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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독립운동의 의의를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순수 민간단체 '시민모임 독립'은 일본 근대의 뿌리를 살펴보기 위해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규슈(九州) 지역을 다녀왔다. 규슈는 일본 열도 서쪽에 자리한 섬으로,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워서 우리와 역사적 인연이 깊은 곳이다. 아울러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메이지(明治) 유신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이글은 이번 여정에 동행한 필자가 규슈지역 여러 곳을 돌아보고 느낀 점을 정리한 것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탐방기를 소개할 예정이다. [기자말]
후쿠오카(福岡)는 규슈로 들어가는 입구다. 해마다 많은 한국인이 규슈를 관광하기 위해 후쿠오카 공항을 방문한다. 코로나로 굳게 닫혀있던 빗장이 풀리면서 이곳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 수는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면 1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 엔저로 인한 싼 물가 탓에 방문객 수는 더 늘어날 걸로 보인다. 후쿠오카를 찾는 외국인 1위는 단연 한국인이다.

후쿠오카 관광청 누리집에 들어가면 여행자들을 위한 볼거리, 즐길 거리, 먹거리 등 다양한 정보를 한국어로 접할 수 있다. SNS에는 이곳의 명소와 맛집을 방문한 글과 사진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빼어난 자연환경과 편리한 도시 인프라를 갖춘 이 도시 한복판에 조선의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관련된 특별한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후쿠오카 시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사원 소후쿠지(崇福寺) 경내 공동묘지가 그곳이다.
 
일본 후쿠오카시 소호쿠지 사원 위치
 일본 후쿠오카시 소호쿠지 사원 위치
ⓒ 구글 지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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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지에 일본 우익의 거두 도야마 미쓰루(頭山 満)의 무덤이 있다. 미쓰루는 대아시아주의를 표방하며 군국주의를 주창한 인물이다. 고향인 이곳 후쿠오카에서 일본 극우의 원류라 불리는 겐요샤(玄洋社)를 설립(1881년)했다. 겐요샤는 메이지 유신으로 몰락한 사무라이 출신들을 모아 설립한 최초의 우익결사 단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을 주도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山口縣)가 겐요샤 출신이다.

일본 정부가 황후 시해에 직접 개입한 것을 감추기 위해 겐요샤 출신 낭인(浪人)들을 동원했다는 건 공공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시해 사건에 가담한 낭인들은 살인죄로 기소됐지만, 2년 복역 후 전원 석방됐다. 겐요샤와 하부단체인 고쿠류카이 즉 흑룡회(黑龍會)는 일제의 대륙 진출을 전후해 첩보 수집, 요인 암살, 스파이 공작 등 정부가 직접 손대기 힘든 문제를 해결하는 첨병 역할을 수행했다.

이 겐요샤의 전신(前身)이 고요샤(高陽社)다. 고요샤는 도야마 미쓰루가 스승인 타카바 오사무(高場乱, 1831∼1891)의 이름을 따서 설립(1879년)한 단체다. (2년 후에 겐요샤로 이름을 바꾼다) 타카바는 후쿠오카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이었으나 남자로 길러졌다. 직업이 안과의사였지만 일찍이 주자학에 입문해 사설 학원을 개설해 유학을 가르쳤다. 전문직 여성이 개인 학원까지 만들어 유학을 가르치다니,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19세기 중반, 일본에서는 유학(儒學) 열풍이 강하게 불었다. 유교적 소양을 중시하는 문화가 확산하면서 학문의 습득이 유행처럼 번졌다. 타카바도 이 흐름 안에서 시대정신을 깨우치고자 유학에 심취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국 각지에 유학을 가르치는 학교와 서당이 만들어졌고 신분과 관계없이 원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베풀었다. 시골 마을에서 고구마를 팔던 가난한 소년 도야마가 타카바 문하에 들어간 배경이다.

한국인 관광객 넘쳐나는 곳에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도야마는 스승의 가르침에 힘입어 민주주의적 정치개혁을 요구한 자유민권운동에 참여했다가 이내 정한론자(征韓論者)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의 이념을 좇는 극우 제국주의자로 변신한다. 정한론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일본이 범아시아 지역을 통치해야 한다는 침략 사상이다. 조선은 물론 청나라와 러시아에 진출해 친일 인사를 포섭하고 각종 공작을 자행한 야쿠자 조직의 두목이 도야마 미쓰루다.

