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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하나에 모인 70명의 사람들 

"안녕하세요. 저는 <이음나눔유니온> 조합원이자 종합예술단 <봄날>에서 활동 중인 알토 김수미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이도역 장애인 추락 참사 22주기를 앞두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의 장애인권리예산·입법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오는 금요일(20일) 낮 2시 삼각지역에서 플래시몹(예고 없이 하는 깜짝공연)을 하고자 합니다.

(중략) 일반시민 100여 명을 모아 전장연을 지지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자 하는 기획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모여 <아리랑>과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는 행동을 할 겁니다. 평등의 길을 내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함께 해주세요!"


지난 1월 15일 내가 속한 '이음나눔유니온' 그룹 방에 위와 같은 알림글이 올라왔다. 안 그래도 전장연의 투쟁에 함께 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민하던 차였다. 잘됐다 싶어 곧 회신을 보냈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몇 시간 후, '장애인권리예산 응원 시민노래행동'이라고 적힌 텔레그램 방에 초대되었다. 응원곡으로 부를 노래는 <아리랑>, <우리 승리하리라>, <아침이슬>이다. 시민 100명이 모여서 노래 부르는 게 목표다. 내가 초대된 15일부터 20일까지 닷새 동안 약 70명이 모였다.  

'아무리 즉흥적인 기획이어도 온라인으로 올라온 음원 파일을 듣고 공연을 하는 게 가능할까? 연습 한 번 없이?'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고는 중요하지 않아, 전장연을 응원하겠다는 연대의 마음이면 돼'라는 의지로 바뀌었다. '우주 최고 음치'라는 별명을 가졌지만 그딴 것은 주머니 한켠에 접어 두자. 음치가 어느새 프로 합창단원이라도 된 듯 MR을 들으며 혼자 연습을 했다. 

주최 측은 참여자가 노래 부를 위치를 정하고 다섯 개의 무리를 만들었다. 선창무리, 기둥무리, 통로무리, 계단무리, 승강장무리다. 각 무리에 모인 사람들은 선창이 노래를 하면 따라 부르며 합류 지점에 도착한다. 꼼꼼한 시나리오가 단체방에 올라왔다. 급히 기획했음에도 진정성이 느껴졌다. 
 
오이도역 참사 22주기 추모집회를 위해 모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
 오이도역 참사 22주기 추모집회를 위해 모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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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인원보다 많았던 경찰, 그러나 

1월 20일 오후 2시, 전장연은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22주기를 맞아 집중결의대회를 삼각지역에서 열었다. 이날 오전 오이도역에서는 '오이도역 사고 22주기' 기자회견을 했다. 오이도역 사고는 2001년 1월 22일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노부부가 이용하려던 리프트가 추락해 부인이 사망하고 남편이 중상을 입은 사고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장연은 모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시내버스에는 휠체어가 탈 수 있는 리프트를 장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참사 이후 22년이 지난 현재까지 장애인의 완전한 이동권은 보장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올해 정부는 당초 전장연이 요구한 증액 예산 중 106억8400만 원(고용노동부 장애인 고용관리 지원 사업)만 수용했다. 이는 전장연이 요구한 예산의 0.8%밖에 안 되는 액수다. 

시민노래행동은 전장연의 이같은 요구를 응원하고 지지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만든 모임이다. 노래행동은 2021년 9월에 창단한 종합예술단 <봄날>이 기획했다. 단원들은 전장연을 응원하는 노래행동을 하기로 뜻을 모은 뒤, 시민들을 모으고 행동에 나섰다. 

전장연의 집회가 시작되는 1월 20일 오후 2시 삼각지역에는 활동가뿐만 아니라, 지하철공사 직원과 경찰이 보였다. 집회 인원보다 경찰이 더 많이 모인 것에 놀랐다. 시민노래행동은 집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약속한 대로 다섯 무리의 대오에 섰다. 아리랑 음원이 들리고 선창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나도 곧 따라 불렀다. 참여자들은 한 손에는 전장연을 지지하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다른 한 손에는 오이도역 사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흰 장미를 들었다.   
 
