 전편을 어지러이 휘감는다.

센세이션에 가까운 화제를 몰고 온 타이틀곡 '이브의 경고'부터가 도입부에서 정글 리듬을 선보이면서 이제 박미경이 고요한 발라드의 이미지와 철저히 작별하고 '쇼크를 주는 댄스 전사(戰士)'로 변화했음을 만천하에 고하고 있다. 변신의 예고편이라 할 전작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와 후속곡이었던 '서툰 기대'(2집에 새 편곡으로 마지막에 다시 수록했다)를 보면 과거와 현재의 조화를 꾀한 절충적 접근을 읽을 수 있다.

'다시는 나도 돌아가지 않아/ 너를 위해 더 이상 나 슬퍼지긴 싫어.'(이유 같지 않은 이유)
'말없이 끊어진 전화는 나의 마음을/ 왜 자꾸 흔들어 놓는 걸까/ 그건 아직도 네가 다시 올지 모른다는/ 슬픈 예감 때문일 거야.'(서툰 기대)


냉정함이 배인 전자의 당당함 쪽이 주로 대중들에게 어필했지만 후자의 노래와 같은 그리움과 체념의 재래식 정서 또한 그 못지않은 지분을 차지해 앨범 전체적으로 이 두 정서 사이를 왔다 갔다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민들레 홀씨 되어',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과 같은 박미경의 풍부한 성량의 발라드 가수 이미지를 여전히 뒤로하지 못하고 새로운 자아(댄스음악)와 병치시키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여성의 자기결정 선언
 
 1995년 KBS <가요톱10>에서 골든컵을 수상한 박미경 ‘이브의 경고’

1995년 KBS <가요톱10>에서 골든컵을 수상한 박미경 ‘이브의 경고’ ⓒ KBS

 
성공의 흐름을 파죽지세로 끌어올리기 위해 애매한 중간의 평화지대에 머물던 그를 완연한 댄스가수로의 환골탈태를 꾀하는 한편으로 절충적 메시지도 폐기처분하고 시대를 호령하는 강경한 여성의 자기결정 선언으로 앨범의 메시지를 내걸었다.

'이브의 경고'라는 타이틀부터가 여권(女權)과 결부할 수 있을 만큼 능동적이고 공격적이다. '너에게만 있는 능력처럼/ 그렇게 날 속이려고 하면/ 나에게는 더 이상 순애보는 없어 난 널/ 그냥 떠나버릴 거야!'

전작 '이유 같지 않은 이유'와 마찬가지로 노이즈의 천성일이 작곡했지만 변신을 아로새긴 노랫말은 김창환이 썼다. 후속곡으로 '이브의 경고'에 버금가는 호응을 얻었던 '넌 그렇게 살지 마'에서도 성 평등의식의 일단이 드러난다. '사람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마/ 걔네 역시 똑같이 모자라니까/ 너무 완벽하게 할 필욘 없지/이 세상에 중요한 건 바로 너니까!'

1995년 만을 보면 박미경은 이전의 차분하고 수줍은 청각적 가수에서 단호함으로 무대를 가로지르는 시각적 육탄공세의 가수라는 또 다른, 새로운 자아로의 전환으로 규정할 수 있는 재탄생으로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이전의 그를 아는 팬들도 놀랐지만 그를 몰랐던 새 세대 음악인구도 놀랐다. 결코 젊다고 할 수 없는 만 서른의 나이에, 20대가 판치는 음악계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파워의 댄스와 가창을 호령하고 있어서였다.

사실 김창환이 발라드가수 박미경을 목도한 것은 힘을 실어 쭉쭉 뻗어가는 거대한 포효의 가창력과 노래 이곳저곳에 달라붙어 있는 흑인음악의 감수성이었다.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이 그런 노래였다. 그가 바라는 두 가지 조건을 생래적으로 보유한 박미경은 그 기대에 조금도 미흡함이 없이 파워풀한 가창력을 댄스리듬에서도 구현했고 어느 곡에서든 블랙 감성을 놓치지 않았다. 모처럼의 대형가수 출현이었다.

그의 변신은 이전의 모든 허상을 무너뜨리고 자신만만의 성곽을 쌓는 듯했다. 새 트렌드에 적응한 박미경의 탈바꿈에 보낸 대중들의 반응은 호의가 가득했고 폭발적이었다. 나이트클럽뿐이 아니라 그 시점에 중요성이 더해진 길거리 노점상(길보드)에서도 주가가 상승해 끝내 TV 가요프로에서도 정상에 등극하는 성과를 창출했다. 유행음악에 민감한 10대와 20대는 특히 여학생과 젊은 여성들은 노래방에서 줄기차게 '이유 같지 않은 이유'와 '넌 그렇게 살지 마'를 선곡해 열창하곤 했다. 아마도 지금 걸 그룹의 캐치프레이즈가 된 '걸 크러시 트렌드의 1990년대 버전' 아니면 '미리 본 걸 크러시'가 박미경일 것이다.

걸쭉한 랩 피처링에 이은 경쾌한 곡조의 '사랑나기'와 김창환이 유난히도 아끼는 곡이자 박미경 마니아의 골든 레퍼토리 '그대 떠난 뒤'도 노래방에서 환영받았다. 뒤 두 곡도 템포와 리듬이 덜 작렬하지만 박미경의 특장인 가창력은 세련된 비트를 타면서 변함없이 빛을 발하고 있다. 한 아티스트의 다양한 역량을 담아내는 것이 앨범이라면 앨범을 앨범답게 다채롭게 다양하게 수놓고 있는 곡들이다. 마지막 곡인 펑키 리듬의 '단념'도 숨은 보석이다.

장르, 분위기, 템포 등 모든 면에서 쏠리는 법이 없는 절충주의자 김창환답게 슬로 템포의 곡들도 있다. '지난날의 그대', '진심은 아니었어' 그리고 '비 오는 날에' 등의 발라드풍의 곡을 배치한 것은 순전 박미경의 가창력을 부각하기 위한 의도였다. 그의 잠재력을 포착해 새 생명을 부여한 프로듀서 김창환의 '발굴' 능력은 아무리 칭송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다. 과거시제에서 해방되어 '찐' 현재를 구현하며 시대를 움켜쥔 박미경의 문제작. 그와 김창환 간의 긴밀한 비전의 합리적 연결이 핵심이다. 그리고 박미경의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대중음악 웹진 '이즘'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임진모 기자는 대중음악 평론가이자 팝 칼럼니스트로 대중음악 웹진 이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명반다시읽기 박미경 이브의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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