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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 언론인으로 평가 받는 청암 송건호 선생은 1927년 9월 27일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기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중에 군사정권 시절 언론탄압에 맞서며 재야 활동을 시작했고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을 출간하는 등 한국현대사 연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은평시민신문 창간 18주년을 맞이해 우리 곁에 함께 계셨던 청암 선생을 만나보고자 한다. 다음은 청암 송건호 선생의 장남 송준용씨와의 인터뷰 내용과 책 <청암 송건호>(한겨레출판, 2018.12)를 참고해 재구성한 글이다. 
   
"저들이 다 맞다, 죽으면 죽었지 못하겠다"
 
역촌동 자택 지하실에서. 두 번 침수되면서 책이 상해서 청암의 상심이 컸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역촌동 자택 지하실에서. 두 번 침수되면서 책이 상해서 청암의 상심이 컸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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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구 역촌동은 청암 송건호 선생이 1972년부터 9월부터 2001년 12월 21일 돌아가실 때까지 지낸 곳이다. 한창 기자로서 맹활약을 펼치던 시기부터 언론탄압에 저항하며 재야에서 활동했다. <말>지 창간, <한겨레신문> 창간 등 언론사에 남길 굵직한 업적을 남긴 모든 시기를 역촌동에서 보낸 셈이다. 

현재 청암언론문화재단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송건호 선생의 장남 송준용 이사는 역촌동으로 이사 오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1972년 9월에 은평구 역촌동으로 이사를 왔어요. 저는 대조초등학교 6학년으로 전학을 왔죠.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아버지가 일선 기자로서 최전성기를 달릴 때였어요. 동아일보 수석 논설위원, 통일문제 연구소장으로 계시면서 남북적십자 회담을 두 차례 갔다 오셨어요. 일선 기자로서 전성기 때 은평으로 이사를 온 셈이죠. 그 당시 역촌동은 그냥 비만 오면 진흙탕이었는데 거기 단독주택으로 와서 거의 20년 가까이 계신 거죠. 돌아가신 날까지."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오른 송건호 선생은 서슬 퍼런 유신체제 아래에서도 민주화운동을 보도하고 사회의 부조리와 병폐를 고발했다. 하지만 정권에 불리한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폭언을 듣고 뺨을 맞는 수모를 겪기도 했고 문화공보부가 언론사에 내린 '보도한계지침'을 어겼다고 연행되기도 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활동이 이어지고 이런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려고 나선 기자들이 사측과 대립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청암은 1975년 초 "사실을 국민과 정부에 알리는 것은 언론의 자유가 아니라 의무"라고 밝히며 자유언론운동을 지지했다. 

동아일보는 1975년 3월 경영난을 이유로 기자 18명을 해임했다. 회사의 강경책에 맞서 제작거부에 들어갔던 기자들은 강제해산 되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청암은 눈물로 사태해결을 호소하며 수습에 나섰지만 회사는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송준용 이사는 "아버지가 '죽으면 죽었지 (기자들 해고는) 못하겠다. 저 사람들 얘기가 다 맞고 옳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사표를 내셨다"고 전했다. 

재야로 나와서도 계속된 정론직필

동아일보를 떠난 건 역촌동으로 이사 온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6남매의 아버지였고 가장이었던 그가 느꼈을 암담함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지만 실제 그가 만난 현실은 더 참담했다.

재야로 나온 청암이 할 수 있는 일은 글쓰기와 강의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원고료는 턱없이 작았고 정권 눈치를 보는 학교는 그에게 오랜 시간 강의를 맡기지 않았다. 기본적인 생활고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청암은 일종의 공황장애를 겪게 되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지러워 토하고 일어서지도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을 버티게 해 준건 부인 이정순 여사였다. 
 
1973년 동아일보 논설위원이던 시절, 정계를 은퇴한 박순천 여사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1973년 동아일보 논설위원이던 시절, 정계를 은퇴한 박순천 여사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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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가족사진. 그의 생애에서 비교적 평온하던 시절이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1972년 가족사진. 그의 생애에서 비교적 평온하던 시절이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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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아버지하고 성격이 완전히 다르셨어요. 여장부 스타일이셨어요. 어머니가 버텨주셨기 때문에 아버지도 활동할 수 있으셨죠."

