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11 10:39최종 업데이트 23.01.1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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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베트남 전통의자)을 쓴 거리의 행상 ⓒ Thomas G

 
2003년에 베트남을 길게 여행해봤다. 1년 반 동안 인도 취재를 하고, 여기에 다시 1년을 더해 책 한 권을 쓴 직후였다. 당시는 인도 붐이 절정에 달하던 시점이라 한 번에 천만 원 가량의 돈을 쥐었는데, 그간의 고생을 스스로에게 보상해주기 위해서라도 여행을 떠나야 했다.

그러다 고른 게 베트남이다. 타이, 라오스, 캄보디아는 다 가본 터라 소위 말하는 베트남만 길게 살펴보면 대략 인도차이나 수박 겉핥기가 되는 셈이었다. 원래대로면 베트남 여행은 90년대 말쯤에 이루어질 뻔했다. 하지만 당시 <한겨레>에서 한참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을 해서 뭔가 죄책감이 들었다고나 할까?


1999년 네팔 카트만두와 포카라에서 수많은 한국어 구사 가능한 네팔 사람들을 볼 때의 그 묘한 미안함(당시에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대우, 그리고 임금 체불이 지금보다 훨씬 심했고, 한동안 사회문제였다)을 또 느끼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잠시, 정말 잠깐 하노이에 발을 디뎠다가 이내 빼버렸다. 

그러다 보니 사실상 두 번째 여행이긴 했지만, 베트남에 대한 정보라곤 당시 사람들의 일반상식 정도에 국한됐다. 198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나에게 베트남은 그저 공산당에 점령당한 패망의 나라였다. 한참 반공교육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라, 매년 4월 30일. 즉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오늘날의 호찌민) 함락일이 되면 매번 특별 수업을 했고 교실 한쪽에 매달려있던 브라운관 티비에서는 보트피플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바다로 뛰어드는 영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줬다. 

당시는 아이들의 정서발달을 위해 끔찍한 장면을 보여주는 건 자제하자는 인식 따위는 없었다. 매번 보트에서 뛰어내리는 베트남 사람들과 해골이 층층이 쌓인, 당시 킬링필드라 불리던 캄보디아의 풍경을 반복해 봐야만 했다. 그런 기괴한 상영회가 있는 날 이후엔 한 달가량 야간에 화장실 가는 걸 두려워했다. 

정말 가벼운 여행 계획이었다. 베트남은 남북으로 기니 하노이로 들어가 호찌민을 거쳐 일단 베트남을 남북으로 종단한 뒤 캄보디아를 횡단해 타이의 방콕까지 가서 비행기 표를 구입한 후, 다시 인도로 가자는 정도의 소소한 플랜이 있었을 뿐이다.
 

시클로, 이제는 하노이에서도 사라지고 있는 풍경 ⓒ Thomas G

 
처음 베트남에 도착해서 느낀 가장 큰 생경함은 글자가 모두 읽을 수 없는 알파벳으로 되어있단 점이었다. 모두 대문자만 사용했고, 모음 위에는 생전 처음 보는 기호가 붙어있었다. 대충 베트남 사람들의 발음과 맞춰보니 내가 읽는 방식이랑 달랐다. 막연하게 한자 문화권이니 간판에 한자 몇 글자라도 있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애초에 쌀국수와 월남쌈이나 실컷 먹자고 시작한 가벼운 여행이었지만, 간판을 읽어낼 수 없다는 건, 그리고 그 간판에 내가 아는 문자의 병기가 거의 없다는 건 꽤 큰 리스크였다. 가장 기초적인 정보수집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쌀국숫집은 포(PHO)라고 적혀 있어서 구분하기 쉬웠다. 당시만 해도 하노이의 포 집은 몇몇 현대화된 가게를 제외하면 소고기 포집은 PHO BO라고 적혀 있었고, 닭고기 포집은 PHO GA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에서 먹던 포와는 좀 달랐는데, 일단 면이 보들보들했고, 국물이 한국처럼 맑지 않았다. 국물에서 좀 더 진한 향신료 맛이 올라오는 것도 달랐지만, 무엇보다 뜨거운 국물에 날고기를 넣어서 국물 안에서 익혀먹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소고기는 핏물을 빼지 않았기에 익으면서 국물에 약간의 거품도 함께 남겼다. 

그때만 해도 이런 차이에 대해 골똘히 생각할 때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무심히 넘어갔다. 베트남 사람들은 아침에는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었고, 연유를 탄 커피를 즐겼으며, 당시만 해도 하노이에서만 보이던 분짜라는 돼지고기와 곁들이는 차가운 쌀국수 요리는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다. 

이후 나는 베이징, 상하이, 홍콩 여행 안내서를 집필하게 됐고, 그 도시들마다 베트남 식당 두서너 곳은 소개하게 됐으니 덕분에 여러 도시의 베트남 요리를 맛보게 된 셈이다. 

