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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내가 수행원 양묵과 수일에게 위험에 처하면 내 곁을 떠나라고 일렀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이 좀 뜻밖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나와 함께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불안에 사로잡힌 가마꾼들은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양묵과 수일은 그들을 애써 진정시켰습니다. 나는 양묵과 수일의 태도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들의 친절과 도움은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지금까지 내 곁에서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우리 미국인은 그들의 노고에 보답해야 한다. 큰  위험 속에서도 변함없이 나에게 최선의 도움을 준 그들에게 내 조국이 마땅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단순한 정의이다."- 1884년 12월 10일자 일기 


충주 사람들은 우리에게 역말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세태 인심이 급변한 것입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할 경우를 대비하여 나는 아직 지불하지 못하고 있는 노임과 수고비를 그날 밤에 쓴 일기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열 두명의 가마꾼에게 진 빚 약 93,000푼
-양묵과 수일에게 줄 돈 각각 50달러    
-양묵의 하인 수일에게 줄 돈 15불

내가 이 비용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마땅히 미국 정부가 해결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충주의 주막에서 나는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잤습니다. 옆 방에서는 "아이고 죽겠다 oiko chuketta"라는 신음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습니다. 다음날 9시 32분에 출발했습니다. 가장 큰 걱정은 돈 문제였습니다. 돈이 달려 숙식비며 가마꾼 노임을 해결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도망갔던 두 명의 가마꾼 중에 한 명이 되돌아 왔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발이 아파서 못 왔다고 하더군요. 날더러 조선 옷으로 위장하라고 양묵과 수일이가 권했지만 나는 거절했습니다.

수일이 내게 곶감을 주었는데 무척 달았습니다. 우리는 눈 길을 헤치며 고개를 넘고 강 건너 장호원을 향해 갔습니다. 도중에 일본에서 군사학교를 다녔던 생도 한 명을 만났습니다. 양묵이 아는 사람이어서 서울의 상황을 물어보았습니다. 맙소사! 홍영식 참판은 살해되고 김옥균과 박영효는 실종되었다니... 수도와 정부를 장악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가 일본과 친한 조선인들을 색출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양묵과 수일의 얼굴빛이 크게 변했습니다. 

우리는 오후 4시가 넘어 장호원의 주막에 들었습니다. 주인은 기품이 있는 노인장이었습니다. 서울의 일본 공사관은 불에 탔고 민참판(민영익)은 돌에 맞았다고 노인장이 말했습니다. 나는 정신이 혼란해졌습니다. 주막은 매우 청결했고 주인장은 친절했으며 음식도 일품이었습니다. 특히 소고깃국이 그만이었습니다.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주인장이 심각한 얼굴로 들어왔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우리는 직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주막에 몰려 든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장에게 "당신은 집에 '왜놈'을 들였다. 우리는 이 밤중에 당신을 치러 왔다. 당장 왜 놈을내쫓지 않으면...."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는 주인장에게 내 여행증을 보여주며 이것을 가져가 통장에게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민참판의 소개장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상황을 완전히 반전시켰습니다. 그 고장은 민씨 일족의 땅이었고 마을사람들은 민씨 일족에 대해 충성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내가 민참판의 빈객임을 알게 되자 태도를 일변하여 서로 우리를 돕겠다고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길 안내와 동행을 자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돈이 바닥나 가마꾼에게 일당을 줄 수 없는 참담하고 위험한 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당장 돈을 융통해야 하는데 아무런 방도가 없었습니다. 나는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가까스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무거운 마음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서울의 공사관 앞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에서 나의 행선지를 알리면서 내가 왜인으로 오인될 수 있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전했습니다. 곧 수일이가 상인 한 명을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세상에... 생면부지의 그가 내게 5000푼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감격했습니다.

그는 한사코 사양했지만 나는 그에게 감사의 표시로 내 지갑과 6엔을 건냈습니다. 나는 또 다른 상인에게서 5000푼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나는 돈 기근으로 인한 천근 만근의 근심을 내려 놓고 발길를 옮겼습니다. 오후 5시가 넘어 이천의 주막에 들었습니다. 서울까지는 130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마을 유지로부터 서울 상황에 대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심각한 변란이 일어났음이 분명했고 나 자신도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임이 또한 분명했습니다. 조선의  상황에 대하여 자꾸만 암울한 생각이 떠올라 내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날씨는 추웠지만 맑고 쾌적했습니다. 간 밤의 우울이 사라졌고 기분이 호전되었습니다. 그날 오후 길 위에서 놀라운 행운을 만났습니다. 고종 임금이 나를 구하기 위하여 파견한 관리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왕명이 새겨진 원형 명판을 내보였습니다. 나는 놀라움과 감격을 가까스로 억눌렀습니다. 관리는 내게 지금 서울로 가는 것은 위험하니 광주의 산성으로 가라고 조언했습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조지 포크 , #고종,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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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자의 최신기사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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