송준용 이사가 기억하는 이버지는 내향적이고 꼼꼼한 선비 같은 반면 어머니는 외향적이고 씩씩하고 대범한 분이다. 

졸지에 직업을 잃고 재야로 나온 당시 상황을 청암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 달에 20만 원 봉급으로도 힘겨울 판인데 그나마 한 푼도 안 들어오게 되었으니 장차 생활대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생활에 대한 불안감이 끊임없이 엄습해왔다. 어느 날 갑자기 두려워지곤 했다. 이럴 때면 나는 미친 듯이 서오릉 쪽으로 달려갔다. 숨이 차 헉헉하면서도 두려움은 떠나지 않았다." - <청암 송건호> 중에서

재야활동을 하는 청암에게 박정희 정권은 몇 차례나 청와대에 와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암은 "나는 행정가가 아닌 언론인"이라 말하며 뿌리쳤다. 하지만 어느 날은 제안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봇대를 붙잡고 울었다 한다. 편한 길을 앞에 두고 험난한 길을 선택한 그도 힘든 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혹이 굉장히 많았죠. 청와대에서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으니까 6개월 정도 세계일주 하다 청와대로 들어오라고요. 그런데 아버지는 거절하셨어요. 몇 번이나 거절하셨죠. 아버님 성격이 워낙 꼬장꼬장하셔서 나중에 정보부 사람이 존경한다고 그러더군요."

송준용 이사는 늘 집 근처에는 아버지를 감시하던 정보요원들이 있었다고 전했다. 
   
청암의 별명이 '형광등'인 이유

1980년 짧았던 민주화의 바람 속에 청암은 편집권 독립, 언론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또한 장을병, 백낙청 등과 만나 '나라가 나아갈 방향은 제시하는 것은 지식인의 책무'라는 인식을 같이하고 모임을 만들어 시국선언을 하기로 했다. 선언문에서는 비상계엄령 해제, 학문과 발표의 자유보장, 대학 자율성 보장, 언론의 독립과 자유 보장 등을 촉구했다. 하지만 그 선언문은 청암을 옭아매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송준용 이사가 전하는 이야기다. 

"저도 서울역 앞에서 막 휩쓸려서 같이 데모를 하는데 유인물이 뿌려졌고 그 134인 지식인 시국 선언이 떨어져서 봤어요. 나중에 보니 아버지하고 몇 분이 모이셨고 아버지가 그 초안을 잡아서 발표한 거였어요. 그게 빌미가 돼 며칠 후에 끌려가셨죠."

1980년 5월 20일 남영동 치안본부로 끌려가 19일간 가혹한 취조를 받은 청암은 정치인 김대중의 돈을 받아 동아투위에 전달했냐고 묻고 그가 거짓 자백을 할 때까지 매질을 퍼부었다. 

"원고 청탁 받은 거 써서 줘야 한다고 막내 고모집에 있다가 잡히셨어요. 남영동 치안본부에 끌려가서 엄청난 고문을 받고 중앙정보부로 가셨죠."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자 남한적십자대표단 자문위원으로 두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판문점 내 북측 지역인 판문각 앞에서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자 남한적십자대표단 자문위원으로 두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판문점 내 북측 지역인 판문각 앞에서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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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에 실린 '1980년대를 맞이하며' 좌담회 중. 이 좌담은 비상계엄 아래서 삭제된다. 강만길, 백낙청, 서남동과 함께 했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창작과 비평>에 실린 '1980년대를 맞이하며' 좌담회 중. 이 좌담은 비상계엄 아래서 삭제된다. 강만길, 백낙청, 서남동과 함께 했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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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다시 만난 건 7월이 되어서였다. 당시의 고통스런 기억을 송준용 이사는 이렇게 전했다.  