그 시절 외국요리 중 최고, 분짜

그 즈음, 그러니까 2010년쯤 나는 분짜 그리움에 빠져있었다. 1990년대의 어느 끝자락, 하노이에 살짝 발을 디뎠을 때 이 요리 맛을 봤다. 사람들이 나지막한 목욕탕 의자에 앉아 뭔갈 계속 입에 넣고 있었고, 가게에서는 연신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살펴보니 한그릇 요리였는데, 새하얀 국수를 삶아 느억맘을 희석한 젓국 소스에 담갔다가 양상추, 박하, 고수, 훈제향 가득한 돼지 목살 구이와 함께 먹었다. 그 맛은 1990년대 내가 맛본 외국 요리 중 가히 최고였다. 
 

분짜. 쌀국수와 채소, 구운돼지고기, 넴이 한 소쿠리에 가득하다. ⓒ 전명윤

 
하지만 하노이를 뜨자 그 요리는 이내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포는 비록 남북의 맛이 다름에도 베트남 어딜 가나 먹을 수 있었지만, 분짜는 그렇지 않았다.

그즈음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베트남 요리 전성기가 도래했지만, 어디에도 분짜는 볼 수 없었거나, 분짜라고 파는 드문 요리조차 달콤하게 마리네이드 한 후 석쇠에 얹은 고기를 숯불에 직화로 구워내는 그 풍미와 향미까지 재현한 집은 만날 수가 없었다. 

대체 이 이유가 뭔지에 대해서 인터넷 등 찾아볼 만한 것은 대략 찾아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홍콩 북부, 카우롱 반도와 신계를 나누는 바운더리 로드에서 신계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베트남 식당이 모여 있는 삼수이포라는 지역이 나온다. 요즘이야 외국인 여행자들이 삼수이포까지 진출했지만 그때만 해도 몽콕 북쪽으로는 가지도 않던 시절이니 나 또한 책에 소개할 식당을 찾아간 건 아니었다. 

홍콩은 그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베트남 보트피플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난민촌을 거쳐 홍콩에 정착한 베트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삼수이포 일대였다. 혹시나 싶었다. 단순하게 분짜를 먹을 수 있겠느냐는 마음.

하지만 그 곳에서도 분짜는 만날 수 없었다. 분짜의 베트남어 표기까지 들이밀었지만 2대에 걸쳐 영업한다는, 그 일대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베트남 식당 주인도 손사래를 쳤다. 아들은 아버지에게까지 가 물었다. 그들은 한참 베트남어로 이야기하더니 다시 홀로 나와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그건 하노이 음식이래."
"그 음식을 하노이에서 처음 먹은 건 맞아. 그런데 대관절 그게 무슨 의미야? 하노이도 베트남이잖아?"
"이 친구야 잘 생각해봐, 베트남이 어찌 됐어? 북쪽이 남쪽을 통일했잖아. 그 탓에 우리가 지금 홍콩에 살고 있는 거 아니야. 우리는 남베트남 출신이야. 넌 북베트남 요리를 찾는 거고."


아차 싶었다.
그저 단 하나의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상기했을 뿐인데, 그간 내 헛된 노력이 얼마나 망상에 가까웠는지 순식간에 밀려왔다. 

여기서 잠깐 베트남 역사를 슬쩍 들여다보면, 중세시기만 해도 우리가 베트남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하노이를 비롯한 북부지역에 불과했고, 냐짱 아래 남부지역은 힌두교를 숭배하는 참파 왕국이 꽤 오랜 기간 지배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호찌민 일대는 아예 크메르(오늘날의 캄보디아) 제국의 영토. 북베트남의 왕조들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까지 남부의 참파 왕조를 몰아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실제로 베트남 역사책은 베트남의 역사를 남진의 과정으로 기술한다. 뭐 북쪽에는 중국이 있는데 그들과 정복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을 테니 확장할 수 있는 공간 또한 남쪽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 참파 왕국이 완전하게 북베트남에 흡수된 게 1832년쯤이고, 청불전쟁으로 베트남의 종주권이 프랑스로 넘어가며 본격적인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 게 1885년이니 베트남은 통일 왕조를 건설하고 50년 만에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셈이다. 

참고로 남베트남 일대를 다스리던 참파 왕국의 주역인 참족(인종적으로도 말레이계)은 현재 약 40만 정도로 쪼그라든 상태이긴 하나,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람들의 외모가 아예 다른 점에서도 알 수 있듯(북베트남은 우리와 별반 다를 거 없는 얼굴이지만, 남베트남으로 가면서 말레이계 얼굴의 윤곽이 드러난다) 남베트남인은 참파 왕국 시기 참족과 베트족의 오랜 교류 끝에 상당수의 통혼이 이루어졌고, 그게 오늘날 뚜렷하게 대비되는 북베트남인과의 외모 차이로 존재하게 됐다.  
 

