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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상 시집
 정기상 시집
ⓒ 현진건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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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상 제2시집 <마음으로 빚은 그릇>이 18일 출간되었다. 시집에는 98편의 시가 '열심히 달려온 인생길에서/ 쉼표를 장식한 여행에서/ 세파를 넘어 온 세월을 되돌아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 농부 아들로서의 향수/ 부모님과 형제의 겨운 사랑/ 토닥이며 쌓은 우정'이라는 주제별로 분류되어 실렸다. 시인은 그 7부를 '일곱 그릇'으로 표현했다.

흙으로 베를 짜
펼쳐 놓은 한마당
어느 덧 여섯 번째
마고촌 도예전

정성으로 가득한 도자기 얼굴
인내와 노력이 빚어낸 어여쁜 가슴
열정 꿈틀거리는 한마당
도예가의 마음 점점이 깃든
마고촌 도예전

제각기 다른 얼굴
내뿜는 숨소리엔
가마 열기보다 더 뜨거운 열기가 있어
보는 이 가슴 요동치게 하는
마고촌 도예전


정기상의 시는 무엇보다도 운율을 잘 살리고 있어 읽기에 편안하다. 위에 인용한 '마고촌 도예전'의 경우도 세 연 모두 같은 시어로 끝나는 운율미를 보여준다. 다른 시들도 각운 등 외형률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잘 다듬어진 내재율로 가다듬어져 있다.

하지만 운율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만으로 어떤 시인의 '문학세계' 자체를 뛰어나다고 상찬할 수는 없다. 문학은 여느 예술 갈래보다도 특히 창작자의 '철학'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생각과 느낌을 나타내는 글을 표현 수단으로 사용하는 문학의 태생적 본성이다.

정기상 시인이 가장 즐겨쓰는 시어는 '행복'이다. 이번 시집에 실린 98편의 시 중 25편에 '행복'이 나온다. '행복' 다음으로 많은 시어가 21편에 등장하는 '오늘('하루' 포함)'이다. 공동체를 가리키는 '가족' '어머니' '고향' '친구' '우정' 등도 합해서 50여 회 보인다.

문제는, 모두가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지만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길을 간명하게 안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아 끝없이 고뇌했으니 평범한 보통사람이 그 문으로 들어가고자 무한 갈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지사일 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지적인 덕'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으로 보아 교육을 중시했는데, 품성적인 덕은 주로 습관에 의해 길러진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정기상 시인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흡사한 행복론을 구사한다. 실천을 통해 덕에 이르는 길로 안내하는 시편들이 많은 까닭이다.

삶이 허기질 땐
파란하늘 흰구름 위에
내 마음을 띄워 보자

삶이 허기질 땐
소꿉동무 불러내어
굴렁쇠를 굴려 보자

삶이 허기질 땐
등껍질 벗어두고
행복했던 시간을 쫓아가 보자

삶이 허기질 땐
재래시장 골목길을
저물도록 서성거려 보자

허기진 삶이
한바탕 웃음으로 채워질 테니


'삶이 허기질 때'를 보면 정기상은, 행복은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실존으로 우리 앞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푸른 하늘 흰구름 위에 마음을 띄우는 실천을 통해, 소꿉동무를 다시 만나 함께 굴렁쇠를 돌리는 실천을 통해, 현재적 삶을 짓누르는 등껍질을 벗어둔 채 재래시장 골목길을 저물도록 서성거리는 실천을 통해 '웃음'으로 표상되는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고 알려준다.

정기상 행복론의 핵심은 인위(人爲)가 아니라 자연(自然)을 근본 섭리로 하는 우주와, 다툼으로 가득한 경쟁사회를 뛰어넘어 차별과 이질감이 없는 공동체에 마음과 몸을 맡겨야 그것을 누릴 수 있다는 데 있다. '까치집'과 같은 절창도 그런 철학을 잘 보여준다.

좌청룡 우백호 감싸주고
하늘빛 금오지 펼쳐진
미루나무 꼭대기
하늘 아래 제일 명당
까치집

햇살 머무는 태양열 통나무집엔
사방 뚫린 창으로 세상 얘기 드나들고
큰방엔 꽃향기
작은방엔 풀냄새
거실엔 솔바람
건넛방엔 실바람
마당엔 풋풋한 숲속 인정들이 향기롭고
골목마다 골골의 정다운 이야기 스며들고
달님도 쉬었다 가는 다락방엔
별님 이야기 가득한
까치집

졸졸졸졸 졸졸졸졸 개울물 소리 베이스
딱-다라라락 딱-다라라락 딱따구리 드럼 반주 맞춰
산새들 합창 이어지면
까치가족 도란도란 오수를 즐기는
미루나무 꼭대기
까치집


피상적 또는 속물적 인식으로 보면 까치집은 현실세계의 빈촌에 해당된다. 하지만 정기상의 행복론에서는 그렇지 않다. 까치집은 미루나무 꼭대기 하늘 아래 제일 명당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그곳에는 늘 햇살이 머물고, 자연의 볕인 태양열과 천연의 통나무집을 누릴 수 있다.