"처음 한두 달은 정말 고통이었어요. 어디에 계시는지 살아 계신지, 돌아가신 건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서대문구치소에서 아버지를 만난 기억이 지금도 선명한데 완전 백발로 바뀌셨더라고요. 몸도 한 십키로는 빠져 있는 것 같고 체구도 왜소한데 더 빠지신 거죠. 그때 가족들이 붙잡고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 상황을 청암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담당관한테서 기쁜 소식이 왔다. 가족과의 연락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가 넣어준 담요도 들어왔다. 담요를 어루만지며 나는 울었다. 2개월간 생사조차 모르던 가족들이 그간 얼마나 궁금해 했을까." - <청암 송건호> 중에서

"서대문구치소에서 6개월 계시다 육군 교도서에서 나오셨어요. 12월 말에 나오셨는데 큰누나 결혼 며칠 전에 나오셔서 결혼식 참석은 하셨죠." 

송준용 이사는 평소에 메모를 많이 하던 아버지가 출옥 후에는 달라졌다고 한다. 

"기자 생활할 때 수첩에 기록을 다 하셨어요. 일일이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했는지 기록하셨는데 그렇게 끌려갔다 나오신 뒤로는 안 쓰셨어요. 그 수첩이 빌미가 돼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받았기 때문이죠." 

김대중 내란음로 사건으로 구속된 인사들 중에는 한승헌 변호사와 이호철 작가도 포함돼 있었다. 두 분 다 은평구에 거주하면서 청암과는 친분을 유지하는 관계였다. 

"생전에 교류를 많이 했죠. 한승헌 변호사님께는 제가 청암언론문화재단 이사도 부탁드려서 도와주시기도 했고요. 수십 년간 교류가 있었어요. 이호철 선생님도 마찬가지고요."

이호철 선생은 청암 선생을 보고 형광등이라는 별명을 선물했다고 한다. 

"아마 아버지 본인의 관심사 외에는 좀 둔감하신 편이어서 그런 별명을 붙였을 거예요. 대신 글을 쓰거나 자료를 모으는 건 정말 꼼꼼하셨죠."

송준용 이사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손에 뭔가를 들고 읽는 모습이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책을 구입하는 일은 늘 우선순위였다. 그렇게 모은 책과 자료는 역촌동 주택 지하에 공간을 마련해 보관했다. 

"역촌동 집 지하에 두 번이나 물이 찼어요. 아버지 책이 지금은 국회도서관에 있는데 가서 보면 아마 얼룩덜룩한 책들이 많을 거예요. 그걸 가족들이 한 권 한 권 다 펴서 말렸죠. 그러다 또 비가 오면 난리가 나고 그러기를 몇 달 했어요. 그래서 책이 좀 상한 것도 있는데 아버지는 되게 가슴 아파 하셨죠."
 
대외활동에 제약을 받으며 감시와 생활고로 암울하던 80년대 초반, 청암은 '거시기산악회'에서 재야인사들과 산행을 하며 위로를 얻었다. 이돈명, 리영희, 백낙청, 이호철, 변형윤 등과 산에 올랐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대외활동에 제약을 받으며 감시와 생활고로 암울하던 80년대 초반, 청암은 '거시기산악회'에서 재야인사들과 산행을 하며 위로를 얻었다. 이돈명, 리영희, 백낙청, 이호철, 변형윤 등과 산에 올랐다.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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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은 청암에게 책을 읽고 등산을 하는 시간은 건강과 마음을 챙기기에 더없는 시간이었다. 청암은 매주 일요일이면 교수·화가·언론인 등이 함께 하는 '거시기산악회'에 참여했다. 

"등산을 좋아하셨는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셨다고 해요. 아버지 혼자 새벽에 봉산에 가서 약수터 물도 떠오시고 그날 쓸 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집에 와서는 스크랩을 하시거나 뭘 쓰시거나 그냥 가만히 계실 때는 없었어요."

