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에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기에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 넷플릭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이탈리아 책은 무얼까? 바로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이다. 원제는 <피노키오의 모험, 꼭두각시 이야기>, 로마 지역 신문에 연재된 후 1883년 책으로 출간된 이 책은 260개국에서 번역되었으며 20차례 넘게 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 어린이 집만 다녀도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를 아는 세상, 그 익숙한 이야기를 <판의 미로>의 기에르모 델토로와 마크 구스타프손 감독이 새로이 만들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피노키오는 자신을 만들어 준 제페토 할아버지의 말을 안 듣고 거짓말을 하고, 나쁜 이들의 유혹에 빠져 세상 밖으로 떠돌다 '개과천선'하게 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럼에도 아이다운 선량함 때문에 미워할 수 없는 아이, 그런 피노키오가 모든 시행착오를 겪고 아버지의 착한 아들로, 그리고 온전한 인간이 되었을 때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독특한 미장센과 그보다 더 독특한 서사로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히 구축한 기에르모 델토로 감독의 손길을 거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피노키오>는 어떨까? 애니메이션이기에 아이들에게 친숙할 듯하지만 막상 작품을 보고나면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라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 아닐까. 거기서 더 나아가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에 대해 숙고해보게 만드는 영화였다. 특히 세 개의 무덤이 있는 언덕 위 장면은 말 그대로 회자정리(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기 마련, 會者定離)의 인생사이다. 

제페토의 두 아들, 카를로와 피노키오 

영화의 배경은 1차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작은 마을이다. 엄마는 없어도 10살 난 착한 아들 카를로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싶게 평온하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목수 제페토, 그런데 그만 폭격기로 인해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다. 

아들이 손에 쥔 솔방울이 나무가 되는 시간까지도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제페토는 어느 날 밤 분노에 못 이겨 그 나무를 베어 무언가를 만든다. 그리고 제페토의 아픔을 가여이 여긴 숲의 정령이 그 나무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기에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기에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 넷플릭스

 
원작은 물론, 많은 리메이크 작에서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착하지만은 않은 아이였다. 이 말인즉 그 맞은 편에 기준으로 '착한 아이'가 있다는 뜻이다. 즉 학교에 잘 다니고, 아버지 말씀 잘 듣고, 어른들이 하라는 거는 잘 따르는 아이 말이다. 이게 사회화이고, 규범화라면, 피노키오는 그런 면이 부족한 아이였다. 

그런데 기에르모 텔토로 감독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왔던 피노키오에 대해 반문한다. 나무토막에 불과했던 아이가 무엇을 알까? 제페토에게 아버지라 부르며 등장한 나무토막, 마치 갓 작동한 로봇처럼 팔 다리는 제 멋대로 움직이고, 그보다 더 제멋대로인 것은 그의 생각, 세상 모든 게 신기하다. 그런데 그 신기함이 보는 이들에게는 막무가내요, 안하무인인 것이다. 제멋대로 피노키오, 그렇다면 피노키오처럼 세상 밖으로 처음 나와 자신의 발로 이제 막 세상을 걷기 시작한 우리 아이들은 무에 그리 다를까. 

아들을 그리워하다 못해 폐인이 되어가는 제페토가 안타까워 피노키오를 보내주었지만, 제페토는 눈 앞의 피노키오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피노키오가 자신을 아버지라 하니, 피노키오도 카를로였으면 한다. 그에게는 이미 확고한 '카를로'라는 아들의 기준이 있다. 결국 그는 말한다.

"너는 왜 카를로처럼 하지 못하니?"

피노키오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버지 제페토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파시즘의 수호자 시장은 막무가내로 피노키오를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피노키오가 가야 하는 학교는 파시즘 체제에 걸맞는 인간을 양성하는 곳이다. 아버지 제페토와 행복하게 살기 위해 태어난 피노키오지만 그를 맞이한 아버지의 세상은 파시즘 앞에 벌벌 떨고, 돈벌이를 위해 기만과 협잡이 난무하는 곳이다. 그래도 아버지 말씀에 따라 피노키오는 카를로의 책을 가지고 학교로 향하지만 서커스 단장 볼프 백작이 나타나 피노키오를 유혹한다. 

영화 속에는 우리 사는 세상 속 여러 모습의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아니 여러 아버지들을 통해 우리가 사는 아버지의 세상을 은유한다. 피노키오에게 카를로가 아니라는 제페토, 자신의 아들은 물론 마을 아이들을 죽음의 훈련소로 내모는, 그리고 최후의 승자가 되어야 한다며 총을 쥐어주는 이데올로기의 신봉자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이익에 따라 자신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스파차투라를 짚신짝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서커스의 볼프 백작, 그들은 저마다 자신을 아버지로 따르는 아이들을 자신만의 잣대에 맞춰 '취급'한다.

원작의 피노키오가 말 안 듣는 아들과 착한 아버지의 순애보였다면, 이제 기에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는 아버지 세상에 던져진 순진무구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아이들의 잔혹사이다. 오래 전 감독의 명작 <판의 미로>처럼. 그래서일까, 감독은 이 작품을 비롯하여 <판의 미로> <악마의 등뼈>를 자신의 삼부작이라 칭한다. 

삶, 그리고 인연 
 
 기에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기에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 넷플릭스

 
볼프 백작의 유혹에 넘어간 아들 피노키오를 구하러 온 아버지 제페토, 마치 솔로몬 왕 앞에서 서로 내 아이라 우기던 두 여인처럼 피노키오를 두고 볼프 백작과 제페토는 양 쪽에서 잡고 실랑이를 벌인다. 솔로몬의 친엄마와 달리 제페토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피노키오는 그만 부서지고 죽음의 세계로 떨어진다. 하지만, 죽음의 여신은 말한다. "잠시 후 너는 다시 생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렇게 다시 삶의 공간으로 돌아간 피노키오, 죽지 않는 운명을 맞이한 피노키오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볼프 백작의 협박에 전전긍긍하는 아버지 제페토를 염려한 피노키오는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그리고 돈을 벌어 아버지에게 돌아가기 위해 기꺼이 볼프 백작의 꼭두각시가 되는 선택을 한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태어난 아이는 '가족'을 짊어지고 생의 수레바퀴 아래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

다시 죽음의 전당에 온 피노키오에게 죽음의 여신은 말한다. 점점 더 너의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같다고. 마치 해탈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억겁의 삶을 윤회하는 인간사를 상징하듯, 피노키오는 제페토의 아들로 태어난 인연의 굴레에 빠진다. 그리고 그 인연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던진다. 영화가 절정에 이를 즈음 어느덧 보는 이들은 피노키오가 그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란 걸 잊을 만큼 나무토막 주인공은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피노키오에게 아버지는 비로소 말한다. "난 널 사랑한단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I love you exactly as you are.", 아름다운 동화의 해피엔딩일까.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멘토였던 귀뚜라미 세바스티안 J 크리켓의 단 한 가지 소원 덕분에 피노키오는 살아있는 자들과의 모든 인연, 그 끝을 마주한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세상을 향해 나선다. 인연의 끝은 무엇일까? 이별일까, 아니면 비로소 나의 길을 떠나는 것일까. 영화는 마지막까지 질문을 잊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cucumberjh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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