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09 13:29최종 업데이트 23.01.09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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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요미우리신문> 기사 "히로시마 서밋에 한국 대통령 초대 검토" ⓒ 요미우리신문


강제징용(강제동원)에 관한 윤석열 정부의 처리 과정을 지켜보는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일본 초청' 카드를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7일 <요미우리신문>은 정부 관계자들의 제보를 인용한 '히로시마 서밋에 한국 대통령 초대 검토'라는 기사에서 "일본 정부는 히로시마시에서 5월 19~21일 개최될 선진 7개국 수뇌회담(G7 서밋)에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을 초대하는 방향으로 검토에 들어갔다"라며 "한국 측도 서밋 참가를 강하게 희망하고 있어, 실현되면 연대 강화를 내외에 보이는 호기가 된다"라고 보도했다.


2020년 5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G7은 구식'이라며 G7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므로 한국·인도·호주 등을 추가해 G10이나 G11로 확대하겠다는 방안을 언급했다. 지금의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처럼 한국을 G7에 초청하겠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을 정회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이다.

당시 트럼프의 구상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쪽이 일본 정부다. 아베 신조 내각은 '북한과 중국에 대한 한국의 입장이 미국·일본과 다르다'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한국의 대북 태도가 2020년에 비해 훨씬 강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기시다 내각이 이것 때문에 초청 문제를 검토하는 것은 아니다. <요미우리신문>은 징용 문제를 언급하면서 "일본 측은 일본 기업에 대한 배상명령은 인정되지 않는다며 한국 정부에 해결을 요구하는 입장을 흩트리지 않고 있다"라고 한 뒤 "금후의 한국 측의 태도를 지켜보고 나서 초대를 최종 판단할 태세"라고 전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인 피해자와 유족들이 미쓰비시나 일본제철 등을 상대로 더 이상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고, 한국 법원 역시 더 이상 손해배상 판결을 내리거나 일본 기업 자산을 압류하지 않도록 하는 상태'를 윤석열 정부가 만들어내는가 여부를 최종 확인하고자 한다는 게 일본 언론의 보도다. 그것을 관찰한 뒤에 5월 G7 회의에 초청할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요미우리신문> 기사와 같은 날 비슷한 제목의 < TV 아사히 뉴스 > 인터넷판 기사 '히로시마 서밋 한국 대통령 초대 검토'는 "한국 측의 대응을 지켜보며 초봄까지 판단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3월 정도까지는 윤석열 정부의 처리 방식을 관찰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 상대로도 '일본 초청' 카드
 

2022년 11월 13일(현지시간) 윤석열 대통령이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손을 잡은 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이러한 일본 보도들과 비슷한 시점인 미국 시각 1월 6일, 미 의회에서 <미일관계: 의회의 쟁점>이라는 보고서가 나왔다. 이 보고서 역시 윤석열 정부에 은근한 압박을 가했다. 보고서는 윤 정부가 일본 기업의 입장에서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상황을 소개하면서, 낮은 지지율과 여소야대에 처해 있는 윤 정부가 국내 반대를 극복할 수 있을지 불명확하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런 뒤 "서울과 도쿄의 빈약한 관계는 북한 정책과 중국의 부상에 대한 대응을 복잡하게 함으로써 미국의 이익을 위태롭게 만든다"라고 지적했다. 윤 정부가 징용 문제를 봉합하지 못해 한일관계를 불안하게 만들면 미국 국익에 손해가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내세우며 양국의 타협을 주문하는 가운데 일본 정부가 '일본 초청'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한국 정부의 막판 분발을 촉구하는 것이 지금 상황이다.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상황이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통칭 '한일협정') 체결 직전에도 있었다.

지금의 윤석열 정부처럼 박정희 정부도 일본의 책임을 묻지 않는 선에서 식민지배 문제를 봉합하고자 했다. 굴욕적 태도를 보이는 박정희 정부를 상대로 일본 정부는 막판에 '일본 초청'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박정희는 그해 1월 1일 신년사에서 "을사년의 새 아침", "정녕 이 을사년이야말로" 등등의 표현을 사용해 1905년 을사늑약과 박정희 자신을 연상시키게 만드는 우를 범했다. 그해 1월 12일 <경향신문>에는 '금년이 을사년이라 한일교섭이 불리하다'라는 시중의 발언이 소개되는 한편 '제2의 이완용'으로 비판받지 않게 하라는 문구가 실렸다.

한일협정에 대한 그 같은 국민적 우려 속에서도 박정희는 1월 9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금년은 가부간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협정 체결 의지를 강력히 내비쳤다. 그의 의지는 2월 20일 한층 명확해졌다. 이날 양국은 한일기본조약을 가조인했다. 정식 서명만 남게 됐던 것이다.

이로 인해 상황이 막판 국면에 돌입했을 때 사토 에이사쿠(좌등영작) 내각은 '일본 초청' 카드를 꺼내놓았다. 그해 3월 25일 <경향신문>은 "좌등 일본 수상은 24일 박정희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공식적으로 초청했다고 일본 정부의 한 대변인이 말했다"라고 전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에 따르면, 사토 내각이 희망하는 방일 시점은 그해 5월이었다. 박정희가 5월에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혹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들러달라는 게 사토 내각의 주문이었다. 4월 12일 <경향신문>은 "정부는 박 대통령의 방미를 전후해서 정식 조인을 할 예정이지만, 지금으로서는 5월 하순 방미 귀로에 일본에 들러 조인할 가능성이 훨씬 짙다"라고 분석했다.

일본이 의도한 궁극적 목표
 

1965년 4월 14일 자 <동아일보> "5월 중 정식 조인" 기사 ⓒ 동아일보


이 보도는 다음 날 박정희가 기자들에게 말한 내용과 일치했다. 14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그는 "5월 중에는 가능할 것으로 본다"라며 "조인 장소는 서울에서 할지 동경에서 할지 아직 미정이다"라고 답했다. 그도 일본에 갈 의향이 있었으며, 국민 반대가 심한 서울을 피해 그곳에서 일을 마무리할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보면, 박정희가 5월에 일본을 방문해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데 대해 양국의 의견 교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정부의 초청 건이 박정희의 막판 분발을 촉구하는 동시에, 박정희가 도쿄에서 손쉽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측면도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박정희의 방일은 무산됐다. 1964년에 절정에 올랐던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1965년 이 시점에 재폭발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1965년 4월 13일 각 대학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는 박 정권뿐 아니라 일본에도 충격을 줬다. 4월 14일 <동아일보>는 "일본 정부와 여론에 상당한 충격을 준 것 같다"라고 전했다.

4·19혁명 5주년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박정희가 일본에 가서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구상이 추진됐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한일 양국의 우려는 결국 박정희의 방일을 무산시키는 요인이 됐다.

일본이 박정희 초청 카드를 꺼낸 궁극적 목적은 박정희의 막판 분발을 촉구하는 데 있었다. 박정희의 방일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래서인지 일본은 박정희 초청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대신, 일본은 박정희의 의지를 재확인하고 그를 분발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일본 정부의 초청 의사가 표시된 뒤 박정희는 잠시나마 방일을 추진했고 협정 체결을 마무리하고자 일을 서둘렀다. 일본이 의도한 궁극적 목표는 이뤄진 셈이다.

굴욕적인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은 막판에 일본이 한국 대통령 방일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속에서 신속히 마무리됐다. 기시다 내각이 윤 대통령 초청을 검토한다는 보도는 그때와 똑같지는 않지만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는 일본의 대한전략을 생각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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