공자의 가르침을 전하던 후쿠오카의 작은 서당에서 동문수학하던 청년들은 반정부 테러리스트가 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자유 민권운동가로 남거나 도야마처럼 국수주의자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타카바는 메이지 정부에 반대해 일어난 반란(1876년)에 연루된 죄로 옥고를 치르는 등 힘든 말년을 보낸다. 제자들의 비극적인 최후를 지켜보며 마음을 크게 다쳤고, 중병에 걸렸음에도 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겐요샤 관련 인사들이 묻힌 묘원 중앙에 두 개의 묘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타카바와 도야마의 무덤이다. 묘원 옆에 레이와(令和) 4년에 겐요사 묘지 정비사업을 했다는 내용이 적힌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레이와는 일본연호로 126대 천황 나루히토(徳仁)를 말한다. 2022년에 묘지를 새로 단장했다는 뜻이다. 비석 뒤에 정비사업에 참여한 단체와 개인 이름이 적혀 있다. 후쿠오카시장도 이름을 올린 걸로 보아, 이 사업에 힘을 보탠 것 같다.
 
도야마 미쓰루, 타카바 오사무의 묘비석이 서있다.
▲ 일본 후쿠오카시 소호쿠지 사원 내 겐요사 묘원  도야마 미쓰루, 타카바 오사무의 묘비석이 서있다.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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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과 고장을 빛낸 현인들의 묘원을 새로 가꾸는 사업에 지방정부가 재정 지원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한국인 관광객들이 쓰는 돈이 주요 수익원 중 하나인 후쿠오카시에서 조선의 국모를 살해하고 한반도 침탈의 첨병으로 활약한 극우단체를 지원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겐요샤는 일제 패망 후 연합군 총사령부가 위험단체로 지목해 강제 해산시킨 조직이다. 일본 극우의 원조인 겐요샤는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이들이 뿌린 씨앗과 포자는 죽지 않았다. 이들의 후예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욱일기를 흔들고, 일본 제국을 찬양하며, 종전 기념일(8.15일)이 되면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집결해 수많은 아시아인을 죽음으로 내몬 전범들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일보 근대화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우익이념

왜 저들은 지난 과거를 참회하지 않고 여전히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강변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조롱하는 것일까. 그 의식의 뿌리를 들여다보려면 메이지 시대 나아가 에도 시대 말기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우익 이념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번 탐방의 주요 답사지를 메이지 유신의 두 축인 야마구치(山口)와 가고시마(鹿児島)로 잡은 것도 그 때문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여러 위기의 징후들이 포착되고 있다. 미사일이 넘나들고 핵무장이 언급되는 등 남북한 관계는 동토처럼 얼어붙고 있고 일본에서는 헌법을 고쳐서라도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최근 일본의 행보는 집권 자민당을 위시한 일본 내 보수우익들이 중심이 되어 동아시아에서 정치 군사적 패권을 재구축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신냉전의 음울한 기운이 감도는 비상한 시점이다.

과거는 미래의 서막이라는 말이 있다. 미래를 제대로 조망하려면 먼저 과거를 잘 살펴봐야 한다는 뜻이다. 지나온 길을 탐색하려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현재의 위치를 명확히 깨닫고 이를 통해 바람직한 미래로 향하는 입구를 찾고자 함이다. 가까운 이웃 한국과 일본은 어떤 미래를 만들어갈까. 근대 역사가 남긴 아픈 유산을 청산하고 동아시아 국가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후쿠오카현을 빙 둘러 부채살 모양으로 성곽을 지었다고 한다.
▲ 일본 후쿠오카현 미즈끼 유적(수성) 간판 후쿠오카현을 빙 둘러 부채살 모양으로 성곽을 지었다고 한다.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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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현에는 다자이후(太宰府), 오노조(大野城), 가스가(春日) 등 여러 도시에 걸쳐 오래된 성(高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미즈키(水城) 유적이라고 부르는데, 백제가 망한 후 신라와 당나라가 쳐들어올 것을 염려해 쌓은 성이다. 백제가 망한 연도를 사비성이 함락된 서기 660년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백제가 멸망한 시기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일본 연합군이 맞붙은 백촌강(白村江) 전투(663년) 때로 봐야 한다.

당시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은 오랜 형제의 나라 백제를 되살리기 위해 무려 2만 7천 명의 군사를 파병했지만, 전쟁에서 지고 만다. 패전한 백제 유민과 일본이 본토로 건너와 신라와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지은 성이 미즈끼다. 바다 쪽으로 호를 파서 물을 저장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들이 정착한 곳 중 하나가 지금의 후쿠오카를 포함한 규슈지역이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도시 후쿠오카는 한국과 일본의 뒤엉킨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불량선인이라는 죄목으로 일제의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고통받다가 27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곳이 후쿠오카 감옥이다(탐방길에, 평생에 걸쳐 윤동주와 한국 문학을 연구한 와세다대학 오무라 마쓰오(大村益夫) 교수가 91세의 나이로 운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일제가 한반도에 남기고 간 상처와 아픔은 쉽게 아물지 않는 거대한 흉터로 남아 있다.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는 뒤틀렸고 곧이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두 나라는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좋은 동반자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제국주의의 후예들이 일본 정치권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힘든 과업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과 시민사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작업을 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태그:#일본 근대의 뿌리를 찾아서, #시민모임 독립, #후쿠오카, #소호쿠지, #미즈끼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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