시멘트 회색 담벽을 설치하지 않았으므로 사방 뚫린 창으로 세상 얘기가 드나든다. 큰방엔 꽃향기가, 작은방엔 풀냄새가 진동하고, 거실엔 솔바람이, 건넛방엔 실바람이 향기롭게 흘러다닌다. 그래서 달님도 쉬었다 간다. 또 다른 가작 '겨울 산아'도 시인의 그러한 경지를 고이 알게 해준다.

왜 옷을 벗니
찬바람이 불어오고
기온이 영하로 뚝뚝 떨어지는데
겨울 산아

감기란 놈 겁나지 않니
기침이란 놈 무섭지 않니
내 마음은 아려오는데
너는 청춘을 뽐내는 거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미동하지 않는 너의 굳건함을 본받으라는 거니
나는 용기가 없어

한파에 속을 다 내놓는 너는
하늘 향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 온
너의 청빈함을 보여 주려는 거지
나는 아직 감추고 싶은 게 이리도 많은데

속살 드러내고 하늘 향해 맹세하는 너를 보노라면
내 가슴엔 부끄러움의 강이 흐른다
나도 너처럼 속내를 보일 수 있는
내가 되고 싶구나!


찬바람 한파가 극성을 부리는 중에도 겨울산은 속을 다 내놓고 산다. 겨울 산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청춘, 사소한 외부 요인에 경거망동하지 않는 굳건함,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청빈을 기반으로 갖추고 있기에 가능하다. 시인은 스스로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감추고 싶은 게 많아서 늘 부끄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겨울산도 봄이 오고, 여름철이 되고, 단풍으로 형형색색 바뀌는 가을이면 여러 옷을 입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런 자아반성을 한다는 점에서 도리어 시인은 겨울산이나 다름없다. 시인은 '겨울 산아'에서 겨울산으로 현신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라산 배낭 등정'을 읽러보면 시인은 무생물과도 정겨움을 주고받으며 물아일체를 이룬다. 필자는 '한라산 배낭 등정'을 '까치집', '겨울 산아'와 더불어 이번 시집 최우수작으로 꼽는다. 아니, 누가 읽어도 "좋은 시"라는 감동을 받으리라 장담한다. 

진달래밭 대피소 눈앞에 보이니
가슴이 쿵덕인다
잘 있었구나
오래 기다렸지
배낭

미안해
너도 백록담이 보고 싶었을 텐데
내가 업고 갈 힘이 없었어
널 여기까지 업고 오니
내 힘이 소진되어
더 이상 너를 데려 갈 수 없었다
가는 세월 이길 수가 없구나
네가 이해해 주렴
진달래 밭 대피소에서 먼빛으로
백록담의 미소를 보고
진달래들의 한라산 얘기 많이 들었지?
그걸로 만족해 주길 바래
배낭

업혀라 가자
이제 하산이다
파란 하늘 이고 맑은 공기 마시며
산바람이 전해주는 숫사슴 사랑얘기에 빠져
돌부리들이 들려주는 한라산의 역사를
산그림자 속에 묻어두고 왔다고
아쉬움에 툴툴대는
배낭


나이 든 시인이 한라산 등정 때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산길에 올랐다. 배낭도 백록담을 보고 싶었을 텐데, 시인은 내내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윽고 하산길, 배낭을 두었던 곳에 닿는 순간 시인은 가슴을 쿵덕이며 배낭에게 말한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배낭도 시인에게 대답한다. 산바람이 전해주는 숫사슴 사랑얘기에 빠져 돌부리들이 들려주는 한라산의 역사를 제대로 마음에 챙기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 주인에 그 배낭이다. 시인이 배낭에게 또 말한다. 업혀라, 가자! 이만하면 시인과 물상은 우주의 한 모퉁이에 나란히 서 있는 완전한 일심동체이다.

정기상 시인은 어떻게 자연, 동물, 물상과 이토록 참된 물아일체를 이룰 수 있었을까? 시인은 '오늘'에 최선을 다해 헌신한다. "여명을 알리는 새 소리"가 들려오면 "내가 만드는 하루"를 맞이한다(<내가 만드는 하루>). "내 마음 있는 곳에 내가 있고 / 내 마음 길 따라 내 인생 있네 / 사람의 마음은 / 인생 조련사"(<인생 조련사>)라는 사실을 잘 헤아리고 있는 까닭이다.

'오늘'에 충실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원용하면 '선 의지'로 자신을 가다듬어둔 수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선 의지'를 정기상 시인은 "약속"이라고 달리 표현했다(<약속>). 자연도 사람도 약속을 지킬 때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일반인을 행복으로 안내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존재이다. 시인은 그 길잡이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느낄 때 행복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시 창작에 관한 한 "등껍질"(<삶이 허기질 때>)이 가벼운 독자는 그 길을 오롯이 담고 있는 좋은 시를 읽을 때 행복하다. 필자는 지금 행복하다.

태그:#정기상, #마음으로빚은그릇, #행복,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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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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