출옥 후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던 청암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졸아 가족들이 '고사리'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종합 진찰을 받았지만 옥고를 치를 때 골병 든 몸은 엑스레이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허리와 팔이 아파 생활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말>지의 시작

신군부가 들어선 이후 언론인을 강제 해직시키고 언론사의 편집과 제작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청암은 언론기업이 권력과 결탁한다면 언론자유는 침해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1984년 봄 새로운 언론운동 단체를 만들기 위해서 해직기자와 출판인들이 모여 청암을 찾았다.

그 해 12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를 창립하고 1985년 6월 언협 기관지인 <말>을 창간했다. <말>지는 제도권 언론이 보도하지 않던 국내외 사건을 알렸지만 의장이던 청암이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했다. 1986년 9월 <말> 특집호에서 보도지침 사건을 폭로하면서 정권의 비도덕성과 반민주성이 드러났고 정권의 강경대응은 그 수위가 높아져만 갔다. 

당시 잡지 발행을 두고 소나기를 피하자는 의견과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갈렸다. 모두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청암은 단호하게 발행을 이어갔다. <말>지는 1987년 6월 항쟁까지 민주화진영의 홍보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창립총회에서 의장으로 추대 받은 청암이 실무진을 소개하고 있다. 1984년 12월 19일, 서울 장충동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피정의 집'.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민주언론운동협의회창립총회에서 의장으로 추대 받은 청암이 실무진을 소개하고 있다. 1984년 12월 19일, 서울 장충동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피정의 집'.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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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 30일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 선언대회에서 각계각층의 참석자들에게 창간을 선언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송건호 새 신문 창간위원회 위원장(왼쪽), 공덕동 사옥 신축 현장에서. 사옥을 마련하여 경영안정화를 이룰 수 있었다. (오른쪽)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1987년 10월 30일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 선언대회에서 각계각층의 참석자들에게 창간을 선언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송건호 새 신문 창간위원회 위원장(왼쪽), 공덕동 사옥 신축 현장에서. 사옥을 마련하여 경영안정화를 이룰 수 있었다. (오른쪽) (사진제공 : 청암언론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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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직기자들은 새 신문을 준비하며 청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자유언론을 향한 신념이 투철하고 민주언론운동을 이끌던 그를 적임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1988년도에 한겨레 창간하고 5년 정도 계시다 물러나셨죠. 참 고생하시면서 신문 창간을 했는데 갈등도 많았던 것 같아요. 창간 주역, 중간에 들어온 이들 간의 갈등, 노선 차이, 편집 방향 등에서 의견이 달랐죠. 제가 재단을 만든 이유도 한겨레 갈등 속에서 아버지가 너무 힘든 모습을 봤고 아버지는 내가 지켜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재단을 만들었고 돌아가시고 난 다음해부터 언론상 시상을 했어요. 아버님이 쓰신 책을 전집으로 꾸며보고 평전도 만들었고 몇 년 전부터는 대학 사진전도 하고 있어요."

창간 초기부터 청암의 건강상태는 좋지 못했다. 회의 중에 졸기도 하고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1993년 6월 그는 대표이사에서 물러나 비상임 고문으로 추대됐고 병세는 빠르게 나빠졌다. 

"아버지가 파킨슨병 증후군으로 몸이 굳어가니까 몇 년 동안 좋다는 데는 다 모시고 다녔는데 점점 안 좋아지셨어요. 음식도 잘 못 넘기고 하니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비도 비싸고 하니 집에서 간병을 했어요. 어머니가 참 대단하신 분이죠. 어머니가 안 계셨으면 더 일찍 돌아가셨을 거예요."

2001년 청암이 세상을 떠나자 장례위원장 한승헌 변호사는 "청빈의 어려움, 박해·수난의 어려움 등 이 세상의 온갖 고난 풍파를 이겨내시고, 선비의 길, 지사의 길, 언론인의 길, 의인의 길을 걸어오셨다"고 청암의 일생을 평했다. 
 
국립 5.18 민주묘지에 잠들어 계신 청암 송건호 선생 (사진 : 유지민)
 국립 5.18 민주묘지에 잠들어 계신 청암 송건호 선생 (사진 : 유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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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은평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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