시민노래행동에 참가한 시민이 피켓을 들고 오이도역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장미꽃을 헌화하고 있다.
 시민노래행동에 참가한 시민이 피켓을 들고 오이도역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장미꽃을 헌화하고 있다.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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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과 <우리 승리하리라> 노래가 끝나고 <아침이슬> 첫 소절을 부르자마자 삼각지역장은 마이크에 대고 "역사 내에서 고성방가를 하거나 연설을 하는 등의 소란을 피우는 행위는 철도안전법에서 금지하고 있다"는 위협적인 멘트를 2분~3분 간격으로 내뱉었다. 그 소리는 노래무리 바로 뒤 엠프를 통해 들렸기에 너무 컸다. 우리의 노래를 방해하기에 충분했지만 시민노래행동은 끝까지 아침이슬을 불렀다. 

시민노래행동은 다음과 같은 입장문을 밝혔다. 

"노인, 환자, 짐이 있는 승객 모두가 편하게 이용하는 지하철 승강기가 지난 20여 년 장애인들의 목숨을 건 투쟁 덕분에 늘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몰랐다. 우리나라 인구의 5.1%가 등록 장애인이며, 노령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사고 위험이 수두룩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장애는 나의 일이기도 하고, 이동권은 우리 모두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다. 그래서 전장연을 지지하는 우리 시민들은 전장연의 싸움을 남의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정부는 장애인의 권리보장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고, 오세훈 서울시장과 서울교통공사는 전장연 활동가들에 대한 인권침해에 대해 사과하라. 장애인의 정당한 권리투쟁을 탄압하지 말라." (후략)

 
시민노래행동에 참여한 시민이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시민노래행동에 참여한 시민이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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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연을 지지하는 피켓을 들고 노래하는 시민노래행동
 전장연을 지지하는 피켓을 들고 노래하는 시민노래행동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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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일'이 아닌 전장연의 싸움 

우리의 노래를 들은 후 전장연의 한 활동가는 말했다. 

"이런 응원,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감동적이네요. 역시 예술의 힘은 강해요. 이것이 진정한 예술인 것 같아요."

삼각지역장의 시끄러운 마이크 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는 자부심과 응원의 힘이 원하는 곳에 닿았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집회가 끝나고 전장연 활동가들은 지하철 탑승을 시도했다. 그러나, 서울교통공사와 수많은 경찰이 이들의 탑승을 막았다. 나는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장애인은 사람이 아니냐, 집회 끝나고 전철 타고 집에 가려는데 왜 막느냐?"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에게 내 말이 들릴 리 없었다. 내 눈으로 장애인의 탑승을 가로막는 경찰과 교통공사 직원들을 보았다. 가슴이 찢어지고 분노가 치밀었다. 이것이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전장연 활동가들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박경석 공동대표는 휠체어에서 내린 뒤 출입문에 엎드려 탑승을 시도했다. 경찰은 곧 박경석 공동대표를 휠체어에 태워 전철에서 끌어냈다. 너무 기가 막혔다. 박경석을 끌어낸 전철은 곧 출발했다.

나는 전장연 활동가들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으나 약속 시간 때문에 전철에서 내리지 않았다. 출발이 지연된 객차에서 화를 내는 승객을 보았다. 그가 낸 화가 전장연과 박경석을 향한 것이 아니라, 전장연의 탑승을 거부한 경찰과 교통공사를 향한 것이길 바란다. 
 
서울교통공사는 삼각지역을 무정차한다는 안내문을 보냈다.
 서울교통공사는 삼각지역을 무정차한다는 안내문을 보냈다.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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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선 삼각지역 상선 당고개 방면 16:24경부터 무정차 통과하고 있으니 열차 이용에 참고 바랍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휴대전화에 위와 같은 안내 문자가 와있다. 내가 삼각지에서 전철을 탄 것이 마지막 정차였고, 그 이후부터 무정차가 시작된 모양이다. 박경석 대표가 승강장 바닥에서 "지하철 타게 해주세요"라고 외친 말에 서울교통공사는 '무정차'로 화답했다. 나는 야만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오이도역참사, #장애인권리예산, #시민노래행동, #삼각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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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인터뷰집,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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