중세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 하노이 ⓒ Cuong Le

 
베트남 쌀국수, 포라는 말의 정체

처음에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궁금했던 몇 가지 중 하나는 포라는 말의 정체였다. 전술했듯 현재 베트남 역사의 시작은 오늘날의 하노이 일대인데 지도만 봐도 알겠지만 중국 남부 광시 좡쭈(자치구)와 연결된다. 실제로 광시 좡쭈의 성도인 난닝(南宁)에서는 하노이까지 운행하는 국제 열차도 손쉽게 탈 수 있다. 

중국 주변국들은 중국 문화의 원심력 안에서 자유롭기 쉽지 않다. 베트남은 기본적으로 외왕내제(外王內帝), 즉 중화 체제 안에서 중국 황제에게는 제후국으로서의 예를 다 하지만 국내적으로 황제라 칭하는 이중정치구조였단 말이다. 참고로 한국은 고려까지는 외왕내제를 했고, 조선은………그 조차 하지 않았다. 

이 말은 베트남은 기본적으로 중화 세계관의 일부였고, 다시 말해 베트남 역사 속에서의 자주독립은 대부분의 시기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이 점은 한반도에 존재했던 모든 국가의 자주독립 딜레마와 거의 동일하다 할 수 있다. 

중국에도 쌀국수가 있다. 정확하게 중국은 밀국수와 쌀국수를 구분해 밀국수는 麵이라고 쓰고 쌀국수는 粉이라고 쓴다. 각각 중국 발음으로는 몐, 그리고 펀이라고 읽는다. 쌀국수는 넓이에 따라 또 둘로 구분하는데, 넓적한 쌀국수는 허펀(河粉, 광둥어 발음으로는 호판)이라고 하고 가느다란 국수는 펀쓰(粉絲)라고 한다. 

하여, 약간의 중국어 상식을 가지고, 처음에는 넙적 쌀국수인 허펀이 베트남으로 들어가 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중국 쪽의 토착어를 쭤장좡어(左江壯語)라고 하는데, 이쪽의 발음은 호에 가깝기 때문이다. 

게다가 포에 들어가는 넙적한 쌀국수인 허펀이 중국에서 왔다는 건 입증된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포의 이름이 허펀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는 요즘은 소수설에 속한다. 반론의 유력한 근거로는 포의 국물은 소고기 베이스가 일반적인데, 오랜 기간 농경 국가였던 베트남은 예전에 소를 식용으로 도살하거나 소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 PHO 정확하게는 하노이 스타일 ⓒ Markus Winkler

 
그렇다면 이 소고기탕이 어디서 왔냐에 집중하게 되는데, 요즘 포의 유래에 대한 다수설은 프랑스식 소고기 탕인 포토푀(pot-au-feu)에서 온 게 아니겠냐고 추측한다. 

청일 전쟁의 결과로 조선왕조에 대한 청 제국의 종주권이 상실됐듯, 청불전쟁의 결과 청제국이 베트남에 패배하면서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이 프랑스로 넘어갔다고 본다.

참 서글픈 게, 두 나라 모두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중국이라는 굴레는 벗는 순간 새로운 침략자를 맞이한 셈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프랑스에 의해 베트남은 현재의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코친차이나, 중부의 안남, 그리고 북부의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통킹으로 분할된다. 형식적으로야 코친차이나만 프랑스가 직접 통치했다고 하지만, 제국주의 시절의 보호국을 독립국으로 보는 시각은 없으니 현재의 베트남 일대가 모두 프랑스령이 됐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알다시피 프랑스인들에게 소고기는 가장 중요한 식재료다. 많은 식민지에서 그랬듯 식민지 지배자들은 그 지역의 재료를 이용해 자신들이 먹던 요리를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당시만 해도 항공 운송이 발달했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식민지에서 대체재를 찾아야 했다. 식물은 씨앗을 가져와 재배하면 됐고, 소는 농경으로 쓰이던 녀석을 매수해 잡았다. 아예 고기로 활용하기 위해 소를 키운 건 이 시점으로부터 조금 뒤의 일이다. 

당시엔 남성들이 요리를 하던 시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 열대의 지역까지 온가족으로 데리고 부임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프랑스인 홀애비들은 자신들이 먹던 맛을 최대한 기억해내 그들의 베트남인 요리사들에게 전수했다. 요리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정교한 전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차피 식재들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완벽한 재현도 어려웠다. 인도 차이나풍의 프랑스 요리는 그렇게 탄생했고, 그중 포토푀는 쌀쌀한 북부의 겨울을 나기에 좋은, 늘 먹는 요리였다. 

프랑스인 '나으리'를 모시던 베트남 요리사는 종종 해고되기도 했고, 때로는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자기가 배운 요리를 선보이기도 했다. 요리 맛없기로 유명한 영국이야 인도에 어떤 요리적 감명을 주지 못한 채, 되레 인도 요리를 받아들여 영국에서 꽃피웠지만, 베트남의 지배자는 유럽에서 요리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프랑스였다.

어찌 보면 중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으니 이 동네 요리가 맛없으면 외려 이상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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